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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9/21 13:00:11
Name   Raute
Subject   레버쿠젠과 손흥민 이야기
스포츠는 문제를 풀고 답을 구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인 뿐만 아니라 전문가끼리도 감상평이 달라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래서 동일 경기, 동일 선수에 대한 해석이 다른 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닌데... 손흥민에 대해서는 좀 예외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냥 이러이러한 선수다, 이러이러한 점이 장점이다, 이러이러한 점이 단점이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건 확실히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얘기들까지 같이 돌아다니거든요. 재밌는 점은 한국선수이고, 중계가 꽤 많아서 거의 모든 경기를 다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낭설이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이 사람들, 정말 경기는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죠. 박지성 때는 적어도 해석의 여지가 큰(주전이냐 로테이션이냐 같은) 문제들을 두고 다퉜다면 이건 뭐지? 싶은 그런 거? 어제 손흥민이 EPL 데뷔골을 넣고 다시 한 번 괴담 아닌 괴담이 흘러다니길래 제가 글 쓰고 활동하는 유일한 비축구 커뮤니티인 홍차넷에 한 번 써볼까 합니다.



1. 손흥민은 후반 교체를 많이 당했다.
이건 분명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기록이 있잖아요? 지난시즌 레버쿠젠은 4-2-3-1을 쓰면서 손흥민-찰하놀루-벨라라비로 2선을 구축했고 전방에 키슬링이 나왔습니다. 손흥민에 대해서 레버쿠젠을 비판하는 큰 목소리는 '왜 한방이 있는 선수를 자꾸 빼느냐'였습니다. 손흥민은 지난시즌 모든 대회 합쳐 39경기를 선발로 나왔으며, 14번 교체되었습니다. 찰하놀루는 44경기를 선발로 나와서 16번 교체되었습니다. 벨라라비는 45경기 선발 출장해서 18번 교체로 당했습니다. 키슬링은 41경기에 선발로 나와서 18번 교체되었는데 이 기록들을 계산해보면...

손흥민 - 35.9%
찰하놀루 - 36.36%
벨라라비 - 40%
키슬링 - 43.9%

오히려 손흥민이 미세하게나마 교체된 비율이 가장 낮습니다. 누적 출장시간이 제일 적긴 한데 이건 아시안컵 참가 때문에 2경기 빼먹고 1경기 후반 투입되었는데 이 경기들을 다 뛰었다고 가정하면 벨라라비만 좀 높고 찰하놀루-키슬링과는 거의 같은 수치가 됩니다. 후반기에 많이 교체당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데, 리그에서 12번 후반교체였는데 후반기에는 4번뿐이었습니다. 차라리 전반기에는 많이 교체됐다가 후반기에는 계속 뛴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죠. 경기력이 좋지 않아 후반기에 팀내 비중이 줄어들었다는 얘기를 출장시간의 비중이 줄어들었다로 착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


2. 손흥민은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벨], 벨탐욕, 벨가놈 등으로 불렸지만 시즌 개막 이후 일관되게 레버쿠젠의 에이스는 벨라라비였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기록으로 보시죠. 왼쪽이 리그, 오른쪽이 예선을 포함한 챔스 기록입니다. 컵은 표본이 적어서 뺐습니다. 기록 출처는 키커입니다.

손흥민 - 30경기 11득점 3도움 3.60 / 10경기 5득점 1도움 3.28
찰하놀루 - 33경기 8득점 7도움 3.53 / 10경기 3득점 4도움 3.30
벨라라비 - 33경기 12득점 9도움 2.72 / 10경기 1득점 3도움 3.35
키슬링 - 34경기 9득점 4도움 3.48 / 10경기 4득점 3도움 3.00

손흥민은 기복이 심하고 경기력이 좋진 않지만 가끔씩 꽂아주는 한방이 있는 선수지, 팀의 공격을 주도하는 유형은 아니었습니다. 그에 반해 벨라라비는 레버쿠젠이 지닌 가장 위력적인 선수로 리그 MVP로 거론되던 로벤을 제외하면 가장 뛰어난 라이트윙이라는 평가를 받았고요. 예전에 제가 소개한 적이 있는 키커의 랭킹으로 보면 좀 더 극명하게 차이가 벌어집니다.

