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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4/22 03:45:31
Name   탐닉
Subject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도저히 밥해먹을 자신이 없어 난생 처음 집으로 사들고온 국밥 냄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지독한 발냄새와 왜 하필 오늘인지 고칠 돈도 없는데 고장난 핸드폰 액정을 욕하면서.

투수들이 선수 생명을 보호 하기 위해 투구 수를 일정 수준 이상 제한 하는 것 처럼 바리스타도 똑같습니다. 별거 아닌 것 처럼 보이지만 템핑 하는 지지대가 지나치게 높아서 어깨부터 손목 까지를 곧게 펼 수 없는 환경이거나 여러 변수들의 컨디션에 따라 템핑 압력을 상당히 줘야 하는 상황이라면 손목에 무리가 가게 되고 바리스타 생명을 위협 받을 수 있죠. 그러나 단언컨데 이 땅의 카페 사장님들은 야구 감독님들 보다 배려심이 부족한 편입니다. 대부분이 비전문가이면서도 권력을 갖고 있는 그들은 항상 자기 주장을 관철 하기 위해 어디에든 사람을 갈아넣을 준비를 하고 있죠. 감독님들 처럼 선수를 아낄 필요가 없습니다. 편의점 알바 만큼 많아진 그리고 값싸진 바리스타 채용이야 일도 아니니.

그저께 - 이제 열두시가 지났으니 엊그제군요 - 밤중에 급히 전화를 걸어 내일 당장 나와달라고, 가오픈일이 내일인데 정신이 없어 이제야 구인을 한다는 말이 너무 반가웠습니다. 어디든 일용직 나가서 시멘트가루 마시는 일보다는 나을테니. 그런데 이틀만에 다시 내면의 갈등을 느낍니다.

처음 본 카페의 모습은 뭐랄까.. 좀 묘했습니다. 아무리 가오픈이지만 이렇게..? 엔틱 유럽 이라는.. 조잡한 생김새에 비해 터무늬 없이 비싼 가격을 붙여놓은 가구며 소품들을 불규칙하게 그리고 빼곡히 채워놓은 공간에 입구엔 바닥 뗌질을 한 터라 의자로 턱 하니 막아놓은 것도 그렇고. 스피커도 없고. 조명도 형광등과 군데군데 이가 나간 주광색 샹들리에 뿐이고. 누가 설계했는지 바 동선에 딱 걸리게 튀어나와 있는 배수관과 그라인더 바로 밑에 제빙기를 들여놓아 아예 협력이라는 걸 불가능하게 만든 구조.. 그리고 원랜 사장님의 소유인 가구점에서 일한지 한달 됐다는, 커피 일은 처음이라는 해병대 출신의 잘생긴 스물 다섯 청년. 팔년 경력에도 생경했던 그 복합적인 아우라에 백평 정도 된다던 매장이 테라스까지 적어도 백오십평 이상 되어보이는 건 생각할 새도 없이 그냥 스쳐지나가 버렸습니다. 원두를 공급 한다는 사람도, 머신을 설치 했다는 사람도. 아무도 그곳을 책임 지지 않았으니까. 저는 또 덥썩 하고 감당하지도 못할 사명감을 집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 해보니 이상하군요. 왜 첫 출근이었던 금요일은 드문드문 했던 손님들이 토요일에 그렇게 미친듯이 몰아닥쳤는지. 이태원은 원래 그런지..

첫날 템퍼도 없는 환경이어서 제대로 된 추출 경험을 해보지도 못한 그에게 오늘은 집에서 들고 간 템퍼를 쥐어주고 대충이라도 설명하려다 손님을 받기 시작했는데 한 이십분 쯤 지나니 주문서가 마구 쌓이더군요. 그래서 역할을 바꿔 카운터를 맡기고 제가 에스프레소를 뽑기 시작했는데.. 진동벨이 열개 뿐인 매장에서 꾸역꾸역 주문을 받다가 결국 주문서에 손님 생김새를 묘사하는 메모를 남기고 서빙 해드리겠다는 안내를 하더라구요. 아니, 아무리 경험이 없어도 그렇지 이렇게 넓은 매장에 둘이 일하면서 어떻게 손님 찾아다니면서 서빙을 하겠다고.. 게다가 가오픈이라 메뉴가 별로 없다, 오픈하면 더 다양하게 준비 해놓을 예정이다.. 사족을 그려가면서 손님들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느라 시간을 먹고 있는 상황이란..

