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 게시판입니다.
Date 15/09/05 05:27:38
Name   No.42
Subject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
이에 관련한 글을 쓰시고 싶은 분이 또 계실 듯 하지만, 몇 자 먼저 적어보겠습니다.

우선 저는 KBO에 별 관심이 없는 이입니다. 팀, 감독, 선수에 대해선 사실 큰 호와 불호가 없는 입장입니다. 한때는 트윈스의 광팬이었으나, 지금은 그 마음 다 털고
정리한 상태입니다. 양키스만이 진리이죠. (제 지인은 저를 두고 첫사랑이 타락하여 호되게 이별한 후에 금발쭉빵미녀와 국제결혼한 케이스...라고 설명하더군요.)

문제의 인터뷰는 이겁니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597262&cloc=olink|article|default

지금 여기저기서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한화의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이며,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솔직한 감상을 요약하자면,
헛웃음도 안나옵니다. 김 감독은 분명 이름값에 걸맞는 업적이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기조로 야구를 해왔다고 생각하면, 그 업적 모두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의문이 듭니다. 우선 논란의 중심인 권혁 선수에 대한 언급을 보겠습니다. 이 분이 생각하시는 것은 권혁은 패스트볼과 더불어서 오프스피드
피치나 브레이킹 볼이 곁들여져야 위력이 제대로 발휘되는 투수인데, 현재 힘이 너무 들어가서 패스트볼에 의존하고 있으니 그 힘을 빼서 세컨 피치를 던지는 요령을
습득하는 과정을 밟는 중이랍니다. 이른바 자연체 이론이랄까요? 사람은 탈진상태가 되면 가장 힘이 들어가지 않는 자연스러운 태세를 갖추어서 무공이 강해진다는 뭐
그런... 네, 저는 이게 무협이나 만화에나 나올 법한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권위있는 어르신이 아닌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개나 헛 등의 접두사를 붙일 의향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현재 권혁은 성장과정을 겪는 것일 뿐, 혹사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 밖에 나이 마흔의 노장 박정진은 체력 문제로 연투 못하겠다고 했다가 호되게
까이고, 연투를 계속하면서 칭찬듣고 있답니다. 사람은 한계가 없으니 체력문제나 부상도 오버워크를 통해서 극복하면 된다고 합니다. 솔직히 인터뷰 전체에 유유히
흐르는 만화적 열혈의 기운에 정신이 멍합니다. 딱 소년 만화에서 할아버지 감독이 돌아가시며 남겨줄 주옥같은 대사에 어울립니다. 하지만 프로야구에? 우와, 저는
정말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팀을 위해서 희생하라... 그거 좋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희생이라는 것이 정말 전쟁터에서 하는 희생처럼 건강과 목숨을 던지는
희생이라면 저는 스포츠 무대에서 있어선 안될 일이라 봅니다.

물론 프로스포츠는 비즈니스입니다. 승리가 모든 것에 앞선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선수를 갈아넣어서 단기적인 성적을 뽑는 경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예는
드물다고 봅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더스티 베이커 감독이네요. 선발투수에게 부하를 거는 것으로 유명한 올드스쿨 감독인 그는 2003년 우승에 목마른 시카고
컵스에 우승청부사로서 부임합니다. 당시 컵스는 창창한 유망주들을 잔뜩 보유한, 미래가 밝은 팀이었습니다. 베이커 감독은 그 유망주들을 실컷 굴렸습니다. 물론
덕분에 2003년 컵스는 88승으로 디비전 1위를 하고 DS에 진출, 강팀 브레이브스도 꺾으며 CS에 오릅니다. 여기서 유명한 관중의 포구방해로 귀신같은 역전패를
당하면서 WS진출의 꿈은 좌절됐지요. 그런데 좌절된 것은 2003년 한 시즌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즌에서 컵스는 차세대 에이스이며 팀의 희망으로 꼽혔던 두 투수를
모두 잃게 됩니다. 바로 마크 프라이어와 케리 우드죠. 베이커 감독이 그들에게 시킨 것이 다음과 같습니다.

마크 프라이어 : 30게임 등판(30선발), 211.1이닝(커리어하이), 선발 경기중 100~119구 투구 17경기, 120구 이상 9경기
케리 우드 : 32게임 등판(32선발), 211이닝(커리어 2위), 선발 경기중 100~119구 투구 12경기, 120구 이상 13경기

프라이어는 한 경기 최다 133구, 우드는 141구를 던진 경기가 있습니다. 전미를 들썩이게 했던 두 투수는 이 시즌 이후로 가파른 내리막을 걷습니다. 전설적인 20K
경기를 만들기도 했던 파이어볼러 우드와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학 투수로 꼽혔던 프라이어를 모두 잃은 컵스는 염소의 저주를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물론 컵스는 2003년 시즌에 목말라하던 지구 우승과 PS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지불했던 것은 너무나 컸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김성근 감독의 이론에 따르자면, 저 둘은 팀을 위해서 희생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과연 어떠한지 잘 생각해 볼 일입니다.