손흥민 - K-9 / K-14
찰하놀루 - K-5 / K-8
벨라라비 - IK-3 / IK-3
키슬링 - B / K-10

손흥민은 윙이고 찰하놀루는 공미니까 포지션의 경쟁자 수를 감안해서 순위는 대충 비슷한 수준이라고 퉁친다고 쳐도, 벨라라비와는 애초에 같은 레벨로 여겨지질 않았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10경기 이상 주전으로 나온 1군 선수 중 팀내 평점 꼴찌가 손흥민이었습니다. 그냥 10경기라고 쳐도 팬들한테 극딜당하는 수비수 뵈니쉬 말고는 손흥민의 아래가 없었습니다.


3. 손흥민은 수비와 패스만 강요당했다.
레버쿠젠의 팀컬러 자체가 극도로 좌우 폭을 좁히고 개싸움을 몰고 가서 진흙탕을 만드는 축구인데... 모든 선수가 다 압박하고 수비하고 뒤로 물러나고 합니다. 손흥민만 유별나게 수비적으로 희생한 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다 그랬다는 거죠. 그냥 느낌상 그러는 게 아니고, 스탯을 봐도 클리어런스라고 수비진영에서 공을 걷어내는 스탯 말고는 손흥민이 특출나게 공격쪽 선수들보다 나은 스탯을 기록한 게 없어요. 그리고 그 클리어런스조차 90분당 1회가 안 되는 수준이니까 기록상으로는 특출난 것도 아닌 거죠.

손흥민이 패스를 주도하는 플레이메이커로 역할이 바뀌었다는 소리도 있는데, 레버쿠젠 공격포지션 선수 중 손흥민보다 패스 숫자가 적은 건 벨라라비밖에 없습니다. 그 벨라라비는 주 역할이 드리블로 상대 측면을 파고드는 거였기 때문에 패스가 낮은 게 당연하고요. 손흥민의 높은 패스 성공률은 상대적으로 압박이 약한 측면에서 뛰면서 짧은 패스거리와 후방 위주의 패스를 시도하면서 나온 거죠. 프리킥 말고는 보잘 것 없다는 찰하놀루가 손흥민보다 키패스 더 많이 했고, 이쪽은 아예 팀 사정상 중앙미드필더로 선발출장한 적도 몇 번 있어요. 후반기에 크게 주목받은 유망주 브란트도 마찬가지라서 역시 중앙미드필더로 나오곤 했었죠.


4. 손흥민을 뺏겨서 팬들에게 욕 먹을까봐 레버쿠젠이 언론플레이를 했다.
레버쿠젠 쪽에서 일처리를 제대로 안 해서 팀내 의사소통이 잘 안 이뤄졌고, 손흥민이 무단이탈한 걸로 처음에 기사가 잘못 나왔죠. 이건 레버쿠젠이 잘못한 게 맞아요. 그런데 이걸 두고 에이스를 뺏긴 걸로 팬들에게 욕 먹을까봐 손흥민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거다...라는 얘기가 계속 나오는데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팬들은 손흥민을 뺏겼다고 분노한 게 아니라,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팔았다고 좋아했거든요(...)

독일 내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타블로이드 빌트 홈페이지에서 손흥민 이적기사 댓글 추천 1위가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고... 레버쿠젠 팬포럼인 werkself.de 들어가보면 농담하는 거 아니냐고, 손흥민한테 30m이라면 당장 팔아야 한다, 이런 반응이 주류였습니다. 현재 독일 최고의 유망주 중 하나로 꼽히는 브란트도 있으니 상관없다는 반응이 많았고요(브란트는 후반기 키커 랭킹에서 손흥민보다 위에 있었고 '96년생'입니다). 뭐 지금은 찰하놀루가 레프트윙으로 가고 치차리토가 세컨탑으로 나오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기존 선수들로 충분히 메꿀 수 있을 것이며, 오히려 팀에 도움이 되는 이적이라는 게 현지 팬들의 반응이었죠. 그나마 호의적인 게 기대치만큼 못 커서 아쉽다는 반응이었고, 오히려 '손흥민이 팀을 위해 활약한 경기는 손에 꼽을 수 있었다.' 라는 식의 디스도 있었고요. 그러니 레버쿠젠 입장에서 굳이 팬들을 상대로 읍소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죠.


