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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18 22:33:53수정됨 |
Name | 심해냉장고 |
Subject | 그러니까, 원래는 |
'나중에 여기에 가보고 싶다. 집 앞의 술집. 궁금하다.' 겐지가 보낸 사진에는 요즘 다시 자주 보이는 매우 올드한 서체로 커다랗게 '바다'라고 써 있었고, 아래로는 같은 서체로 맥주/양주라고 써 있었다. 음, 그러니까, 원래 저렇게 간판에 맥주/양주라고 써 놓는 가게는 말이야, 맥주와 양주를 파는 옛날식 한국 캬바쿠라였어. 물론 요즘 한국에는 레트로한 감성이 유행이라서 그냥 옛날식 간판을 농담처럼 걸어 둔 평범한 술집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는 문자를 보내고, 잠시 고민하다 같은 내용을 일본어로 한 번, 영어로 한 번 보냈다. 오해가 발생하면 조금 곤란할 테니. '아. 그래?' 아현에 산다고 했었나. 오랜 동네라 판단이 성가시군. 망원동이나 연남동, 이태원같은 젊은 동네의 구석에 있는 맥주/양주집 '바다'라면 역시 뉴트로인지 뭔지 하는 것의 세례를 받은 평범한 술집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상도동이나 대림동 같은 늙은 동내의 구석에 있는 맥주/양주집 '바다'라면 일백 퍼센트 그렇고 그런 가게일 것이다. 문제는 역시 아현이니 영등포니 을지로니 하는 오래된 동네들이다. 반반, 아니 사진의 상태를 보건데 아무래도 올드스쿨 맥양집의 기운이 좀 더 높지만 여전히 뉴트로 힙스터 가게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냥 원래부터 있던 가게인데. 무엇일까?' '원래부터 있던 거라면 캬바쿠라일 확률이 높아보인다.' 라고 반사적으로 대답한 후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생각해보니까 너 이새끼 한국 온지 이제 1년이라면서. 내가 말한 '그러니까, 원래는'은 1년 전 같은 게 아니야. 이삼십년 전, 아니 적어도 10년 전의 이야기라고. 1년 전부터 원래 있던 가게라는 건 이 상황에서 아무런 정보값도 주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 사무실에서 작업한 뉴트로 간판일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뉴트로. 그냥 봐도 화나는 것들이란 대체로 업무적으로 마주치면 좀 더 큰 화를 나게 한다. 내가 사장이라면 좀 다른 느낌일지도 모르겠지만. 인더스트리얼이 유행하던 시절이 좋았다. 그때는 대충 빈 공간에 대해서 그럴싸한 말로 영업하면 되었는데, 대충 빈 공간에 온갖 조잡한 조명과 장식을 쑤셔넣어야 하는 건 정말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쪽이 시공단가가 더 잘 나오니 좋은 일 아니겠냐.' 라는 사장의 말에 똥씹은 표정을 하고 있자니, 사장은 '그래서 너같은 새끼 월급도 나오는 거고 임마'라고 공격해왔다. '그래서, 언제쯤 도착해?' '거의 다 왔어. 이제 홍대역 도착.' - 지난번에 매노워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그는 이번에 마그마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양쪽 다 한번쯤 이름은 들어본 밴드이지만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는 밴드다. 그러니까, 제3세계의 단편영화 감독 이름 같은 것이다. 세상에는 어디에나 그런 놈들이 있다. 그런 놈들은 이억만리 타국에 가서 이상한 술집들에 관심을 가지고 돌아다니다니다가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서 이상한 걸 먹게 된다. 매운거 먹어보고 싶다며. 매운거 잘 먹어? 엄청 잘 먹어. 붉닭이나 낚지볶음 먹어봤어? 아니. 불닭도 안 먹어본 주제에 매운 걸 잘 먹는다는 자신감이라니. 불닭 먹을래, 라는 나의 제안에 겐지는 아주 좋다고 말했다.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알게뭐야. 불닭. 불닭이라. 나는 원래 매운 걸 별로 좋아하는 사람도 잘 먹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언젠가부터는 그런 걸 가끔 먹는 사람이 되었다. 정확히 언제였더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세 번째 연애가 끝났을 때부터였나. 슬픈 일은, 내가 불닭 같은 걸 매운 걸 잘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친구들은 그런 걸 먹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건강이라던가 취향이라던가 뭐 여러가지 문제로. 그리고 조금 후에는 평일 저녁에 만나 술을 마실 친구도 대체로 사라지고 말았다. 인생 뭐 별거 있는가. 그렇게 우리는 연인세트를 시켰다. 사내 둘이 연인세트를 먹는 장면이란 연인세트의 존재만큼이나 20세기적이다. 아마 저 연인세트는 이 가게가 시작되었을 20세기 말의 어느 날 이래로 이름도 구성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연인세트 뿐 아니라 메뉴판 전체가, 가게 전체가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겐지는 불닭을 매우, 잘, 먹었다. 