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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12/20 14:32:10수정됨
Name   작고 둥근 좋은 날
Subject   시시하고 심각한 이야기
"이봐, 나는 지금 심각한 이야기를 한 참이라고."

그의 당황과 상관없이 그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깔깔깔깔깔, 두어 템포 쉬고 다시 푸하하하. 굳이 힘주어 과장한 웃음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과장된 웃음이었다. 한숨을 쉬며 그는 국자를 들어올렸다. 커다란 명란 두 덩어리가 건져졌다. 평소의 그라면 한 덩어리를 덜어냈을 테지만, 앞의 그녀가 얄미워진 탓에 그대로 그의 접시에 담아버린다. 소심한 복수였다.

"그 시절에는 심각한 문제였어."
"그래, 그렇겠지. 그렇다고 내 명란까지 다 처먹지는 마라. 지금의 내겐 명란 한 조각이 소중하다고."

그제서야 웃음을 거둔 그녀는 엄숙한 얼굴로 그의 앞접시에 담긴 명란을 쪼개 자기 접시로 옮긴다. 그 시절, 그 시절이라. 근데, 그 시절이라는 게 뭐야. 10년 전을 이야기하는 거야, 아니면 열 살 어렸을 때를 이야기하는 거야? 그녀는 쪼갠온 명란을 다시 반으로 쪼개며 그에게 물었다.

"그게 그거 아닌가. 10년 전이었고 나는 열 살 어렸다고."
"에이, 다르지 이 사람아. 순진한 척 연기는 그만둡시다. 너나 나나 삼십대라고, 삼십대. 이 아저씨야."

-

그는 십년을 끌어온 비밀을 털어놓은 참이었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섹스를 한다. 아마 지금의 시대에 조금 더 많이 할 것이다. 이십 대나 삼십 대나 섹스를 한다. 아마 이십 대가 좀 더 많이 할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십년 전의, 이십대 시절의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참이었다 : 그와 그녀와 누나가 등장하는 이야기였다(그녀는 배경으로만 등장한다). 셋은 제법 큰 대학 연합 독서 동아리의 회원이었다. 거기서 그는 누나를 만났다. 이십대 시절의 그에게 모든 여자는 공평하게 성욕의 방아쇠였고 어떤 방아쇠는 조금 더 예민했다. 누나, 는 그에게 조금 더 예민한 방아쇠였다. 누나는, 예뻤다.

"너 뿐만은 아니었겠지. 그 언니,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남자를 홀리는 분위기랄까."
그런 느낌이었나. 그는 조금 고개를 갸웃했다. 10년간 그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조율된 누나의 이미지는 뭐랄까 청초하고 순진한 그런 이미지였다. 남자를 홀린다거나 하는 쪽과는 거리가 좀 있는. 그의 속을 들여다본 것마냥 그녀는 말을 이었다.
"막 섹시하고 야한 느낌이 남자를 홀리는 게 아니잖아. 그 언니 같은 분위기가 제대로 먹히지. 섹시하고 야한 쪽이라면 내 쪽 아니었냐."
그는 기억을 되짚어, 희미하게 남은 10년전의 그녀를 떠올려본다. 피식 웃음이 났다. 과장한 패션이었지만, 과장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엉성한 느낌이었다.

"너는 섹시한 쪽보다는 엉성한 쪽이랄까 좀 그런 느낌이었던 거 같은데. 노력은 가상하지만 이하생략 그런 타입의..."
"뒈질래. 큐티섹시였다고."

과장된 윙크를 하는 그녀의 눈주름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 날인가, 동아리의 어느 형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당시의 그와 형이 할 이야기란 도스토예프스키와 마르크스와 보부아르와 프랑수와즈 사강과 버지니아 울프와 에쿠니 가오리를 돌고 돌아 결국은 여자 이야기밖에 없었다. 취한 형은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부끄러움과, 약간의 자랑스러움을 담아. 사실 나 어제, 걔랑 잤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아, 그래요. 하고 그는 술을 더 마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 지 고민했으나 역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자취방에 돌아오게 되었다. 샤워를 하며 그는 자위를 했다.

그런 일은 꽤 자주 일어났다.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직 걔랑 안 잤냐. 한번 자자고 해봐. 걔, 이미지랑 다르게 엄청 잘 대주는 쉬운 여자야. 이 때 그는 조금 화가 났다. 쉬운 여자고 대주고 그게 뭔 쌍팔년대 개소립니까. 선배는 건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말 실수를 좀 했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너 걔 좋아하잖아. 프리 섹스의 시대라고. 관심 있으면 한번 자자고 해 봐. 임마 형이 좋은 조언해주는데 어디다 눈을 부라려 하여간 새 시대 젊은이들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어 아주.