저는 의사가 아닙니다. 의학적인 지식도 일반 상식 수준밖에 모릅니다. 스포츠 의학에 있어서 김 감독님이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주장하시는 바는 제가 가지고 있는 일반 상식에도 어긋납니다. 레지엔님 같은 분께서 정확히 말씀해주실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저는 지금껏 야구를 보고,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를 접하면서 '인간의 몸은 소모품'이라는 것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쓸 수록 단련되고, 오버워크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면 지금 야구를 비롯한
모든 스포츠에 혹사라는 말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어야 할 것입니다. 쓸 수록 단련되니 나이 마흔이 넘어도 강력한 선수로 군림해야 정상입니다. (빅 유닛의 경우는
인간적으로 제외하고 싶습니다.) 이 역시 무협에서 잘 언급되는 반박귀진이나 반로환동의 경지가 생각나네요. 여러분께선 '데드암'이라는 말을 들어보셨겠지요?
다저스의 류현진 선수가 데드암이 의심된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언론에서도 떠들썩했던 일이 있습니다. 데드암은 투수가 무리를 할 경우에 나타나는 증상으로서,
뚜렷한 부상은 없으나 구속이 현저히 느려지고 제구에도 문제가 생기는 증상입니다. 이 증상의 원인은 이론이 없이 '관절혹사'라고 결론 내려진 듯 합니다. 투구에
관여하는 관절낭과 어깨의 네 가지 근육에 부하가 심하게 걸려서 발생하며, 쉽게 근육 손상이나 관절 와순 파열로 진행되므로 특히 투수들이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죠.
쓸 수록 단련되는 관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데드암은 일단 존재할 수 없는 증상입니다. 그런데 버젓이 있지요. 그렇다면 정신력으로, 오버워크로 한계를 돌파하고자
데드암에 시달리는 투수가 더더욱 열심히 연투에 나선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어깨가 망가지거나, 그 이전에 위력이 떨어진 공을 어떻게 해보려고 무리하다가 하체나
기타 다른 관절에 부상이 오게 될 것입니다. 투수가 망가지는 루틴으로서 아주 전형적이지요. 때문에 데드암 신드롬이 의심되는 투수는 부상자 명단에 올리든가 해서
휴식을 주는 게 보통입니다. 혹사는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물론 말입니다. 지금 혹사 논란이 오가는 선수들이 내년에도 무사히(?), 심지어 좋은 성적을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혹사로 인해 망가진 선수들로 인해 내려진 결론을 부정하기엔 너무나 빈약한 반례가 될 뿐입니다. 지금 김 감독님의 권혁이
혹사가 아니다...는 말씀은 정리하자면 '많이 던졌지만 혹사는 아니다.'입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와 퍽 비슷하죠?

'일단 성적을 내야 한다.' '팀을 위해서 희생해라(라고 쓰고 망가져라라고 읽어야겠죠).' '정신력으로 극복해라.'라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하시는 것을 보면서, 막연히
야구계의 원로이자 명장인 이에게 가졌던 존중이 과연 의미가 있나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 오랜 기간동안 계속 저런 마인드로 선수를 대하셨고, 야구를 하셨다면,
그것이 한 팀의 몇 시즌에 반짝이는 이펙트를 부여했을 지언정, 한국 야구라는 큰 흐름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 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일이 아닐까요. 한국 야구를
열심히 보는 이들에게 들으니, 혹사에서 자유로운 한국 감독은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거랍니다. 사실, 감독은 누구나 혹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이기고 싶으니
잘하는 선수를 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죠. 하지만 치밀한 계획과 관리로 선수들의 부하를 줄이면서 시즌을 운영하는 것, 냉철하게 포기할 순간을 캐치하는 것이야말로
야구 감독의 핵심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력으로 극복하라고 악다구니 쓰는 것은 성질깨나 부릴 줄 아는 사람 아무나 데려다놔도 할 수 있는 일이죠.  지금
김 감독님은 그간의 커리어에서 쌓인 권위와 감독의 권한으로 선수들을 윽박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섣불리 못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나아가자니 낭떠러지고
돌아가자니 칼날이 기다리는 뭐 그런 상황에 놓인 것 같은 선수들이 측은합니다. 오늘도 하릴없이 여기저기의 사무실에서 윗 사람 눈치보면서 몸을 축내가며 야근에
골병이 들어가는 많은 이들이 생각나는 모습이기도 하구요. 지금까지 가져오셨던 고집이고 철학이니 바꾸시면 좋겠다는 생각도 감히 못하겠습니다. 다만 그저 올해를
마지막으로 감독을 은퇴하시는 것이 어떨까하는 마음이 듭니다.


- 메이저 기록은 베이스볼 레퍼런스를 참조했습니다.
- 말이 나온 김에 권혁 선수의 구종 구사와 피안타율에 대한 기록도 찾아보고 싶은데, 대체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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