순식간에 불어난 주문서와 계속 들이닥치는 손님들. 얼음과 우유는 모자라고.. 이미 나간 주문서를 버리지 않아 생기는 트러블, 주문을 잘못 받아 생기는 트러블. 현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가는 주문서들.. 그 와중에 물을 달라 화장실은 어디냐 와이파이 비번은 뭐냐고 물어오는 손님들.. 점심러시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동안 그곳은 지옥이 됐습니다. '침착하자.. 평정심을 잃지 말자.' 속으로 계속 되내이면서 정신을 차리고 일단 현관문 세개중 두개를 닫았습니다. 새로 들어오는 손님들에겐 자리 먼저 보시고 삼십분 후에 카운터로 오시면 주문을 받겠다고 하고 하나하나 어지러운 바를 정리하기 시작 했죠. 그런데 사장님이 지인이 왔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라는 겁니다. 여기서 저는 평정심을 50퍼센트 정도는 족히 잃어버렸습니다. 너무 바빠서 안된다고 했더니 그럼 주문 다 끝내고 갖고 오라고 신경질 적으로 쏘아대곤 돌아가버린 그녀는 환갑이 훨씬 넘었다는, 독일 생활 경험이 있는 어딘가 날카롭지만 슬프고 경계심 가득한 눈빛에 그리고 화를 잘 내는 왜소한 할머니 입니다.

원두가 비싼데 도징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냐는 간섭. 바 앞을 지키고 서서 손님들에게 쌩뚱맞게 메뉴를 추천해 당황 시키고. 바닥에 커피가루와 물이 떨어진다고 안그래도 비효율이 넘치는 동선을 가로막으며 바에 들어와 발로 걸레질을 해대고 심지어는 닫아놓았던 현관문을 다시 열어제끼며 이러면 사람들 안들어온다고, 바람이 불면 동전으로 주문서를 눌러놓으면 되지 않느냐고 계속 잔소리를 해대는 통에 우유좀 사오라고 언성을 높여버렸습니다. 아무리 노비들에 대한 배려보다 자기 욕심이 먼저라고 해도 토하기 직전까지 우겨넣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이러면 도저히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거 아닌가.. 왜 그걸 모르지..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러시에 아무리 삼켜도 늘어만 가는 주문서 때문에 드디어 손님들이 우리를 측은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됐죠. 다들 나갈 때 쟁반이며 컵이며 갖다 주고 나가고.. 실수로 메뉴가 잘못 나가도 이해 해주고... 그런데 그때 손님 한분이 왜 이렇게 메뉴가 안나오냐고 주문 취소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실랑이를 벌이게 됐습니다. 너무 바쁘다.. 이 와중에 손님이 주문한 내역을 포스에서 찾는건 불가능하다.. 언성이 다시 높아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카드로 결제 했어도 제 지갑에서 그냥 오천원 꺼내주고 보냈으면 어땠을까 싶은데.. 간단한 생각도 못했던 걸 보면 여기에서 저는 평정심을 80퍼센트 정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일초가 아까운 상황에 일분 넘게 불평을 해대는 아주머니를 원망 해봤자 내 무덤 파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언성을 높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긴 그땐 원망할 겨를도 없긴 했네요. 도대체 무슨 정신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그에게 자긴 딱 주문만 받되 제발 주문서에 진동벨 숫자 정확하게 입력하고 일회용컵 뚜껑 닫고 홀더랑 빨대만 끼워달라. 다른건 내가 다 하겠다. 선을 딱 긋고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 했습니다. 이 지옥에서 나는 나갈 수 없다.. 사탄이 있다면 멱살을 잡겠다는 각오로 정말 미친듯이..

