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2/03 17:02:19수정됨
Name   행복한사람
Subject   처음 느낀 늙음
늙음에 대한 첫 번째 인상을 받은 것은 2009년의 어느 날 남영역 화장실에서였다.

나는 버스로 갈아 타기 위해 남영역 지하철에서 내렸다.

1교시 수업에 이미 늦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지만 그 순간 똥이 마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욕구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하게 나를 몰아붙이던 복통 때문에 바로 버스를 타기에는 무리일

것으로 판단, 남영역 플랫폼 내에 있는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영역 화장실에는 대변기가 한 개뿐이어서 들어서는 순간 내 명운이 결정될 터였다.

비틀비틀 화장실 입구로 향하자 반쯤 열어져 있는 대변기 문과 한 남자가 보였다.

그렇구나. 일을 끝내고 나오는구나 싶어 쾌재를 부르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똥은 고개를 내밀고 나오기 직전이었지만 그에게 나갈 공간을 내어주며 어서 나오기만을

바랬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변기와 문 사이에 서 있은 채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일 다 보셨어요?"

"그렇긴 한데 음..."

왠지 모르게 난처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그의 뒤편으로 변기를 쳐다보니

변기 이곳저곳에 똥이 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그에게로 향하자 이번에는 오줌으로

젖어버린 바지와 똥이 묻은 바지의 앞뒷면이 보이는 것이었다.

"아저씨, 역무원 아저씨 불러드릴까요?"

"미안하게 됐어요 젊은이"

다시 시선을 옮겨 그의 얼굴을 보자 백발에 주름이 자글하게 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사정 때문에 이런 봉변을 당하고, 도움도 청하지 못한 채 이곳에 서 있어야 했을까.

미안하게 되었다는 말을 마친 뒤로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바지만을 반복해서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당황했고 그의 얼굴에는 수치심이 일었다.

이상하게도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은 복통이 사라졌고 나는 역무원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할아버지를 인계해드린 후 버스를 타러 역을 나섰다.

이때의 기억은 더러움이나 그가 드러냈던 수치심보다는 늙음 그 자체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는 게 어떤 것일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나이지만

이상하게도 내게 늙음은 남영역 화장실 그 할아버지의 표정으로 떠오른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2-17 21:44)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2
  • 꼭 제가 경험한것 같네요..
  • 모두가 결국은 그런 날이 오는 것 같습니다
  • 춪천
  • 여러 생각을 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게시판에 등록된 행복한사람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87 기타당연한 육아는 없답니다 16 밀크티티 16/10/20 6506 22
320 일상/생각면접으로 학부신입생 뽑은 이야기 47 기아트윈스 16/12/10 7576 22
325 일상/생각지가 잘못해 놓고 왜 나한테 화를 내? 42 tannenbaum 16/12/18 6741 22
372 의료/건강우울은 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38 깊은잠 17/02/22 8499 22
421 정치/사회무지개 깃발. 61 tannenbaum 17/04/28 6920 22
530 음악노래에는 삶의 냄새가 너무 쉽게 깃들어. 12 틸트 17/10/17 7081 22
548 문화/예술남자. 꿈. 노오력. 10 알료사 17/11/18 8420 22
554 일상/생각삶의 무게... 12 사나남편 17/11/29 5300 22
564 일상/생각이상하게도 슬리퍼를 살 수가 없다 21 소라게 17/12/21 7239 22
650 문학오늘 너무 슬픔 4 아침 18/06/21 6446 22
754 일상/생각짧은 세상 구경 8 烏鳳 18/12/30 5361 22
813 일상/생각결혼식의 추억 20 메존일각 19/06/02 5473 22
888 일상/생각4C - 글을 쓸 때 이것만은 기억해 두자 21 호타루 19/11/15 6947 22
918 일상/생각처음 느낀 늙음 3 행복한사람 20/02/03 4917 22
942 정치/사회[데이빋 런시만] 코로나바이러스는 권력의 본성을 드러냈다. 10 기아트윈스 20/04/02 5960 22
997 요리/음식대단할거 없는 이탤리안 흉내내기. 15 legrand 20/08/16 5007 22
1031 체육/스포츠손기정평화마라톤 첫풀코스 도전기 12 오디너리안 20/11/17 3889 22
1038 역사두 번째 기회를 주는 방탄복 6 트린 20/12/11 4640 22
1064 문학지난 두달동안 읽은 책들 간단리뷰 5 샨르우르파 21/02/28 5117 22
1081 의료/건강COVID-19 백신 접종 19 세상의빛 21/04/17 4913 22
1150 일상/생각벨기에 맥주 오프모임에 참석하지 못해서 하는 벨기에 맥주 셀프시음회(어?) 10 세리엔즈 21/12/08 3918 22
1167 일상/생각내 고향 서울엔 11 사이시옷 22/02/14 3800 22
1180 일상/생각일상의 사소한 즐거움 : 어느 향료 연구원의 이야기 (3편) 12 化神 22/03/25 4189 22
1183 일상/생각농촌생활) 3월 중순 - 4월 초 18 천하대장군 22/04/08 3392 22
1239 정치/사회한국 수도권-지방격차의 의외의 면모들 45 카르스 22/09/20 5826 22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