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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7/19 12:47:20
Name   이그나티우스
Subject   Kimchi Warrior의 탄생
지난번에 가볍게 올렸다가 분에 넘치는 추천을 받은 글의 후속작적인 성격으로 짧은 글 하나를 더 붙이고자 합니다.

꽤 오랫동안 김치를 싫어했었습니다. 원래부터도 한식을 썩 좋아하던 편이 아니었던지라, 한식의 대표주자격인 김치에 대해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김치보다는 샐러드나 과일과 같이 신선한 음식을 먹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왔고, 사실 그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불과 몇달만에 저는 김치 옹호자, 진정한 Kimchi Warrior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유는 야채와 과일의 보관에 지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취를 시작한 이후로 저는 영양소 보충을 위해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하루에 일정량 이상 섭취하기 위해서 무척이나 노력해왔습니다. 소분한 과일을 사보기도 하고, 주말에 미리 야채를 씻어다가 나눠서 먹어보기도 하고, 하여간에 몇년동안 갖은 방법을 다 써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방법도 '재료보관과 처리 및 조리의 어려움'이라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공부때문에 바빠서 며칠 배달을 시켜먹거나 인스턴트 음식으로 때우고 나면 금세 과일과 야채가 음식물쓰레기의 더미로 변하기 일쑤였습니다. 몇번이나 액괴형 우주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변한 상한 재료를 치우면서 정말 많은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돈주고 이 물건들을 샀나..." (서O구치소에 수감중인 모 유명인사의 발언이 떠오른다면 분명 착각일 것입니다.)

아니 자괴감이야 그렇다쳐도 돈이 정말 아깝더군요. 매주 사느라 몇만원, 버리느라 또 음식물쓰레기 처리비를 지불하니 이런 모순도 모순이 없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가?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상점은 1인가구가 사용하기에 적당한 양의 식재료를 잘 팔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샐러드 한접시를 만든다고 생각할 때 필요한 재료는 양배추, 양상추, 파프리카, 피망, 방울토마토(토마토), 오이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대형마트 기준으로 양배추 반통, 양상추 1통, 파프리카 1개, 피망 1개, 방울토마토 1팩, 오이 1개를 구입해야 합니다. 그런데 샐러드 1접시를 만들 때에는 위에서 준비한 재료의 일부만 사용하게 됩니다. 양배추는 많이 잡아도 반통의 1/3, 양배추는 잎 몇장, 파프리카과 피망은 반개, 방토도 한팩 수십개 중에서 6~7개 쓰면 많이 쓴 것일 겁니다. 오이도 1/3개 정도 들어가려나요?

(탈압박을 위해 덧붙이자면 요즘 많이들 파는 조각조각 잘라서 파는 샐러드는 공장에서 나온지 시간이 지나서 야채 선도도 떨어지는데다, 서브웨이와는 달리 소독 및 세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어서 맛있지도, 편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샐러드를 만들고 나서는 어떻게 되느냐면 나머지 재료는 전부 냉장고 야채칸에 쓰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재료들을 과연 상하기 전까지 쓸 일이 생길까요? 양배추야 짜장 한번 만들고 나면 어떻게 끝난다 쳐도 나머지 재료들은 모두 무언가의 요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가족들이 있다면 이런저런 메뉴로 응용해서 어떻게든 남은 재료들을 처리하거나 할 수 있지만 혼자 사는 사람은 그러질 못합니다. 심지어는 바빠서 샐러드를 만든 다음날 요리를 할지 말지도 불확실한데요. 물론 그중 일부는 이후의 요리로 사용하겠지만, 제 경험상 상당량은 사용되지 않은채 남아버립니다. 특히 용도가 많지 않은 재료일수록...

정말 효율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한번 재료를 사고 그걸 다 먹을때까지 매일 같은 메뉴를 먹는 방법도 있을 수 있지만, 경험상 그런 시도는 정신건강에 별로 좋지는 않을 겁니다.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계속 군만두만 먹은 것이 우연은 아닙니다. 식사와 같은 미천한(?) 일에 신경을 쓸 일이 없는 '인싸'들이라면 딱히 같은 음식만 3일 연속 먹어도 별 상관이 없겠지만, 수요일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를 일요일 점심시간부터 고민하기 시작하는 '찐'들에게 같은 메뉴를 계속 먹는다는 것은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 일본의 티비에서 영양사 양성학교를 취재한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조리실습을 하고 남은 재료로 교사식당의 식사를 만드는 미션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식사당번 짬처리를 시켰다기보다는, 선생들이 직접 시식하면서 이것저것 평가하는 것을 보니 성취도평가의 일환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때는 별 생각이 안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남는 식재료를 이용한 메뉴를 센스있게 기획하는 것 역시 영양사의 실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같은메뉴만 계속 만드는 전문점과는 또 상황이 다른거죠.

물론 솔직히 제가 야채나 과일을 간식처럼 우적우적 집어먹는 그런 타입이었다면, 어쩌면 지금처럼 식자재 보관으로 고민을 안했을지도 모릅니다. 가끔 그런 분들 계십니다. 식후에 오이 깎아서 반쪽을 먹고, 자기전에 참외 하나 깎아서 드시고, 티비보면서 귤 10개씩 까 드시는 그런 스타일의 분들... 그렇지만 저는 늘 고기와 탄산음료를 즐기는 선진국형(?) 식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또 남는 식재료를 처리하는 것도 잘 되지를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매일 규칙적으로 공급해서 영양 밸런스를 맞춘다는 저의 원대한 계획은 출범한지 3년이 채 되지 못해서 좌초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이역만리의 역질도 내쫓는다는 한민족의 자랑 김치였습니다. 김치는 위의 신선 식자재들이 가진 보관상의 단점으로부터 해방된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먹다가 남으면 뚜껑을 닫고 그냥 냉장고에 넣어두면 며칠후에 다시 생각나서 퍼먹기 시작해도 신선도가 크게 변하지 않는 마법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야 세상에 이렇게 편한게 없구나. 이제서야 저는 사람들이, 그 중에서도 주부들이 왜 그렇게 김치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물론 김치도 너무 오래 보관하면 묵은지를 넘어 바이오하자드를 유발할 수 있는 독극물로 진화하는 만큼 조심해야겠지만....)