"여러가지로 꼬여있던 시대였었지, 참."
그녀는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 언니야 유명하긴 했지. 여자들 사이에서도 말 좀 있었어. 남자애들 오는 족족 다 잡아먹는다고."
"아 그래?"
"모임에서 친한 여후배라곤 나밖에 없었을껄. 다들 뒷담 까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 사실 나는 그 언니 부러웠는데. 존나 멋있잖아. 순진한 얼굴을 해가지고 남자애들 오는 족족 다 잡아먹고. 연애가 어쩌니 섹스가 어쩌니 자유가 어쩌니 해도, 한번 자면 뒷말이 팔만대장경 나오던 시절에 당당할 수 있던 사람이란. 그래서, 너도 잤냐?"
"결론말 말하면, 그래. 아, 이 이야기를 들은 건 너 뿐이다."
그는 그런 이야기를 했던 형들과 달리 약간의 부끄러움도, 약간의 자랑스러움도 없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감정은 그런 나이 그런 시대의 것일 테니. 아무튼 결국 그도 언젠가 누나와 자게 되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같이 술을 마시고, 자자고 했고, 잤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누나는 진짜 쉬운 여자라 나랑 한 걸까. 나는 누나를 좋아했는데, 이런 건 내가 원한 게 아니었던 거 같은데. 하지만 섹스란 건 역시 좋은 일이구나.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던 거 같아.

그리고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 한 템포 쉬고, 깔깔깔깔깔.

"이봐, 나는 지금 심각한 이야기를 한 참이라고."
그의 당황과 상관없이 그녀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깔깔깔깔깔, 두어 템포 쉬고 다시 푸하하하.

-

둘은 술과 웃음과 이야기와 계산서를 정리하고 나와 술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기에는 조금 추운 날씨였지만, 그대로 집으로 가기엔 조금 아쉬운 그런 날씨. 두어 마디가 필요하고 그거면 충분한 그런 겨울이었다.

"그런데 아까는 뭐가 그렇게 웃겨서 처웃었냐."
"아니, 웃기잖아. 그게 안 웃겨?"
"어디가 그렇게 웃긴데. 그 시절에는 심각한 문제였다고."
"바로 그게 포인트야. 그 시절의 심각한 문제를 지금도 이렇게 심각한 얼굴로 말하다니. 이젠 아무렇지 않을 이야기잖아."

내가 그 누나를 많이 좋아했었나봐, 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가 말을 빠르게 이어갔다.

"하긴, 그때는 모든 게 심각했지. 예술이나 사랑이나 섹스나 정의나 뭐 온갖 것들이 다 심각했으니까. 술집에 앉아 시시하게 담배를 피우며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아니 이젠 담배 한 대 피우자고 밖에 나와야 되고, 그 시절에 심각한 것들은 농담이 되고, 중요한 건 명란 조각이라거나 그런 거지. 늙어버렸다니까. 얼마전에 거울 보다가 눈주름 보고 깜짝 놀랐어. 와우, 나도 이제 늙었구나."

그는 조금 전에 그녀의 눈주름이 예쁘다고 생각한 터였고 그걸 그대로 말했다.

"와, 십년전의 섹스로 고뇌하던 순진하던 아이가 몇분만에 이렇게 어엿한 사내가 되셨어.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이나 치고 말야."

그녀는 또 한번 장난스러운 윙크를 보낸다. 역시 예쁘네, 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오늘은 별로 그럴 컨디션이 아닌 걸. 이라고 그녀는 답한다. 작업 거는 건 아닌데, 한잔 더 할래. 라고 그가 받는다. 에이, 열 살쯤 어렸더라면 오늘도 십년 전이라도 어디가서 물고빨고 하면서 천년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었겠지만, 역시 오늘 이 나이에 그런 걸 저질러버리면 모든 게 너무 시시해질 거 같은데. 라고 그녀는 답한다. 그거 참 어렵군, 이라고 그는 답한다. 세상 뭐 그렇게 어려운 게 많냐, 쉽고 편한 마음으로 다음에 또 봅시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그의 뺨에 살짝 입술을 대고 겨울 밤으로 총총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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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배맛 반, 술맛 반의 키스같은 글이군요.
  • 잔잔하니 좋습니다. 뭔가 그 시절 신촌 창현교회 뒤의 이자까야가 생각나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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