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18/06/23 02:39:53 |
Name | 자일리톨 |
Subject | [강철의 연금술사] 소년만화가 육체를 바라보는 관점(스압) |
전에 썼던 글 링크 :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075/read/30585505?search_type=member_srl&search_key=2171167
링크된 글을 보신 분들을 아마도 이 글이 더욱 잘 이해될 것 같습니다 -------------------------------------------------------------------------------
오늘날 미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대중문화를 꼽으라하면, 히어로 영화와 재패니메이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장르는 20세기 초의 ‘만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지만 동시에 ‘미국’과 ‘일본’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물론 여기서 미국과 일본의 문화분석을 시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엔 나의 깜냥이 너무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히어로 영화’와 ‘재패니메이션’, 더 정확히는 ‘MCU’와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주인공의 ‘육체’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강철의 연금술사>가 뛰어난 작품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 MCU를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다.) 1. MCU와 육체 : 정신에 흡수되는 육체 MCU의 캡틴 아메리카(이하 캡틴)와 아이언맨은 미국을 은유적으로 상징하는 두 주인공이다. 한 쪽이 미국의 오랜 신념(캡틴)을 상징한다면, 다른 한 쪽은 세계 최대의 산업 국가이자, 문화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미국의 자신감(아이언맨)을 상징한다. 아이언맨은 미국의 대표적 산업 중 하나인 군수산업과 미국의 대표적 문화컨텐츠인 헐리웃의 결합이 만들어 낸 존재이다. 캡틴이 미국의 정신이라면, 아이언맨은 미국의 육체다. <어벤져스> 1편에서 캡틴은 신념이 부재하는 아이언맨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즉 그 화려한 육체(아이언맨 슈트)를 제외하고 나면 토니 스타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캡틴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캡틴이라는 존재 자체가 정신의 우위를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퍼스트 어벤져>에서 알 수 있듯이 스티브 로저스는 본래 왜소한 육체를 가진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완고하고 정의로운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고, 그런 신념은 그를 초인적 능력을 지닌 캡틴 아메리카로 재탄생시켰다. 똑같이 슈퍼 솔저 실험을 거친 나치의 슈미트가 레드 스컬이 된 것은 캡틴과 달리 정의롭지 못한 신념을 지녔기 때문이다. 즉 캡틴의 탄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정신이 곧 육체다’라는 명제다. 캡틴에게서 정신과 육체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육체는 정신에 종속된 부가적인 것에 불과하다. <아이언맨> 1편의 마지막은 토니 스타크가 “내가 아이언맨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하지만 ‘나=아이언맨’이라는 등식은 캡틴의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곧바로 허점을 노출한다. 즉 ‘슈트’와 ‘토니 스타크’ 중 어느 쪽이 ‘아이언맨’의 본질이냐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이언맨’의 본질은 ‘토니 스타크’에게 있다. 결과적으로 아이언맨 역시 캡틴의 논리를 따라간다. 즉 아무리 화려한 육체(슈트)을 지녔다고 해도 신념(토니 스타크)이 부재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역대 모든 MCU히어로들이 집결한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가 '캡틴 VS 타노스', ‘생명은 저울질 할 수 없다 VS 학살을 해서라도 세계를 지켜야 한다’로 요약되는 것은 실상 MCU의 모든 히어로가 캡틴에게 감화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이런 의미에서 캡틴과 아이언맨 사이에 있는 이념적 대립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언맨 역시 올바른 신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신이 곧 육체다’라는 캡틴의 논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토니는 조금 더 효율적인 방안, 오늘날의 미국스러운 방안을 추구할 뿐이다. 캡틴과 아이언맨은 단지 방법론, 수단의 차원에서만 구분될 뿐이다.
