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1/01/17 12:40:14수정됨 |
Name | 간로 |
Subject | 홍콩의 화양연화4 -질서와 욕망의 변주 |
香港的 花樣年華 자기[己]를 이겨내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 (…)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공자, ‘논어’- 홍콩은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적이 없다. 항상 스스로의 욕망이 아니라 주변의 질서가 그들을 규정했다. 탄생부터가 영국과 청나라(중국) 간의 아편전쟁의 산물이었다. 이후 짧았던 일본의 점령도, 그리고 다시 영국의 통치가 돌아오는 과정도 모두 중일전쟁, 2차대전이라는 거대한 국제질서의 재편 속에서 이루어진 일일뿐이었다. 영국의 통치도 딱히 민주적이라 부르기는 어려웠다. 어디까지나 정책은 영국이 임명한 총독에 의해 이루어졌고 홍콩의 민의에 의한다는 원칙은 영국의 통치원리에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민의가 반영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제정세와 지배세력의 허락 하에서만 그러했다. 67폭동과 이후의 영-중 간의 체제경쟁으로 인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에 대한 개혁 조치가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홍콩인에게 정치질서란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홍콩반환도 홍콩인들의 욕망과는 철저히 유리된 외적인 국제‘질서’에 의해 결정되었듯이. 둘의 관계는 역할놀이와 함께 시작한다.(뒤에서 논하겠지만, 기존의 결혼에 충실했었다는 점에서 둘은 사회가 부여한 role에 따라 움직이는 역할놀이에 이미 익숙한 사람이기도 하다.) 둘의 관계가 시작되는 광경에서 려진은 상대 남편/부인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지 궁금해한다. 그에 대해서 답을 찾으려 하는 과정이 둘이 함께한 최초의 역할놀이다. 둘은 남녀 중 누가 먼저 주도적으로 나섰을지 각각의 경우에 대해서 바람이 난 각자의 결혼상대방을 연기한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걸 모른다는 식으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는 설명을 시도한다. 이미 일어났기에 거스를 수 없는 사태이고 그래야 그걸 긍정하기가 더 쉬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 수 있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어떤식으로는 설명이라도, 아니면 상상으로라도 그 빈틈을 메꾸고 싶어한다. 이런 첫번째의 역할놀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둘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둘은 시작조차도 욕망을 정면으로 내보이는것이 아니라 역할놀이를 통해서만이 내보일 수 있는 인간이다. 거리낄 것 없이 자신의 욕망을 내보이는 모운의 친구 아병이나 비서에게 대놓고 자신의 불륜을 숨기는 조치를 요구하는 려진의 직장사장 하 선생과는 정말 다른 두 사람인 것이다. 혹은 캐릭터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식으로서만 욕망을 내보일 수 있는게 그들의 운명인지도. 려진은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든 규명하려 들었다면, 모운은 그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지에 대해서 조금 더 방점을 두는 인간이다. 그런 시도가 무협소설을 다시 쓰려는 시도다. 그들은 결혼을 통하여 욕망을 잃어버리고 그저 결혼이라 하는 질서에 편입된 것이다. 개인을 잃어버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들은 결혼 전에 영화를 좋아하고 무협소설을 즐겼던 꽤 뚜렷한 개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개인성은 무엇보다도 문화예술을 즐기는 특성에서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고도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사회가 약속한 결혼의 이상적 비전은 깨어져 버렸고, 더 이상 결혼에 충실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둘의 태도는 조금 다른데, 배우자의 배신에 번민하며 결혼을 통해 잃은 자유에 대해서 토로하는 려진과는 달리, 모운은 일단 그 상황하에서 번민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다. 번민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꿈을 꿈꾸어보고 그 여정에 려진도 동행하기를 권한다. 일단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니까. 그런 상황하에서 글을 쓰며 려진과 더 가까워질 구실을 만드는 것은 한편으로 그 결혼질서에 편입된 상황하에서 실현할 수 있을 욕망에 충실한 일이기도 하다. 즉, 질서로부터 고통받는 상황에 계속 괴로워하기보다는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개인성/욕망을 반추해보는 것이다. 둘의 두번째 역할놀이는 모운이 글을 쓰는 장소, 2046호에서 일어난다. 함께 글을 쓰며 만난 밀회에서 많이 가까워진 두 사람은 갑자기 려진이 남편에게 바람피는 것 아니냐고 추궁하는 걸 미리 연기해본다. 앞서의 첫째 역할놀이가 해명/규명을 위한, 근본적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향한 해석의 시도였다면 2046호에서의 역할놀이는 ‘연습’에 가깝다. 이어진 두번째 ‘연습’에서 모운은 연기를 통해 곧바로 자신이 만나는 사람이 있음을 단번에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려진은 남편이 실제로 그렇게 담담히 불륜을 인정할 상황이 갑자기 다가와서 그러는 것일까? 둘의 로맨스가 펼쳐지는 새빨간 밀회의 장소임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욕망의 공간, 그곳에서 욕망의 상대방은 남편이 아닐 것이다. 바로 자기 앞의 모운. 이 두번째 역할놀이에서 모운이 다른 여자가 있다는 말은 한 차원에서는 려진의 남편의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운 스스로의 말이기도 하다. 다른 여자, 당신말고 부인이 있어요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이 말을 결혼질서라는 범주를 써서 환원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사회적인 질서 하에서 공인받은 관계인 결혼, 다른 여자인 부인이 있어요.