게다가 김치는 조리도 그렇게 간단할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 샐러드를 설명하면서 제가 빼먹은 부분이 보관만큼이나 샐러드 제작과정도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는 사실입니다. 바깥일에 바쁘셔서 주방안으로 들어올 일이 없으신 분들이나 반대로 요리 고인물 분들이야 "아 그까이꺼 그냥 야채 툭툭 잘라다가 넣으면 되는거 아녀?" 라고 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샐러드는 비가열식품이기 때문에 식초 등을 사용하여 조리를 하기 전에 세정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배탈이 나는 수가 있습니다. 거기다가 칼로 자르고 채칼로 썰고 하는 것도 손이 재법 많이 가지요. 그리고 샐러드 한번 했다고 하면 야채 껍질이나 살짝 조직이 무르거나 해서 잘라낸 부분, 꼭지 등등 부산물이 엄청나게 발생합니다. 사실 막상 해보면 그렇게 복잡한 일은 아니긴 한데, 간단히 한끼 때우는 것이 목적인 상황에서 샐러드 한접시 만들자고 또 그 수고를 하기에는 분명 쉽지 않은 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김치는 다릅니다. 김치는 통을 열고, 숟가락으로 떠서, 냄비나 팬에 넣으면 그걸로 조리 준비가 끝납니다. 그마저도 귀찮으면 그냥 떠서 그릇에 담고 반찬으로 먹으면 됩니다. 아무튼 이 정도면 샐러드와 비교해서 맥도날드 형제가 30초만에 햄버거를 만드는 공장식 주방을 만든 정도의 기술적인 우위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맥도날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하자면, 레이 크록의 전기를 다룬 마이클 키튼 주연의 영화 <파운더>를 보면 레이 크록이 회사에 재정적으로 압박이 되는 냉동시설(밀크쉐이크의 재료를 보관하는 용도)의 전기료를 절약하기 위해 물에 타기만 하면 쉐이크를 만들 수 있는 실온에 보관 가능한 파우더 타입의 신제품을 도입하기로 합니다. 영화에서 이 도입 건을 두고 크록은 창업자 맥도날드 형제와 분쟁을 벌이게 되죠.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돈을 위해서 퀄리티를 포기하는 야비한 사업가의 술책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한달에 한두번 슬라임으로 변한 식재료를 버리면서 현타를 수도없이 맞았던 저로서는 솔직히 크록의 결정을 무작정 손가락질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재료의 보관과 관리는 만드는 쪽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도 계속중인 한국 맥도날드 암흑기의 그 퀄리티 다운을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더블불고기버거 돌려내라 이놈들아!)

물론 당연히 신선한 식재료를 충분히 섭취하는 것이 건강에는 가장 좋겠지요. 그렇지만 그러한 식재료를 누리는 데에는 그만큼의 리소스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돈이 되었건(예: 매일 1만3천원어치 서브웨이 샐러드를 배달시켜 먹는다.), 아니면 시간이 되었건(예: 전업주부나 입주가정부가 하루종일 음식만 만든다.) 간에 말입니다. 건강하고 신선한 식재료를 충분히 섭취한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혜택도 아닙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가 다 변명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부지런하신 분들은 자기 일을 하면서도 제가 말한 위의 모든 장벽을 다 넘어서 매일 신선한 식재료로 음식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저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저는 그 정도의 능력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야기가 어디까지 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다시 한번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김치가 신선한 샐러드보다는 못한 점이 있을지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현실적으로 야채를 규칙적으로 섭취할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치뿐만이 아니라 피클이나 장아찌와 같은 다른 절임야채류 음식들도 비슷한 효과를 내겠지요. 예전에 유럽의 탐험가와 해군들이 태평양 일대를 탐험하던 시절에 원양으로 항해하는 선박에서 선원들의 괴혈병이 빈발하자 그에 대한 대책으로 비타민 등 필수영양소의 공급을 위해 독일식 절임양배추인 사우어크라우트를 공급했다는 케이스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자취방이 도시 한가운데 있어서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이제 보니 2년 일정으로 태평양을 항해하는 범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신선한 야채를 먹기 어렵다면 염장으로 된 야채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분간은 종합비타민과 함께 김치와 장아찌를 먹으면서 존버하다가 돈을 많이 벌어서 매일 배X의민족으로 서브웨이 1만3천원어치를 시켜먹을 수 있는 부를 쌓을 수 있도록 지금은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전업주부가 되거나 혹은 전업주부와 결혼해서 제 자신이 배우자와 저 자신을 위해 매일 샐러드를 만들거나, 배우자가 제가 먹을 샐러드도 만드는 김에 같이 만들어 주시기를 부탁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번 생에는 이 방법은 좀 힘들 것 같으니 돈을 열심히 버는 쪽으로 노력해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또 1명의 김치 워리어가 탄생한 것 같습니다. 김치 워리어... 당신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보신 겁니까...?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8-0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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