<시빌워>의 마지막 파트는 캡틴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즉 가족을 죽인 원수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캡틴의 신념이다. 여기서 캡틴은 미국의 정신 중 하나인 ‘자유’를 보여준다. 한국의 문과생들을 ‘정언명령’으로 괴롭힌 바 있는 칸트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실천이성비판>에서 논한다. 그에 따르면 도덕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의 도덕성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감정(감성적 경향성)과 항상 어긋난다. 예컨대 부모의 사망 경위를 알게 된 아이언맨은 자신의 감성적 경향성에 따라 윈터솔져를 죽이려 할 것이다.(그렇게 하면 진정으로 ‘행복’한가는 차치하자) 물론 그것은 도덕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여기서 아이언맨이 도덕법칙을 따라 윈터솔져를 살려줄 경우, 아이언맨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즉 윈터솔져를 죽이고 싶어하는 자신의 감정을 극복하고 도덕법칙에 따라 움직일 때 토니 스타크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캡틴이 아이언맨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이 ‘자유’와 ‘도덕’이다. 이러한 ‘자유’와 ‘도덕’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 예수일 것이다. 예수는 오른쪽 뺨을 맞을 경우 자신의 감정을 극복하고 도덕법칙에 따라 왼쪽 뺨도 대주라고 한다. 그는 ‘자유’를 통해 자신의 ‘도덕’을 보여준다. 뜬금없이 웬 예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미국과 기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에서 캡틴과 예수는 일종의 유비관계에 놓여 있다. 미국의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한다.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건국의 아버지이자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인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수성가적 성격은 청교도의 세속적 엄숙함과 흡사하다는 것을 막스 베버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더군다나 벤자민 프랭클린의 집안은 대대적으로 청교도 집안이었다. 이 자리에서 쓰잘데기 없는 청교도 역사에 대해 떠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근대 청교도에서 세속적인 성공은 곧 신의 은총이 자신에게 내려졌다는 증거로 이해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육체의 내부에는 정신이 깃들어있다는 캡틴의 신념은, 세속적 성공의 내부에 신의 은총이 깃들어있다는 청교도적, 미국적 신념을 적절히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겉모습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 이것이 미국의 정신이자 MCU가 히어로들의 육체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런 점에서 <인피니티 워>에 등장하는 아이언맨의 나노 슈트는 징후적이다. 그들은 첨단 기술을 통해 정신과 육체를 결합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캡틴이 당대의 첨단 기술인 슈퍼 솔저 세럼을 통해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통합시킨 것처럼, 아이언맨 역시 당대의 첨단 기술(나노 기술)을 통해 정신과 육체를 분리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한다. 정신과 육체의 결합을 강박적으로 실현하려는 미국이 생각할법한 발상이라고 하겠다.(<왓치맨>과 <다크나이트>처럼 이러한 미국식 히어로의 환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예술작품 역시 존재한다) 2. <강철의 연금술사>와 육체 : 정신과 육체의 변증법
<강철의 연금술사>(이하 <강연>)에서 육체는 정신과 독립된 무언가로 다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강연> 세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연금술로 ‘이해, 분해, 재구축’ 할 수 있다. 인간의 육체 역시 그러한 연금술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오토메일은 기계가 인간 육체의 ‘등가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드는 인간 육체 안의 탄소를 통해 몸 전체를 하나의 금속 덩어리로 만든다. 쇼 터커가 키메라로 만들어버린 니나, 갑옷에 영혼만 정착되어 살아가는 알폰스 엘릭은 정신과 육체가 별개의 존재임을 보여준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는 ‘밸리 더 쵸퍼’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어있지만 둘 모두 현실적 존재로서 존재한다. 즉 <강연>에서는 ‘기계처럼 분해되는 육체 VS 기계화 될 수 없는 정신’이라는 데카르트적인 구분법이 작동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강연>에서는 인간을 ‘육체’, ‘혼’, ‘정신’ 세 가지로 분리한 뒤 ‘혼’과 ‘육체’를 잇는 것이 ‘정신’이라고 말하지만, 그다지 중요한 구분법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정신’과 ‘혼’을 같은 것으로 사용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강연>은 육체에 대해 MCU와 동일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두 작품은 육체를 동일하게 근대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즉 육체란 하나의 기계적인 것, 이해, 분해, 재구축되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육체를 정신에 결합시키는 방법에서 두 작품 사이에 차이가 있다.
1) MCU는 내면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 곧 육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MCU의 주인공들은 육체적 손상을 입었을 때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 내면의 강함을 드러낸다. ‘토니 스타크’의 ‘슈트’가 무용지물이 되었을 때, ‘토르’가 ‘눈’과 ‘묠니르’를 잃었을 때, ‘스티브 로저스’가 ‘왜소한 몸’을 지녔을 때, 그들의 내면은 가장 부각된다. 반면 그들이 약해지는 시기는 바로 그들의 내면이 장애물에 부딪혔을 때이다. MCU는 사실 소년만화와 비슷해 보인다. <원피스>에서 후지토라는 맹인이지만, 그 때문에 강자처럼 보인다. 그 외에도 수많은 소년만화에서 외팔이 검사나 신체적 결함을 지닌 자들은 유달리 강해보인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발달된 근육질의 캐릭터 대부분은 무능하게 그려진다.(한마 유지로 같은 예외도 있다) 그들의 육체적 손상은 그들이 내면이 더 강해보이기 위한 하나의 ‘표지’ 혹은 그들의 내면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육체를 껍데기로 만들어버린 뒤 정신에 흡수시킨다.
