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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9/24 12:13:32
Name   1일3똥
Subject   goodbye. printmaking
며칠전 옆동네에 올렸던 글인데 이곳저곳에 남겨놓고싶어 홍차넷에도 올립니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판화, 아마도 다시 손에 대지 않을 작업, 그리고 이제는 지난 시간이 되어버린 인연을 정리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제 작업 & 학교 지인들의 작업이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그림일꺼라 생각됩니다. 판화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댓글 적아주세요. 성의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참 길었다.
남들은 4년, 군대포함 6년이면 졸업하는 학교를 8년이나 다녔으니 대학이라는 곳에 내 20대를 다 바쳤다.
처음 실기시험 치던 날 '설마 이게 대학교인가?' 싶던 건물들과 작은 캠퍼스에 실망하고 괜한 홍대병에 걸려 이곳저곳 방황했지만 결국은 어찌어찌 졸업은 했다. 천성이 오지라퍼인지라 졸업 후에도 일주일에 두세번씩 학교에 찾아가 작업중인 후배들과 얘기하고 밥먹고(사주고) 술마시고(사주고) 했으니 20대를 꼬박 학교에 다닌 셈이다.

(이 그림은 여자친구를 그린 것이 아닙니다.)

1학년 2학기로 복학한 2009년. 학교 시스템상 1학년 2학기에 배울 수 있는 판화는 실크스크린 뿐이었다. (1학기엔 목판화)
판화라는 작업은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필요로 해서 여러 사람이 같이 할 수록 수월하다.
당시 나는 복학하자마자 한눈에 반한 복학동기(2년 후배지만)와 만나는 사이었다. 남들이 혼자서 낑낑댈 때 우리는 서로 애정해가며 즐겁게 작업했다. 남들 야작 안할때만 골라서 야작을 할 때 둘만 있는 실기실이란........

실크스크린은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판화 기법이다. 옷이나 수건 등에 들어가는 나염도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한 것이고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와 캠벨스프도 실크스크린 작업이다.
딸기케이크가 맛있는 홍대 피오니에 가면 볼 수 있는 꽃 그림도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한 작업이다.

(교수님. 동생이 하는 케익가게 얘기좀 그만하세요. 맛있고 잘나가는건 인정하는데 한번도 사주신 적 없으면서.. 흥칫뿡)


혼돈과 공포의 2학년.
2학년이 되면 판화의 대표적인 4가지 기법을 모두 배우게 된다. 4가지라고 하면 동판화, 석판화, 목판화, 실크스크린을 말한다.
1학년 때 배운 목판화와 실크스크린과 달리 석판화와 동판화라는 기법은 어마어마한 돈을 필요로 했다.
2학년 3,4월에 재료비로만 들어간 돈이 최소 100만원. 판값과 도구, 판화지의 값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해에 복학한 작업에 미친 녀석 두명이 불타는 의욕 (나도 작년에 다 겪었거든?)으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작업을 하는 바람에 다른 친구들이 괴로워졌다. 그놈들이 작업하는 양에 맞추지 않으면 학점은 저 멀리 날아가 버릴테니까.

석판화는 내 체질에 맞지 않았다.
피오니 사장을 동생으로 둔 석판화 담당 교수님의 수업이 별로였던것도 있고 워낙 복잡한 과정탓에 제대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한 탓도 있다.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한번만 실수를 해도 작업이 날아가기 때문에 내가 작업을 만드는것이 아니라 작업이 나를 만드는 것 처럼 느껴졌다.

(해먹이라는 재료 연구용으로 그린 그림. 좌상단의 나이테같은 효과가 맘에 들어서 석판을 할 때는 해먹만 이용했다. 크레용으로 그릴 때 보다 과정이 훨씬 복잡해 진다는게 문제.)

우리 학교는 매년 4월쯤 사생여행이라는 과 MT를 가는데 사생여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곳에서 그림을 한점 그려야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오일파스텔, 펜, 연필 같은 휴대하기 편하고 외부에서 작업하기 편한 건식재료들을 가져갔는데 난 무슨 패기에서인지 그 무거운 동판을 들고 사생여행을 갔다. 그 자리에서 다 완성하지 못해서 학교에 돌아와 이틀밤을 새서 완성했던 기억이 난다.

(작업할 때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상도받고 맛있는 것도 사먹었으니 이득??)

