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7/17 22:44:17
Name   necessary evil
Subject   자기 객관화라는 덫
상담사씨는 말합니다. "당신은 늘 뇌와 마음을 완전히 분리시킨 사람처럼 말해요. 하지만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모를리가 없죠. 그렇게 되고자 했으니까. 실은 소시오패스같다는 업계포상을 듣기 위해 정진 중인데, 요즘 보면 저 정도로는 택도 없어보이긴 합니다.

상담사씨는 종종 최근에 행복했던 적이 언제인지, 혹은 기쁘거나 슬펐던 적이 언제였는지 묻습니다. 그때마다 5분쯤 고민하고, 겨우 쥐어짜내게 되는 것은 최소 5년은 된 일들입니다. 감정의 고저차가 별로 없는 현재 모습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은 항상 곤란합니다.

다만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일이 없도록 삶을 조정한 것 때문일까, 기억력이 매우 흐트려졌습니다. 지난 달도 겨울에도 작년 이맘 때도 3년 전에도 똑같은 나날이었으니, 다시 말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딱히 남겨둘 일이 없다보니까요. 옛날엔 분명 넌 쪼잔하게 뭘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다니냐, 같은 말도 듣던 때도 있었는데 말이죠. 상담사씨는, 감정을 억압하게 되면 기억력이 흐려진다고 에둘러 말했습니다. 사실 요즘엔 왜 상담을 받기로 했었나도 가물가물해 대화가 지지부진하기도 하네요. 그래서 이달 말을 끝으로 종료할 예정입니다.

자기 통제와 자기 객관화. 지난 세월을 관통해온 제 인생의 신조죠. 마음을 풀어버리거나 실수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순간마다 내쳐지거나 외면당한 기억은(물론 지금은 '그랬다'는 느낌만 있을 뿐이지만) 확신을 올곧게 했고, 그렇게 재미와는 담쌓은 인간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학창시절 친구가 연락해오기도 하지만 핑계를 대며 피하는 이유는 그때문입니다. 상담사씨는 저에게 'ㅇㅇ씨는 ㅇㅇ씨 같은 사람이 친구라면 어떨거 같냐'라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저는 '친구는 물론 애인이나 가족으로도 극혐이다'라고 단칼에 손을 내저었지요. 자기 혐오같은 것은 아니옵고 세상에 나같은 인간은 나 하나면 족하다는 비틀린 심리의 일환이죠.

부화뇌동을 배격하고 사리분별과 자기 객관화에 몰두하며 수양한 결과 저는 꽤 현명한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뭐 피식해도 좋습니다. 동서고금의 현인들은 분명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그렇게 했더니 이 모양이더라, 가 하고자 하는 말이니까요. 그들이 거짓을 가르쳤다기보단 소인의 그릇으로 감히 현인 흉내를 내고자한 말로라 생각 중입니다. 단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나 똑똑한 사람과 달리 현명한 사람은 야스를 못하도록 되어있으니까요. 동서고금으로 증명된 하늘의 섭리죠. 군인이 외계인 다음 3순위 신랑감이라는 블랙유머식으로 말하면 '현명하기만 한 사람'은 '나쁘기만 한 사람'보다 매력도가 낮은 셈이죠. 뉴스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잖아요. 소인의 그릇으로 난 사람은 소인답게 사는 것이 도를 따르는 길임을 이제야 알게 된 거죠. 나는 그녀를 덜 좋아한 것도 예의를 차린 것도 아니라 밀어붙여보지도 못한 쪼다라는 자각 또한. 분별력 좀 떨어져도 되고, 내로남불 좀 해도 됐던 겁니다. 나는 군자가 될 수도 없고 실은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슬퍼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눈물을 흘려본 적은 있습니다. 제게 있어 그래비티와 매드맥스는 그 어떤 새드 스토리보다도 가슴을 사무치게 만드는 영화죠. 두 영화는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맥스는 특히 꼬집어서 말하죠. 170일을 그렇게 달려도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고. 그래비티도 그렇고, 밑져야 본전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죠.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그것이 결국 영화라는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것이 없고, 그래서 그래비티도 매드맥스도 실은 감동적인 판타지로서 아끼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대사는 좀 전에 있죠. '희망을 품는 건 실수야. 망가진 삶을 돌이킬 수 없다면 미쳐버리고 말거야.'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7-28 21:3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7
    이 게시판에 등록된 necessary evil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81 일상/생각직장내 차별, 저출산에 대한 고민 26 풀잎 23/03/05 3745 17
    1268 일상/생각니트라이프 - 1. 새로운 땅에 한 발을 내딛다. 4 BitSae 23/01/22 2212 17
    1142 경제최순실로 인해 불거진 ODA 문제는 해결되었는가 6 정중아 21/11/08 4533 17
    1123 기타남자바지3종(청바지,검은바지,베이지면바지) 입는방법에 대한 연구 22 흑마법사 21/08/31 13609 17
    1090 체육/스포츠축구로 숫자놀음을 할 수 있을까? 첫번째 생각, 야구의 통계. 11 joel 21/05/15 4476 17
    1103 체육/스포츠축구) 무엇이 위대한 선수를 위대하게 하나. 23 joel 21/07/10 4629 17
    1070 일상/생각대학원생으로서의 나, 현대의 사제로서의 나 5 샨르우르파 21/03/15 4463 17
    1069 정치/사회미래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에 대한 4개의 가설 27 이그나티우스 21/03/14 4960 17
    1049 요리/음식평생 가본 고오급 맛집들 20 그저그런 21/01/03 5569 17
    1016 창작사귀지도 않고 헤어진 제 친구의 연애 아닌 연애 이야기 33 아침커피 20/10/12 6697 17
    1015 일상/생각그렇게 똑같은 말 1 머랭 20/10/06 4363 17
    1009 문화/예술초가집과 모찌떡과 랩실 7 아침커피 20/09/24 4339 17
    994 철학/종교최소한 시신은 없었다 6 아침커피 20/08/10 5192 17
    985 일상/생각자기 객관화라는 덫 9 necessary evil 20/07/17 5040 17
    955 일상/생각할아버지 이야기 10 私律 20/05/03 4276 17
    922 일상/생각군대 친구 이야기 3 化神 20/02/15 4975 17
    904 일상/생각올해 읽은책 간단정리 15 오디너리안 19/12/27 5259 17
    886 꿀팁/강좌이론과 실제 : 귀납적 구치소법학의 위험성 4 사슴도치 19/11/10 5148 17
    872 역사국내 최초의 이민자, '하와이 한인'들에 대해 -하- 10 메존일각 19/10/03 6003 17
    948 일상/생각아싸, 찐따, 혹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11 이그나티우스 20/04/17 5974 17
    826 일상/생각. 4 BLACK 19/07/02 5275 17
    759 IT/컴퓨터컴퓨터는 메일을 어떻게 주고 받을까? 13 ikuk 19/01/18 7478 17
    674 과학지구 온난화와 원전. 56 키시야스 18/08/01 7344 17
    670 여행(스압, 데이터 주의) 오키나와 여행기 ~첫째 날~ 9 소라게 18/07/27 6272 17
    643 체육/스포츠Tour de France 소개(1) 20 Under Pressure 18/06/05 6747 17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