2) <강연>은 MCU와 동일하게 육체를 껍데기로 바라보지만, 육체를 정신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 혹은 정신에 종속된 것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강연>은 인간에게서 육체와 정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육체는 언제든지 연금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강연>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가 정신과 육체로 분리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비극이 <강연>의 주요 테마이다. 니나 에피소드는 이런 <강연>의 테마를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강연>의 육체는 MCU에서의 육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인간은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 육체적 손상이 정신의 붕괴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 반대로 잠깐의 정신적 혼란이 치명적인 육체적 파멸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MCU보다 강조한다. 예컨대 애인을 되살리기 위해 광신도가 된 로제나 육체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항상 의심에 빠지는 알폰스 엘릭 등이 그러하다. 정신의 압도적 우위 아래 육체를 부가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MCU와 달리 <강연>은 양극을 어떻게 매개시킬지 고민한다. 한쪽에는 정신뿐인 존재(알폰스 엘릭)가, 다른 한쪽에는 육체뿐인 존재(엘릭 형제의 어머니와 닮은 무언가)가 놓여있다. 이 둘을 인간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 어떻게 담아내는가가 바로 <강연>의 과제이다. (여기서 잠정적인 결론을 말하자면 그 둘의 매개는 ‘타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즈미 커티스와 엘릭 형제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인체연성’(더 정확히는 ‘인간연성’)은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감히 인체연성을 하려했던 오만함의 ‘등가물’로서 자신의 신체를 잃는다. 지난번 글에서 나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강연>에서 일반적인 연금술의 사용법(탄소로 경화, 기계 고치기 등등)은 ‘제로섬’의 등가교환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내가 10을 투자하면 그 10만큼의 무언가를 얻는다. 하지만 유독 인체연성을 할 때만큼은 ‘플러스섬 혹은 마이너스섬’의 등가교환을 보여준다. 예컨대 이즈미 커티스와 엘릭 형제가 잃어버린 육체(내장, 팔다리, 몸 전체)의 ‘등가물’은 무엇인가? 물질적으로 봤을 때에 잃어버린 육체의 등가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뜻 이것은 제로섬도 되지 못하는 마이너스섬처럼 보인다. 즉 10을 투자했는데 1도 못 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엘릭 형제가 깨달음을 얻고 ‘성장’했다는 점에서 육체의 등가물은 ‘교훈’, ‘깨달음’이며, 결과적으로는 플러스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금술은 유독 인간과 관련될 경우에만 주인공들은 더 얻거나 더 잃는데, 킴블리가 말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더 얻는 것은 무언가를 더 잃는 것과 한 끗 차이다. 물론 <강연>이 보여주는 것은 ‘더 얻는’ 경우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본래 제로섬이어야 할 연금술이 왜 인간과 관련될 때에만 더 얻거나, 잃느냐는 점이다. 이는 결국 <강연>의 작가가 ‘육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와 연결된다.
연금술의 기본은 1) 이해, 2) 분해, 3) 재구축이다. 에드워드가 부서진 라디오를 연금술로 기계를 고치는 장면을 예로 들자면, 라디오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을 기본 단위(부품, 원자)로 분해 한 뒤, 다시 원래의 형태로 재구축한다. 이 과정은 우리가 레고를 가지고 노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즉 눈앞에 놓여있는 10개의 레고 부품으로 나는 원하는 무언가를 만들고 부수는 과정을 반복할 뿐이다. 레고 부품은 더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반면 인간을 연성할 경우, 그 나름대로 이해, 분해, 재구축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재구축된 것은 원래 의도했던 것이 아니다. 엘릭 형제가 재구축 했던 것은 어머니가 아니었으며, 이즈미 커티스가 만든 것 역시 자신의 자식이 아니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이해, 분해, 재구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진정 연금술로 인간을 ‘연성’하기 위해서는 ‘제로섬’ 이상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무언가를 잃고(마이너스섬) 교훈을 얻어야(플러스섬) 한다. 인간을 연금술로 이해하려고 할 때 그들은 육체를 잃는다. 그들에게는 이제 정신밖에 남지 않는다. 이렇게 정신(혼) 뿐인 인간이란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나 ‘현자의 돌’과 다를 바 없다. 정신뿐인 인간은 종종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되는 거대화 된 엔비의 몸속에 박힌 인간들과 같다. 반면 육체뿐인 인간들은 말 그대로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다.
