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9/01/31 09:30:02수정됨
Name   The xian
Subject   돈이 없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
(물론 실제 역사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태조 왕건에서 학사 최승우는 왕위 계승 문제로 대립이 걷잡을 수 없게 되며 후백제의 멸망이 다가오자 자신의 글들을 태우거나 선물로 주고, 자신을 수행하던 집사나 식솔들에게 후한 보수를 주고 내보낸 다음 능환과 상귀가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고 쳐들어 오자 그들을 맞이한 뒤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일일이 다 말씀드리는 것은 곤란하지만 당시 최승우 학사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공감이 갈 만한 일이 최근 몇 년간 제 주변에서 많이 일어났습니다. 제 자신의 신상에도, 주변에도, 주위에도 말입니다. 그런 분위기에 점점 끌려들어가다보니 어느 새 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처분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피규어라든지 책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든지.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빚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지고 있는 빚이 한두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빚을 져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과연 제가 그걸 지금처럼 너무도 쉽게 팔았을까요? 족히 잡아도 최소 수백만원어치 되는 물건을 그렇게 쉽게 판다고 내놓을까요?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봤습니다. 제 자신에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정말로 제가 없어서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 파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일을 더 늘려서 그걸 가지고 있었을 거라는 거고, 지금 몸이 아프다느니 지쳤다느니 어쨌다느니 해서 무언가를 더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낱 제 자신이 조금 더 생각을 그만두고자 하는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제 자신의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전엔 그랬었기 때문에 딱히 변명할 말도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지금 저에게 없는 것이 단지 돈만이라면 차라리 부끄럽지 않겠다 싶습니다. 낡아빠진 말이지만 정말로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녀석이니까요. 돈이 없는 것보다 삶에 대한 '애착'까지 같이 없어진 것이 제가 제 자신에게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삶이란 건 무언가를 쥐고 살아가야 하는 목적과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원이 되는 애착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삶의 의지가, 삶의 목적이 사라져 가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버리고 팔면서 무언가를 없애는 것이 성현들이나 신들의 가르침처럼 삶에 있어서 무언가를 내려놓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나 나태했던 주변을 정리정돈하는 것만이라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마음보다는 삶에 있어서 '내가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사라지고 삶을 더 살아갈 만한 동기 부여가 그만큼 사라지니까 모든 게 덧없어 보이는 것이 더 강하다 싶기에 제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입니다.


오죽하면, 요즘 과거의 삶을 돌아보거나,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는 글을 쓰는 빈도가 높아진 것도 어쩌면 그것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아. 그렇다고 혹시나 제가 죽을 걱정을 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잔병도 큰병도 많아서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제 의지로는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어차피 매여 있는 몸이니 저에게는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생을 마감할 자유 같은 건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런 위기가 닥치더라도 살아서 벗어나야 하는 참으로 무모한 환경에 놓여 있다고 해야 맞는 상황이지요.

다행히 곧 명절입니다. 명절에는 다른 바쁘고 신경쓸 일이 많겠으나 명절에 일을 놓고 잠깐 쉬는 기간 동안 다시 마음을 다잡고 살아 볼 길을 찾아야겠다 싶습니다.


- The xian -

* 토비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2-15 00:12)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4
  • 기운내세요
  • 공감이 많이 되는 글입니다...
  • 응원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39 정치/사회가속주의: 전세계의 백인 지상주의자들을 고무하는 모호한 사상 - 기술자본주의적 철학은 어떻게 살인에 대한 정당화로 변형되었는가. 18 구밀복검 20/03/24 7363 23
1021 경제내집 마련을 위하는 초년생들을 위한 짧은 팁들 24 Leeka 20/10/21 7360 19
785 의료/건강AI와 영상의학의 미래는? 33 Zel 19/03/27 7358 28
404 의료/건강성중독에 관하여 몇마디 하고 싶어 적습니다. 12 민지 17/04/04 7358 19
66 체육/스포츠[스탯] 세이브 조작단을 검거해보자 - WPA 8 kpark 15/08/31 7357 3
696 역사고대 전투와 전쟁 이야기 (2) 3 기쁨평안 18/09/13 7352 9
980 일상/생각40대 부부의 9급 공무원 도전기 36 4월이야기 20/07/08 7351 51
345 일상/생각타임라인과 속마음 나누기 36 Toby 17/01/13 7349 34
674 과학지구 온난화와 원전. 56 키시야스 18/08/01 7342 17
48 요리/음식콩국수, 서민음식과 양반음식의 하이브리드 33 마르코폴로 15/07/21 7342 0
810 의료/건강저희는 언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요.. 20 Zel 19/05/30 7341 73
120 정치/사회들여다보자 - ISIS (2) 11 눈부심 15/11/27 7340 4
156 과학알파고vs이세돌 대국을 기대하며.... 34 커피최고 16/02/16 7331 4
393 문학채식주의자 - 90년대 이후 국내 여성 문학 속 일련의 작품군에 대한 단상 48 팟저 17/03/21 7330 14
516 일상/생각애 키우다 운 썰 풉니다.txt 21 Homo_Skeptic 17/09/23 7326 20
713 일상/생각햄 버터 샌드위치 30 풀잎 18/10/13 7293 24
765 일상/생각돈이 없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 10 The xian 19/01/31 7291 24
1087 일상/생각어느 개발자의 현타 26 거소 21/05/04 7287 35
225 요리/음식아빠요리 만들기 - 스테이크를 맛있게 굽기 위해 필요한 도구 24 졸려졸려 16/06/29 7285 5
395 정치/사회화장실을 엿본 그는 왜 무죄판결을 받았나 13 烏鳳 17/03/24 7277 29
743 정치/사회한 전직 논술강사의 숙대 총학의 선언문 감상 40 烏鳳 18/12/11 7274 35
605 철학/종교감동(感動) 23 기아트윈스 18/03/22 7273 31
921 의료/건강'코로나19'라는 이름이 구린 이유 29 Zel 20/02/14 7272 14
494 문학제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려 합니다. 33 그리부예 17/08/16 7266 12
336 정치/사회대리모 문제 37 烏鳳 17/01/03 7254 12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