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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4/15 17:32:01 |
Name | 간로 |
Subject | 정치혐오와 정치만능 사이에서 |
오랜 정치혐오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정치혐오는 정치만큼이나 역사가 깊죠. 아렌트의 말에 따르자면, 아마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사람은 플라톤일겁니다. 진리를 전한다 믿던 자기 스승을 죽게 만든 정치세계를 좋게볼리가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그의 이상적인 공동체는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를 볼 줄 아는 철학자가 모든걸 알아서 다스리는 나라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끼리 다투는 정치란 진리를 가리는 장애물일 뿐일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보면 플라톤은 그런 정치세계를 일소해버리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죠. 여러 사람이 떠드는 다툼의 정치공간은 좀 그만하고 다 아는 사람에게 맡기자. 정치보다는 진리를! 맥락은 다르겠지만, 리버럴리즘이 주장하는 최소국가도 어느정도는 이런 혐오스러운 정치부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와 관련한 한 태도로 볼 수 있지 않나 해요.(리버럴리즘이 곧 정치혐오라 하기는 어렵겠지만요.) 국가로 대변되는 정치는 사회의 실패의 경우에만 개입하고 나머지는 사회에 내버려두는 거죠. 맥락에 따라서, 여기서 사회란 경제일수도 있고, 국가이전부터 존재한 자연권을 가진 개개인들의 공간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개개인들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한 국가는 끼어들지 말라는게 한 태도겠죠. 왜냐하면 그 권리라는 거는 국가 이전부터 있는 자연권스러운 것이고 따라서 사람간의 합의 이전부터 존재하는, 정치 이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정치가 바로 건들 수 없고 그게 침해될 때나 국가가 형벌권 등으로 사회에 개입하고, 공익을 위해 제한하고 싶을 때는 정치 통해서 법률로 최소한으로 해라. 그러니까 그 법률 정하는 대표자는 자연권자들이 투표에 의해 뽑아야겠지. 이게 정치적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정당화하는 방식이죠. 그래서 정치로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권리'의 문제로 넘어가죠. 저는 인간사회에서 정치란 원래 개차반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인데, 이러면 당장 쉽게 나올수 있는 결론은 위에서 다룬 것처럼 똥통쓰레기인 정치 부문을 최대한 줄이자는 입장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치는 항상 똥통이니까 ㅋㅋㅋ 정치혐오자의 당연스런 결론일 수 있죠.(그래서 최소국가라는 태도가 이러한 방향성의 하나로 보이죠.) 그렇다고, 이게 맞느냐하면 물음표가 계속 붙기도 합니다. 저는 정치라는게 인간집단으로 이뤄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에 정치부문이 근본적으로는 다른 부문의 모든 걸 바꿀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에 따라 그 사회의 과학도 변화하는게 얼마든지 가능하죠. 나치독일의 우생학 사례를 굳이 들고오지 않더라도요. 과학적 진리 외에 다른 부문은 더 취약한게, 이미 정치적 견해에 따라서 사회적 현상에 대한 해석이 무척이나 달라지는걸 온라인 키워에서 자주 목도할 수 있죠. 인간 사회에서 정치가 가장 근본적이다. 이런 생각은 굉장히 래디컬하기도 한데, 이게 딱 신좌파가 리버럴 까면서 하는 얘기이기도 했습니다. 부르주아 너네가 말하는 그 '권리'라는게 정말 자연적이고 당연한거냐? 그거 부르주아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들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는 그거 다 까고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만들어보자! 그게 68을 위시한 뉴레프트의 한 레퍼토리죠.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 놀랍게도 정치가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거 비슷한 말을 나치법학자로 유명한 카를 슈미트도 합니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는 것인데~ 블라블라블라. 그래서 실제로 뉴레프트쪽 사상가들이 많이 언급하는 우파 사상가 중 하나가 카를 슈미트인 것으로 ㅋㅋ 정치는 사회의 다른 부문을 압도할 수 있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저는 정치를 혐오하면서 최소화하자는 주장은 뭔가 비겁하다고 해야할까. 인간사회를 뭔가 메타적으로 보자면 현실적으로는 정치가 다 지배할 수 있는건데 이거를 그냥 축소시키자는 거는 무언가 중요한걸 방기하자는 것 같다고 해야할지. 비겁해보여요. 한계에 도전하면서 용감하고 고귀하고자 하는 인간이 할만한 건 아니고 소심한 겁쟁이의 태도처럼 보인달까. 어디까지나 이상적 관점에서 ㅎㅎ 그런데 사회의 모든 것을 의문시하고 다투어보는 래디컬한 정치가 정치의 잠재적인 폭이 될 수 있다해도 항상 실제로 그러한 식으로 사회가 굴러가는건 현실적으로 어렵죠. 그러면 사회의 어떤 것도 안정적일 수 없거든요. 사고실험 속에서라면 모를까, 공동체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터전이니까 다소 영속적인 성격이 있어야만 하거든요. 모든 걸 공적으로 다 뒤집고 의문시해 볼 수 있는 사회가 얼마나 불안정하겠어요. 그래서, 결국은 정치혐오에서 비롯되는 정치일소와 래디컬에서 비롯되는 정치만능 사이에서 어딘가 균형점이 불가피하다 생각해요. 인간사회에서 '어디까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정치에, 그렇지 않은 부분은 다른 부문에. 리버럴리즘도 그 물음에 대한 한 대안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 정치라면 당연히 다툼이 일어나고, 그러라고 있는게 정치고, 답이 있기보다는 견해들이 있는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위에 논의에 의하자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진리의 영역은 아닌 거고 그게 정치가 일어나야 할 일이니까요. 그래서 진리의 영역이 아닌 정치는 다시,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진리를 갈구하는 성향이 있고, 진리를 상정해야 세계는 투명하고 아름다울텐데, 진리가 없는 세계는 혼돈이고 그게 더군다나 돈과 권력도 가져다주니까 그걸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생각하면 정말 똥통쓰레기라고 밖에 ㅋㅋㅋ 뭔가, 두서없이 막 쓰다가 글을 마무리하는거 같은데, 결국 결론을 내자면 정치영역의 불완전성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걸 덜 불완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건 계속 있겠지만(그리고 그런 시도는 유의미하지만) 내가 '사랑'할만할 정도의 '양품'이 있을거라 여기는건 글쎄... 저같은 정치혐오자 입장에선 대단히 나이브해보여요. 그래서 저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과몰입/정치병자들을 극혐하기 쉬울겁니다. 그렇다고 정치혐오의 태도로 정치를 완전히 회피하는 것도 완전히 긍정하기는 어려워보이고. 똥통쓰레기 속에서 그나마 완전 폐기물을 골라내고 재활용가능할만한 쓰레기를 찾아내려 하는게 명징한 진리와는 거리가 먼 고통투성이의 인생을 어떻게든 살아가는 인간존재랑 맞는게 아닐지. 그리고 그런 폐기물 속에서의 솎아내기 과정을 유일하게 국민이 직접할 수 있게 공식적으로 보장하는게 '선거'일테니까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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