5. 손흥민이 나가니까 팀이 부진하고 있다.
손흥민이 라치오와의 챔스 플레이오프 2차전을 앞두고 전력외가 되었고, 그 이전에 감기로 1경기 더 빠져서 실질적으로 손흥민 없이 치룬 경기는 6경기입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이렇습니다.

BL 하노버(A) 1:0
UCL 라치오(H) 3:0
BL 바이언(A) 0:3
BL 다름슈타트(H) 0:1
UCL 바테(H) 4:1
BL 도르트문트(A) 0:3

바이언은 현재 챔피언스리그 우승 배당 2위의 매머드 클럽이고, 이번시즌 공식경기 7전 전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르트문트는 현재 분데스리가 1위로 새벽의 레버쿠젠전 승리를 포함하여 이번시즌 공식경기 11전 전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둘 다 원정경기였고요.홈에서 다름슈타트 상대로 두들겨패놓고도 진 거 말고는 딱히 욕 먹을 이유가 없는 거죠. 다름슈타트한테 슈팅수 16:5를 기록하고도 져서 현지에서도 공격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긴 했습니다만 챔피언스리그에서 바테 상대로 전술 실험을 하면서도 대량득점에 성공했고요. 한 달쯤 지나고도 계속 골을 못 넣고 부진하다면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지금까지는 별 문제될 게 없습니다. 손흥민이 이번 시즌 개막하자마자 골을 몰아넣고 그랬으면 모르겠는데 2경기 나와서 평점 4점, 5점이었고 둘 다 팀내 최저평점이었죠(4점 받은 경기는 찰하놀루와 동률).



손흥민이 토트넘에서 데뷔했을 때 반응을 보니까 재밌더라고요. 손흥민은 독일에서 뛸 때랑 비슷하게 플레이했습니다. 굳이 따지면 레버쿠젠에서 부진한 날의 경기력과 비슷한 수준이었죠. 다만 그 양상이라는 게 레버쿠젠에서 경기하는 거 봤으면 딱히 새로울 것도 없었던 경기였는데... 싸커라인 같은 곳에서는 손흥민 왜 저렇게 답답하게 움직이냐고, 오프 더 볼 엉망이라고, 왜 자꾸 중앙만 노리냐고 별 얘기가 다 나왔죠. 어제의 골도 마찬가지인데, 손흥민 골 넣는 거 보면 많이 그랬어요. 역습 상황에서 옆에 동료들이 같이 달려서 수비수들이 손흥민만 집중적으로 노릴 수 없는 상황이고, 오프사이드 라인 걸치는 간당간당한 최전방이 아니라 공 받기 좋은 넓은 미드필드에서 공을 받은 다음에 빠른 주력을 앞세워서 '치달'하는 그림이었죠. 그리고 일단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가면 거기서 뛰어난 슈팅스킬로 골을 넣는, 아주 전형적인 패턴이었는데 마치 그런 플레이 처음 본 것처럼 놀라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애초에 그거 하라고 데려간 선수인 거고, 저런 식으로 골을 넣으니까 최전방으로는 물음표가 달리고 2선 측면이 낫다는 건데 이제는 이해하려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분데스리가는 일정상 우리나라에서 경기 보기 쉬운 리그인데 달리 말하면 EPL과 겹친다는 소리거든요. 그래서 EPL을 보느라 분데스리가 경기를 많이 안 보는 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에요. 실제로 인기가 많지 않으니까요. 다만 경기를 보지도 않은 듯한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좀 답답하긴 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게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봤을 챔피언스리그 16강 ATM전 때문인 거 같거든요. 지금 손흥민에 대한 인식, 그러니까 후반에 교체당하고, 수비라인까지 내려와서 수비하고, 팀 전술에 녹아들지 못하고, 뭐 그런 게 다 저 경기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그래서 분데스리가는 안 보고 챔피언스리그를 보고 선입견이 생긴 다음 그게 재확산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들이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굳어질 것이고, 지단이 1998월드컵에서 버스를 탔다느니, 2006월드컵에서 리켈메 빼서 아르헨티나가 망했느니, 이런 식으로 지워지지 않을 왜곡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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