뭐야. 원래 일본인들은 매운 거 잘 못 먹지 않나. 못먹으라고 데려온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잘 먹을 필요는 없잖아. '맛있게 매운데.' '어. 그래. 잘 먹네. 다음에는 낙지나 먹으러 가자.' 나는 그냥 매웠다. 맛이 없는 건 아닌데, 역시 매웠다. 요며칠 무리한 탓에-인테리어란 경기가 안 좋을 때도 어떻게든 돈을 버는 일이다. 누군가는 망한 업장과 사무실의 시체를 치워야 하는 법이다-잇몸도 혀도 멀쩡하지 않아서인가. 하지만 또 생각해보니 잇몸이나 혀가 풀 컨디션으로 멀쩡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확실히 근래에는 좀 나쁜 상태다. 그렇게 내가 연인세트에 딸려나온 누룽지탕의 70%를 먹는 동안 그는 불닭의 70%를 먹어치웠다. 치즈는 괜히 추가한 걸까. 그는 치즈가 묻지 않은 생 불닭쪽을 선호하는 느낌이었고 나는 애초에 치즈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일본인들 원래 매운 거 잘 못 먹지, 하는 나의 작은 배려는 그렇게 철판에 눌러붙은 채 버려졌고 우리는 그렇게 가게를 나왔다. 그래서, 오늘도 뮤직바? 뮤직바! 뮤직바라. 지난주에 실로 오랜만에 충동적으로 동네 뮤직바에 간 걸 제외하면, 마지막으로 뮤직바에 가본 게 언제였지. 기억 속 괜찮은 뮤직바들은 찾아갈 때마다 없어지거나 바뀌거나 했다 뭐랄까 옛 친구나 연인들처럼. 아마 오늘도 그렇겠지. 나는 몇 번의 헛걸음을 하게 될까. 물론 이 녀석, 겐지를 만난 것도 어느 뮤직바에서였다. 집 근처, 생긴 지 1년도 안 된,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생긴지 10년은 된 것 같은 그런 작은 뮤직바에서. 원래대로라면 데이트를 했어야 하는 날이었는데, 세상에 원래라는 말은 '인생이란 원래 외로운 거다'의 용례 말고는 대체로 다 틀린 용례다. 다행히 첫번째 걸음은 성공적이었다. 기억 속의 위치 그대로 기억 속의 상태로 영업하고 있었다. 여전히 간판도 없고, 여전히 입구가 어딘지 쉽게 찾을 수 없는 그곳. 포스터가 몇 개쯤 늘어난 것 같지만 포스터란 원래 새끼를 치곤 하는 것 아닌가. 입구를 열기 전까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따라오던 겐지는 입구를 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그래, 이런게 진짜 뮤직바지. 간판 있으면 뮤직바가 아냐. 간판이 원래부터 없었거나, 조명이 다 나가버리거나, 떼어버려야 뮤직바라고 할 수 있는 거라고. 나는 의미없는 농담을 지껄였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이제 갓 1년 된, 간판은 제대로 달려 있는 곳이었으니까.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든다. 이 골목이 원래 한국 인디음악의 성지 중 하나였는데. 생각해보니 여기서 1분 거리에도 라이브하우스가 있었구나. 5분 거리에 뮤직바가 한 20개는 있었을 껄. 한 20년 전까지만 해도 대충 그런 분위기였는데. 음악이란 세계의 언어죠, 라는 말 따위는 전혀 믿지 않는 편이었지만, 음악 매니아인 외국인이란 편한 존재다. 해가 될 이야기도, 지칠 것도 없다. 하루치 술자리를 위해 그만한 것도 없다. 뭐, 내가 공연 기획에 기웃거리던 인테리어 업자이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지만. 이를테면 내가 산업부 기자였더라면 음악에 대해 할 말이 좀 덜 있었겠지. 그는 열심히 듣고, 자기가 했던 밴드에 대해 이야기하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튼 그렇다면 유쾌한 일이다. 대충 술을 마시고 나와 다음 가게로 걷는다. 여름 밤 공기가 선선하다. 한국은 날씨가 좋아서 좋아. 일본의 여름은 최악인데. 습하고 더워. 한국은 봄 날씨도 좋고. '네가 본 단 한번의 한국의 봄은 내 인생에서 제일 좋은 봄이었어. 원래 한국의 봄이라는 건 말이야, 황사로 가득해서 숨도 쉴 수 없는 계절이라고'라 답해주었다. 역병의 몇 안되는 순기능이었나. 중국이고 한국이고 공장을 멈추고, 하늘이 깨끗했더랬지. 그런 봄이 대체 얼마만이더라. 아쉽게도 두 번째로 가려 했던 가게는 해물포차가 되어 있었다. 세 번째 가게는 건물이 사라졌다. 그래도 여름 밤의 공기란 좋네, 우리는 그렇게 캔맥주를 마시며 산책을 했다. 여기에는 원래 라이브 하우스가 있었지. 한 5년 전에 없어졌던가. 저쪽 골목에 꽤 크고 좋은 뮤직바가 있었어. 공항철도 역 근처라 외국인들도 자주 오고 했었는데 그런 수다를 떨면서. 맥주를 다 마시고 우리는 헤어졌다. 다음에는 낙지를 먹자. 뭐, 너네 집 앞에 가게가 뭐하는 데인지 슬쩍 보는 것도 재밌을 거고. 그래, 하고 그는 그의 집으로 나는 나의 집으로 돌아갔다. <div class="adminMsg">*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6-28 14:22)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div>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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