쉴새 없이 헤쳐나가다 보니 어느새 저녁러시를 치고 있더군요. 거짓말 같다는 말과 파도 같다는 표현을 실감 할 수 있었습니다. 점심과 저녁 사이 숨 쉴 겨를이 있는게 보통인데. 그런 것 따위 없었습니다. 일곱시쯤 손목에서 경련이 일어나 우유 스팀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쉬지 않고 작동하느라 그라인더 온도가 올라가서 추출이 빨라졌기 때문에 템핑 압력을 줄일 수도 없었죠. 경련이든 뭐든 엑셀을 밟아 세시간 반을 더 달렸습니다. 잡았던 멱살을 놓아버리고 가게 문을 나서면 더 무서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니까. 후회 되고 괴로워서 잠 못자고 울어야 하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내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잔인한 지옥.. 그쯤 되니 현기증이 나서 앞이 까메져 대략 십초 쯤 꼼짝 못하고 주저앉아 있다가 일어나기도 하고. 물한모금 마실 시간도 아끼느라 여덟시쯤인가 처음 화장실에 가서 갈색 소변을 보고 세수를 했을 땐 코피가 나기도 했고요. 사장님한테 내일 일을 못할 수도 있겠다.. 자고 일어나서도 손목이 아프면 가게를 하루 쉬어야 할지도 모른다 했더니 황당해 하면서 그건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같이 일하는 그가 그럼 자기가 오늘 제 역할을 하겠다 하길래.. 안된다고 했죠. 그럴 순 없다고. 가능하지 않다. 아까 낮에 경험 하고도 그러느냐고..

저는 잘못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일부러.. 약간은 습관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합니다. 혹시 기분 나쁜 일 있냐고 미리 물어보기도 잘 하고. 아까 퇴근 하고 버스 타기 전에 잠깐 앉아서 오늘 너무 수고 했다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오늘 기분 나쁜 일 있었냐고. 그랬더니 조심스럽게 얘기하더라구요.
'기분이 나빴다기 보다는.. 아까 사장님이랑 얘기 할 때.. "형, 제가 능력이 안되서라기 보다는 점심 때 손님들이 너무 많았던거 아닌가" 싶다고.. 근데 내가 정말 능력이 안되는 거면 반성 해야 하는거니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속으로 철렁 했습니다. 왜 그가 있는 앞에서 사장님한테 그를 흉보는 의미로 들릴 수 있는 말을 했던가.

변명을 했습니다. 내가 원래 긍정적인 쪽이든 부정적인 쪽이든 말을 직설적으로 한다. 커피 처음 하는 사람이니 미숙한건 당연한거고, 아까 일하면서 자기 지금 150% 역할 하고 있다는 말 했던 것도 진심이라고.

말이 통하는 느낌이 들어 쭉 얘기를 했는데 대화중에 그에게 형 성격이 예민한 건 확실히 느껴졌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막차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왜 변명을 하는가.. 예민한건 사명감을 집어들었기 때문인가.. 나는 왜 분노를 조절하는데에 장애가 있는가.. 나는 항상 고생은 제일 많이 하고 왜 죄책감 까지 느끼는가.. 내가 만약 그였다면 나를 예민하게 봤을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다가 예전에 사귀었던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던 애인이 생각 났습니다. 모르겠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질문에도, 심지어 분명히 답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질문에도 자신있게 아는 바를 얘기하기 주저하게 될 때 공황장애가 생기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나를 사랑해줬던 그녀는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을 아버지의 칼부림이 학창시절을 파괴했을 그 무렵 부터 품고 살았던 걸까.. 서른 두살인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그녀의 마음을 이제야 공감했다니.. 만약 내가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이런 마음을 공감 할 수 있었다면 인연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여러분.
오랜만에 주절주절 하소연을 써내려가느라 두서없는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 힘드실 테지만.. 부탁을 드립니다. 저를 욕 해주세요. 저는.. 오늘 사탄의 멱살을 잡고 어머니가 낳아주신 귀한 손목을 혹사하고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와서 술이나 마시면서 제가 못되게 굴어서 헤어진 전 여자친구 생각이나 하고 있고.. 동시에 그래도 내가 처한 상황이 이지안씨가 처한 상황보단 낫지 하면서 자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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