위에서 사용한 기법은 동판화 중에서도 Drypoint라는 기법인데 순수하게 동판을 긁어내는 기법이다. 동판을 부식시키거나 다른 약품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 동판을 긁어 낼 때 생기는 Burr가 잉킹을 할 때 잉크를 머금고 있어서 수묵화같이 번진듯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드라이포인트 작업과정)

(드라이포인트의 대가 강승희 작가의 작품. 교수님 사랑합니다:D)

동판화 기법에는 직접판법인 Drypoint, Mezzotint, Engraving. 간접판법인 Etching, Aquatint 등이 있다.
인그레이빙이란 기법은 학부과정에서 배우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지폐 안에 있는 그림을 그릴 때 사용된 기법이 인그레이빙이라고 알고 있다.
아쿠아틴트 (혹은 애쿼틴트)는 고운 송진 입자를 동판 위에 받고 가열시켜 요철을 만들고 산에 부식시켜 넓은 면에 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법이다. 송진이 달라붙은 부분은 부식되지 않고 나머지 부분만 산에 부식되기 때문에 부식한 판을 루페로 확대해서 보면 불규칙적인 작은 점들이 무수히 만들어 진다. 동판화는 오목판법이기 때문에 파인 부분에 잉크가 묻어 찍혀나온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요철은 부식된 정도에 따라 다양한 톤을 만들어 낸다.
재밌는 기법이고 가장 많은 학생들이 선호하는 동판화 기법이지만 나는 가루 알러지가 있어서 한번밖에 해보지 않았다. 아쿠아실에만 들어가면 하루종일 재채기가 나는걸.. 작업 때마다 방진마스크를 쓰느니 다른 기법을 하겠어요.

(이것도 강승희 작가의 아쿠아틴트 작품. 교수님 한번 더 사랑합니다:-D)

동판화를 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재료가 하드그라운드다. 이놈은 밀납, 송진, 아스팔트를 함께 팔팔 끓여 녹여서 만드는데 이걸 학교에서 직접 만든다. 그라운드를 만드는 냄새는 매우 고약하고 이걸 만드는 날은 모든 학생들이 델몬트 유리병에 이름을 붙여서 옥상으로 모인다. 어느정도 식히고 나서 유리병에 담고 벤졸을 섞어 조금 묽게 만들어 주면 된다. (식지 않은 상태에서 벤졸을 부으면 네이팜폭탄처럼 퍼버벙)
그라운드를 동판 위에 바르면 그 부분은 산에 넣어도 부식되지 않는다. 판 전체에 그라운드를 바르고 적당한 도구로 긁은 후 부식시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법이 에칭이다. 질산에 부식시키면 약간 부드럽게, 염화제2철에 부식시키면 각지게 부식이 된다. 부식할 때에는 방독면 필수.


(라인에칭 작업을 하고 있는 못난 손. 내 작업을 보고 다들 변태라고 했다. 60*90cm판에 저 크기의 선들을 꽉 채웠으니..)

메조틴트는 직접판법중에 하나로 아쿠아틴트처럼 송진과 산으로 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로커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판에 수많은 점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깎아서 톤을 만드는 기법이다. 실사와 같은 섬세한 작업까지도 가능한 작업이지만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실제로 메조틴트를 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사실 판화 작가가 거의 없다.)
전에 만난 그녀가 했던 기법이기도 하고 이 기법으로 내 얼굴이 들어간 작업을 해서 상을 받기도 했었...다.

http://todayhumor.com/?humorbest_636321
(다른 곳에 올렸던 메조틴트 관련 글)

(메조틴트 작업과정. 양재열 yangyeol 작. )
(메조틴트 작품. 양재열 yangyeol 작.)
(메조틴트 작품. 양재열 yangyeol 작. 극도로 사실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 메조틴트의 특징이다.)


덧붙일 말이 마땅치 않아 올리지 못한 그림들.

(다색목판화의 대가 김준권 선생님의 작품. 작업실 찾아뵙겠다고만 하고 못갔네요. 죄송합니다.)

(목판화가 정원철 교수의 작업. 핸드피스를 이용한 정교한 작업이 특징. 다른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교수님이지만 나와의 궁합은 영.. 단 한번 A+을 준 이후로 B+이상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흥칫뿡.)

(소멸법을 이용한 목판화 작업. 소멸법이란 판을 한개만 사용해서 여러번 찍어내는 기법이다. 원본 사진과 비교를 위해 좌우반전이 되어있다.)

(소멸법 작업 과정. 손아파 죽는줄.. 8도쯤 찍은 것 같다.)

(졸업동기 작업 중 가장 좋아했던 작업. 목판화-소멸법 작업.)


(메조틴트도 잘하지만 다른 작업도 정말 잘하는 선배 양재열 yangyeol 작업. 실크스크린)


글쓰기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공식적으로는 1년전에, 비공식적으로는 지난주에 끝난 연애를 마무리하기 위한 글을 써야겠다고 맘먹었었는데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하다보니 그냥 판화 소개 글이 되어버렸다. 
5년동안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자존감 제로인 나의 유일한 동력이 되어 주었던 그녀가 떠난 1년동안 죽음만을 생각하며 산송장처럼 지냈는데, 그녀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아이러니 하게도 조금씩 마음이 편해져 이런 글까지 쓰게 되었다.
정말 좋아했던 판화를 (아마도) 더이상 손에 대지 않게 될테고, 정말 사랑했던 너를 두번 다시 만나게 될 일도 없겠지.
잘 지내자. 너도 나도.
안녕. 이제는 추억이 되버린 우리의 시간들.
안녕. 이제는 잊혀져 갈 printm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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