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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0/27 14:52:48 |
Name | 심해냉장고 |
Subject | 어느 과학적인 하루 |
역시 더는 손님이 없겠지 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잔치가 끝난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탄이라고 해도 좋고 예언이라고 해도 좋고 예측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편견이라거나 귀납적 추리 같은 용어를 사용해봐도 좋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간간히 비가 떨어지는 어느 평일의 새벽 한시의 텅 빈 맥주집에 손님이 올 확률이라는 건 퇴근길에 우연히 시체와 스쳐갈 확률과 대충 비슷할 것이다. 이는 다년간의 양적 자료에 기반한 과학적인 추론이다. 아버지를 거는 건 좀 그렇겠지만 아버지의 이름 정도는 걸어볼 수 있다. 역시 더 이상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테이블 정리가 대충 끝나자 타이밍 좋게 걸어둔 노래의 플레이리스트도 끝나고 말았다. 이제는 인공지능이 골라주는 모르는 노래들이 나올 차례다. 모든 게 딱딱 맞는 타이밍에 기뻐하며 타이밍 좋게 바로 지금 문을 닫고 퇴근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나는 쓰레기를 분류하고, 직원은 설거지를 시작하고, 인공지능은 모르는 노래를 골라 연주하기 시작한다. 미리 마감 정리를 전부 해 둔 채로, 두시가 되자마자 칼같이 문을 닫고 퇴근할 것이다 나는. 그거면 그거대로 좋은 일이다. 첫 노래는 오늘의 플레이리스트에 넣지는 않았지만 가끔 듣곤 하는 노래였다. 나쁘지 않군. 그리고 아는 노래와 모르는 노래 두어 곡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마감 정리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온 모르는 노래 한 곡이 너무 좋았다. 뭐지 이거는, 오. 하며 직원을 보니 직원도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별로인 모르는 노래가 나왔다. 일시 정지를 누르고, 하이네켄 두 병을 따서 한 병을 직원에게 내밀며 말했다. 방금 그거 노래 너무 좋지 않아요? 저도 그 생각 하고 있었어요. 다시 들어볼까요. 노래 너무 좋은데. 뭐지. 전혀 모르는 밴드의 전혀 모르는 노래다. never young beach의 やさしいままで. 상냥한 채로? 정도일까. 밴드 이름이나 곡명이나 무슨 1970년대스러운 느낌이다. 밴드를 찍고 추천곡 리스트를 플레이한다. 뭐야. 다른 곡들도 다 좋은데. 뭐하는 놈들이야 이거는. 관련 자료를 찾아본다. 한국어 자료라고는 펜타포트인가 뭔가로 한번 국내에 왔었다는 거 말고는 아무 자료도 없는 밴드다. 일본 위키를 검색해봐도 별 내용이 없다. 2014년에 홈레코딩으로 출발, 올해 슬슬 메이저 데뷔를 준비하며 초기 멤버 중 하나가 이탈. 아까 들은 노래는 영화 OST였다. 그래, 역시 인디피플의 오버그라운드 데뷔란 영화 OST만한게 없지. 홈레코딩으로 출발, 메이저로 기어나오며 영화 OST를 작업하는 밴드라는 존재는 3열 종대로 세우면 현해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별 거 없다. 그래, 그래서 보컬은 뭐하는 놈이지. 뭐야 왜 자료가 한줄밖에 없어. 90년생, 세타가야 출신. 뭐시기 씨의 동생. 어린노무쉐끼가 대단하네 이거. 뭐하는 놈인지 궁금한데. 자료 목록 제2번, 세타가야. 세타가야라, 거기 엄청 잘사는 동네 아닌가, 하며 구글에 세타가야를 검색하니 연관검색어로 부촌이 뜬다. 뭐, 잘 사는 집안 출신의 인디밴드라고 해서 흥미가 짜게 식거나 할 나이 혹은 시대는 애저녁에 지났다. 음악이 좋으면 되는 거지. 하지만 이거는 목소리에 너무 진정성이 넘치는데. 부촌 출신의 어린노무쉐끼에게 나올 수가 없는 진정성인데 대체 어디서 나오는 진정성이지. 하고 보컬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그 진정성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내면의 가창력과 예술혼이 활활 불타오른 덕에 그 영혼이 담긴 육체라는 용기가 조금 쭈그러들고야 만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가창력 원자폭탄급 외모이신데 이 분. 그러면 형이라는 뭐시기 씨로 넘어가 볼까. 타카하시 잇세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열 살 차이의 미남이다. 누가 봐도 형쪽이 90년생인 거 같고 가수분께서 80년에 태어나신 것 같다. 타 카 하 시 잇 세 이 한국어로 검색을 해 보니 어라 한국어 자료도 나온다 나무위키 만세. 꽤 유명한 잘나가는 배우인 거 같다. 사진을 보며 우리는 잘나가는 미남 배우를 형으로 둔 못생긴 인디밴드 보컬(올해 오버그라운드로 진출하며 밴드 초기멤버가 이탈함)의 어떤 그림같은 삶에 대해 망상의 나래, 아니 유물론적 사고를 펼쳐갔다. '형은 차여 보긴 했어? 