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9/03/12 17:58:20수정됨
Name   임아란
Subject   '그럼에도'와 '불구하고'의 사이
아내와 이야기하다 울었다. 내 스트레스의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머니 때문에.

모든 가족은 꼼짝없이 내 말을 들어야 했고 여자를 당연히 아래로 바라보았던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왔으며, 집안 어른들의 결정으로 마음 하나, 행동 하나 전혀 닮지 않은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그 스트레스와 분노를 술과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풀어내셨다.

길고 긴 별거 생활. 몇번의 가출. 몇번의 합류 끝에 남은 건 이혼과 당뇨 뿐. 재혼도 하셨지만 거기도 상황이 녹록치 않은 상태라 어머니는 가끔 내게 손을 벌리셨다.

아들, 반찬 값 좀.
아들, 쌀이 없네.
아들, 혹시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다음에 갚을게
아들, 항상 미안해
우리 아들밖에 없다 사랑해

내 몸에 걸친 게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 아님 가느다른 그리움의 정인지도 모른 체 나는 한숨을 쉬다가도 응했다. 돈도, 필요한 물건도, 술 한 잔 나눌 사람이 없으면 그 역할도. 지면을 기어가는 넋두리와 읊조림 끝에 어머니는 몇 번이고 내게 말씀하셨다. 미안하다고.

매번 괜찮다고 했지만 나도 사람. 아무것도 없는 그냥 사람. 결국 터졌다.


어머니 지금 이게 몇 번째인지 아세요? 그렇게 당해놓고 또 속았어요? 제발... 제발 부탁인데 그러지 마세요. 이제 어머니의 절대라는 말은 믿지 않아요. 지금 머릿 속에서 몇천 번이나 단어가 오고 가고 있어요. 심한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참아야 하나. 또 아니면 이 전화를 끊어야 하나. 내가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나? 그래봐야 나는 이 관계를 절대 끊지 못할텐데. 어렸을 때부터 정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자라나 고작 듣는 말이 미안해라니. 그런 말 듣는 전 기분 좋아요? 기분이 좋냐고요!

아들... 할 말이 없다 미안해.

......오늘은 그냥 잡시다. 돈은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제가 이런 말 했다고 또 울면서 술 마시지 말고요.


전화기를 내려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방의 전등이 둘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수많은 감정이 날아든다.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밉다. 어머니가 보고 싶지만 증오스럽다. 어머니의 안위가 걱정되면서도 오히려 소식 주고 받는 것없이 지낸 나날의 안정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우주만큼 크고 하나의 돌멩이만큼 작다. 그 돌은 깨지고 깨져 내 몸 속을 돌아다니며 통증을 유발한다. 미치도록 아픈데도 나중에는 그 아픔마저 그리워할 것이란 걸, 나는 지독하게 안다.


아내는 말했다. 그 사람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자기자신을 용서하라고. 그 말만을 되새기고 허공에 그리다 잠자리에 누웠다.

에밀 시오랑의 문구 하나가 어둠을 뚫고와 내 앞에서 팔랑거린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무한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이 두 단어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까. 아, 이 글을 쓰는데 심장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아프다. 나는 어떻게 해야.

* 토비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3-27 17:29)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64
  • 힘 냅시다
  • 힘내세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글
  • 마음이 너무 아려오네요.. 힘내세요!
  • 아프고 따뜻한 글이에요. 사람이 산다는 건 대체 뭘까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71 역사 영화 "덩케르크" 의 배경이 되는 1940년 독일-프랑스전투 2 모모스 17/07/14 8062 8
714 음악 쉬어가는 페이지 - 음악으로 이어 보는 근대 유럽사의 한 장면 호타루 18/10/10 6793 5
1367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2055 11
716 역사 고대 전투와 전쟁 이야기 - (4) 무기에 대하여 1 16 기쁨평안 18/10/15 6178 4
874 일상/생각 사람이 죽음을 택하는 진짜 이유 / 미뤄주세요 8 Jace.WoM 19/10/14 6143 25
1099 기타 찢어진 다섯살 유치원생의 편지 유게글을 보고 든 생각입니다. 41 Peekaboo 21/06/22 5957 44
158 과학. 26 리틀미 16/02/18 7890 16
190 의료/건강. 47 리틀미 16/04/23 7915 4
206 정치/사회. 58 리틀미 16/05/20 8908 16
227 일상/생각. 12 리틀미 16/07/03 5257 8
321 일상/생각. 17 우웩 16/12/12 5646 33
326 일상/생각. 14 우웩 16/12/19 5751 21
826 일상/생각. 4 BLACK 19/07/02 5415 17
478 일상/생각... 37 켈로그김 17/07/21 7608 21
780 일상/생각'그럼에도'와 '불구하고'의 사이 8 임아란 19/03/12 6157 64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041 13
597 경제'식근론'에 대한 단상, 한국은 독립국이 맞는가? 25 hojai 18/02/23 8810 6
558 IT/컴퓨터'옵션 열기'의 정체 16 Toby 17/12/07 11752 37
863 정치/사회'우리 학교는 진짜 크다': 인도의 한 학교와 교과서 속 학교의 괴리 2 호라타래 19/09/23 5905 11
1304 문화/예술'이철수를 석방하라' 1 열한시육분 23/05/29 2882 13
463 일상/생각'인생을 게임하듯이 사는 법' 그리고 어른 6 삼성갤육 17/07/02 5994 11
433 정치/사회'조중동'이나 '한경오'나 라고 생각하게 하는 이유 38 Beer Inside 17/05/15 8186 16
921 의료/건강'코로나19'라는 이름이 구린 이유 29 Zel 20/02/14 7461 14
428 일상/생각'편 가르기'와 '편 들기' 17 소라게 17/05/12 6535 25
349 게임'헌티드 맨션' 후기 18 별비 17/01/21 8678 32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