예컨대 반 호엔하임 안에 현자의 돌로서 존재하는 50만의 크세르크세스인들은 비록 육체를 되찾지는 못하지만, 호엔하임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의 의지를 지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알폰스의 정신은 애초에 에드워드의 팔을 대가로 겨우 갑옷에 정착하고 있으며, 그 후에 겪는 존재의 의심 역시 에드워드와 윈리의 도움으로 이겨낸다. 광신도 로제는 어떠했는가. 물론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자기 발로 걸어라’라고 말하지만, 그 말을 전해주는 것은 에드워드 자신이 아닌가. 이 외에도 복수에 눈이 먼 스카나 눈을 잃은 로이 머스탱, 러스트에 의해 반신불수가 된 쟝 등 수많은 인물들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들에게서 육체의 손상은 문자 그대로 육체의 손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강함의 표지나 그들 내면의 강함을 입증하는 계기가 아니다. ‘손상’은 ‘손상’이다. 그렇기에 ‘육체의 손상’을 대리보충 해줄 수 있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육체=타인’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매우 이상한 등식이라 생각될 수 있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둘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이것은 절대불변의 진리다. 하지만 정신은 육체가 없이는 금방 붕괴되고 만다. 따라서 육체의 손상만큼 육체를 보충하거나, 타인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끊임없이 회복되는 ‘육체’를 지닌 일곱가지 대죄들은 실제로는 ‘타인=정신=현자의 돌’을 통해 존재한다. 호문쿨루스 역시 크세르크세스인을 전부 희생시켜 자신의 존재를 유지시킨다. 비단 호문쿨루스 뿐만이 아니다. 에드워드의 육체를 대신하는 오토메일은 윈리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마지막에 원래 육체를 모두 되찾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왼다리는 남겨두었다. 그것은 인간이란 타인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교훈이다. 3. 결론 : 연금술의 완성 <정신은 육체에 의존해 살아간다> <나는 타인에 의존해 살아간다> 이 두 문장은 정확하게 같은 말이다. <나(정신)와 타인(육체)은 분리되어 있다> <나(정신)에 대해 타인(육체)은 ‘외적’이다> 이것은 근대가 ‘자아(정신, 코기토)’를 만들어낸 순간부터 절대적 진리이다. 하지만 ‘타인(육체)’ 없이는 ‘자아(정신)’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알폰스의 혼’을 대가로 ‘에드의 팔’을 되찾아주는 장면은 ‘타인=육체’의 등식을 가장 명확하게 형상화한다. 물론 애초에 에드의 팔을 대가로 알폰스의 정신을 얻었기에 가능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강연>내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인체연성에 성공한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위의 장면은 ‘등가교환의 법칙’이 지닌 표면적인 의미(제로섬)를 넘어선 진정한 의미(플러스섬)가 구현되는 장면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일종의 헤겔적 변증법이 완성된다. 널리 알려져있듯이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의 형태를 띠고 있다. 어떤 한 명제가 세워지면, 그에 대한 반명제가 명제 자신으로부터 도출되고, 결국에는 양 명제의 모순을 ‘지양aufheben’한다.(‘지양’이라는 말에는 ‘폐기하다’와 ‘보존하다’라는 모순되는 의미가 함께 들어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양’은 ‘등가교환의 법칙’이 지닌 양가적 의미가 극의 진행에 따라 종합되는 모습을 잘 설명해준다고 하겠다.) <강연>은 처음 다음과 같은 ‘명제these’를 세운다. 1)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분리된다. 하지만 바로 다음과 같은 ‘반명제anti-these’가 따라온다. 2) 인간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채로는 존재할 수 없다. <강연>의 긴 여정은 두 명제의 ‘종합명제syn-these’를 제시한다. 3)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분리된다. 헤겔의 변증법이 그러하듯, 최초의 명제와 마지막 명제는 표면상에서는 같아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강연>의 긴 여정을 통해 1)과 3)의 의미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만약 수학적인 의미에서 1)과 3)을 본다면 아무런 의미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수학과 같은 형식논리적인 세계는 ‘성장’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증논리적인 세계는 언제나 ‘성장’에 기반해 있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분리된다. 하지만 동시에 분리된 정신과 육체의 종합이야말로 인간이다. 1)의 인간은 아직 단독적인 개체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육체’를 깨닫는다. 그리고 긴 여행을 통해 그는 분리된 ‘타자’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3)의 인간은 개체적 인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지난 글에서 나는 <강연>을 ‘교양소설’에 비유했다. 헝가리의 철학자인 루카치에 따르면 소설의 이념이란 ‘개인’과 ‘세계’의 ‘종합’이다. <강연>이 시도한 것 역시 바로 이 개인과 세계의 ‘종합’이었다. <강연>의 작가는 ‘개인’과 ‘세계’의 대립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변주하고 있다. 정신과 육체의 대립은 그 예 중 하나이다. 정신과 육체라는 사소한 설정 속에는 강연 전체의 테마가 깃들어 있다. 즉 하나의 사례 속에 전체가 깃들어 있다. 헤겔의 말과 <강연>의 대사를 빌려 진실로 말하건대, ‘하나는 전체고, 전체는 하나다.’ * 수박이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7-02 08:06)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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