형이 사랑을 알아?' '밴드를 그만두겠다고? 우리의 꿈이 이 정도밖에 안 되었던거야? 더 노래하고 싶지 않아?' 뭐 이런 대사를 읊으며. 이것은 이를테면 뭐랄까 편견이라고 하기에는 예측이나 합리적 추리, 혹은 과학적 추론의 영역일 것이다. 아니 잠깐 그런데 배우라고? 야 얘들 오버데뷔곡 그거 형 영화에 묻어간거 아냐? 우리는 또다시 과학의 힘을 빌렸고, 과학적 추론은 우리에게 힘을 주었다. 「로맨드 돌」 타카하시 잇세이 / 아오이 유우 주연 '야 OST 쓸만한 놈 좀 없냐? 아 머리아프네 이거' '감독님 제가 집에서 노는 동생놈이 하나 있는데 노래는 진짜 끝내줍니다. 저 믿고 한번 써보십시오. 콜?' '어 그래? 콜.' 우리는 이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또한 다분히 과학적 추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혹은, 애초에 세타가야 부촌 출신이라면, 영화 자체가 아빠나 엄마 회사에서 투자한 프로젝트일지도 모른다. '야 이 새끼야 형은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너도 집에서 쳐놀지만 말고 나가서 일좀 해. 이번에 형 영화 하나 또 하니까 나와서 그거나 좀 도와라.' 뭐 어느 쪽이건. 뭐. '사장님 근데, 왜 얘네 성이 다르죠?' '어 그러게요. 왜 형은 타카하시고 동생은 아베지. 예명인가.' '아버지가 여러명 아니에요? 그정도는 되야 나올 그루브인데.' '아버지가 여러명인가? 하긴, 그정도는 되어야 나올 그루브는 맞는데' 옆으로 치워둔 타카하시 잇세이의 정보를 쭉 내려본다. 어머니는 배우였고 어머니를 따라 연기에 입문했다. 어머니가 배우이신 부촌에 사는 미남이라면 아버지도 미남 배우거나 일반 남성(백억대 자산가)이거나 그렇겠군. 쭉쭉 내려본다. 여담 항목에서 결국 답을 찾았다. 「5남매의 장남. 아래 셋은 모두 아버지가 다르고, 셋째는 현재 밴드를 하고 있다」 역시 과학은 배신하지 않고 우리는 마치 핵분열을 처음으로 성공시킨 과학자들처럼 비명을 질렀다. 와우. 처음 들은 노래나 한번 다시 듣고 이제 슬슬 갑시다. 우연히 찾은 괜찮은 밴드를 둔 수다쇼는 그렇게 막을 내려갔다. 이미 시간은 두 시를 좀 넘겼지만, 예상대로 손님은 더 오지 않았다. 아, 사장님 이거 아까 제목이 뭐라고 했죠? 음. やさしいままで. 상냥한 채로? 친절한 채로? 뭐 그런 뜻일껄요. 직원은 노래를 들으며 이야기했다. 야 이거 백퍼 그런 노래다. 프렌드존에서 왔다갔다하다 떨쳐져나간 찐따의 노래. 아니 제목이랑 목소리만 들어도 제가 일본어 하나도 몰라도 이건 그런 노래일 수 밖에 없어 이거는. 목소리가 말을 걸고 있어. 이거는 그런 노래야. 백프로야. 직원은 그렇게 호언장담하고 나는 가사를 찾아보았다. -- 그러니까 그대의 부드러움을 나는 알고 있어. 해가 드는 따뜻한 곳에서 추억하고 있어. 문득 알게 되었어. 그 다정함. 이제 와서 말이야. 갑자기 비를 맞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깨를 맞대면 그건 그거대로 좋았고 왠지 행복했었어. 닿을 수 있는 이 시간도 언젠가는 끝나지. 싫었던 점도 좋았던 점도 다 좋았는데 오늘은 왠지 그런 게 생각나버렸어 말로 한다면 간단하고 곤란하겠지 허풍을 떨다간 웃음거리가 될 테고 눈을 감으면 언제나 그곳에 당신은 상냥한 채로 있는데. -- 뭐야 이거 봐봐요 이거 지금 얘가 한거라곤 어깨를 맞대고 닿은 거 밖에 없어. 이거 연애 아니야 이거. 이거 그냥 아는 여자애가 웃어주고 우산씌워준거가지고 혼자 망상하고 있는 거잖아요. 백프로지 이거는. 하여간 찐따놈들한테는 웃어주면 안돼. 비오면 우산 씌워주면 안돼. 이런 놈들이 눈을 감은 채 상냥한 채로 있는 여자애 상상하다가 스토커 되고 그러는거야 이거 이거는. 역시 아무래도 그런 거 같죠? 백프로라니까요 이건. 우리는 그렇게 실없는 농담을 하며 문을 닫고 퇴근했다. 역시 손님 같은 건 더 오지 않았다. 비는 그쳤지만 새벽의 상점가란 조용했다. 걷고 걸어 집으로 향한다. 갑자기 다시 또 비가 내린다. 이런, 우산을 가져올걸 그랬나. 투덜대며 그렇게 걷고 걸어 동네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런데 동네는 붐비고 있었다. 여러 개의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 막다른 골목에 있는 집으로 이사온 지 오 년은 되었는데, 최근 5년간 마주하게 된 제일 시끄러운 골목이었다. 아니다. 시끄러운, 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은 많았지만, 조용했다. 과학수사대, 라고 써 있는 옷을 입은 사람들과 특수청소, 라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일군의 사람들을 헤치며 지나가는 내 옆으로 꽁꽁 싸맨 들것이 스쳐가 차에 실린다. 무슨 일이야. 라고 생각하고 있자니 차의 운전수가 묻는다. 대로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아 저기서 좌회전, 편의점 앞에서 우회전 하면 나가져요. 그런데 이거 무슨 일이죠. 목을 맸어요. 차였다나봐요. 운전수는 나의 질문에 시크하게 대답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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