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들이 아무리 다시금 결혼 이전의 개인이었을 때처럼 노래도 부르고 문화예술을 즐기며 무협소설을 함께 써내려간다 하더라도 그들의 밖에는 사회질서라는 엄중한 현실[결혼]이 그들을 규정짓고 있다. 결국 그들은 누군가의 남편이고 부인인 것이다. 이 사실을 려진은 자각한 것이다. 려진은 아마 최초로 그들 관계의 운명[헤어짐]을 느낀 것이기도 하리라. 그리고 그 운명은 사회질서가 부여한다. 그리고 그 순간 역할놀이는 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상대방을 상대로 이뤄진게 된다. 남편이 아니라 자기 바로 앞의 모운을 향한. 여기서 연기의 인물과 실제 인물은 겹쳐있고 이제 역할놀이는 상대의 남편/부인이 아니라 실제 인물인 모운, 려진 스스로로 전환된다. 마지막 역할놀이가 그러하다. 둘의 관계는 주변 사람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시선과 마주한다. 려진은 이런 사회에 대해 대놓고 욕망을 드러내길 항상 주저하는 여자다. 이런 여자에게 집주인의 지적이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역시나 려진은 이후로 모운과의 만남을 멀리하고 다시금 결혼한 부인이라는 사회적 질서에 따르는 태도를 취한다. 원래처럼 집에 머물며 집주인의 행사에 끼기도 하고. 욕망보다는 사회적 질서에 다시 따라가려 한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그렇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당시는 60년대 홍콩이고 이웃이 얼마든지 서로의 행실을 지적할 수도 있는 엄격한 분위기이기도 했다. 특히 불륜같은 문제에서야 더더욱. [엄중한 사회적 분위기가 억누른 만큼이나 만연한 개인의 욕망도 여기저기서 내비쳐지고 있다. 당장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불륜은 주인공을 포함해 3커플이나 등장한다. 주인공의 남편/부인에다가 려진의 사장도 부인 외의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나는 모습이 드러난다. 여기에 사창가를 드나드는 모운의 친구인 아병의 모습까지도. 사회적 질서가 강고한만큼 그에 대한 개인의 욕망도 강렬하게 그 질서에 빈틈을 드러낸다.] 모운은 마침내 이 관계의 운명에 대해서 자각한듯 하다. 그리고 마침내 둘의 끝을 두고 연습에 들어간다. 둘의 욕망을 끝내고 엄중한 질서의 세계로 귀환해야 할 그 운명 말이다. 이별연습을 해봅시다. 혹은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욕망[개인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혼이라는 사회질서[사회]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어. 그게 어떠할지 아직 알 수 없으니 미리 연습을 해보자며. 여기서의 역할놀이란 아직 알 수 없는 사태를 미리 체험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마음으로 대할지도. 그리고 마지막, 이별연습이 나온다. 이들은 더 이상 상대의 배우자를 연기하지 않는다. 려진은 그들의 관계의 끝을 추체험하고나서야 비로소 이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을 시간임을 비로소 온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실은 둘의 그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이었는지를. 예정된 이별에 대한 연습은 실제 이별에 대해 무너져내리는 마음으로 터져나온다.[로맨스가 시작되던 처음과 이별연습을 하던 끝에서 둘의 복장이 같다.] 요즘 세상에 그 흔한 키스신도 하나 없는 로맨스 영화임에도 어느 영화보다도 화양연화가 로맨틱한 이유는 이 팽팽한 긴장감과 끝이라는 운명앞에서 마침내 터져나오는 이 감정 때문일 것이다. 이후 려진은 정말 과감하게도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로 개인으로서의 자기 욕망과 사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놓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어차피 끝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끝이 예정되어 있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더욱 소중하겠는가. 이 지나가버린 시절이 아름다운 화양연화임을 둘도 뚜렷이 자각한다. 그 끝을 추체험하고 나서야. 둘의 관계는 결혼이라는 사회질서와 로맨스라는 개인의 욕망 사이의 팽팽한 줄타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려진 때문에라도 싱가포르로 떠나려 하는 모운의 선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홍콩의 현실은 그런 욕망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려진의 말처럼 그들은 희망이 없다. 홍콩이라는 곳은 욕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질서에 따를 운명이니까. 국제질서 하에서 홍콩이라는 단위는 스스로의 욕망대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탄생부터가 그러했으니까. 모운과 려진이 결코 이뤄질 수 없고 질서로 귀환해야만 했듯이 홍콩의 운명이란 결국 그 엄중한 질서에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감정을 가지고 그 곳을 바라보게 하는 것인지도. 그렇기에 이전의 홍콩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이었는지를 비로소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인지도. 려진의 북받쳐 오르는 눈물처럼 말이다. <센트럴에서 바다쪽으로 나오면 있는 골든보히니아 광장. 홍콩의 중국 ‘반환’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주로 중국본토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오성홍기가 휘날리고 있다.> 홍콩의 반환과 그 홍콩의 끝일 2046이라는 운명은 이 모운과 려진의 헤어질 운명과도 닮아있다. 그렇지만 모운을 통해 왕가위는 이렇게도 말하는듯하다. 번민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만 괴로워하지만 말고 일단 이 상황에서 내가 하고 싶은걸 하자. 무협소설을 쓰듯, 그렇게 영화를… 여담 - 안녕, 언젠가 이재한 감독의 사요나라 이츠카에는 러브레터의 나카야마 미호가 나온다. 남녀주인공은 모두 일본인이지만 둘의 욕망의 장소는 일본 밖의 태국이다. 남자 주인공에게는 일본에 두고온 약혼녀가 있다. 그리고 전통적 일본사회가 그러하듯 그 약혼은 집안의 정혼에 의한 것이다. 일본은 결혼이라는 사회질서의 세계이고, 개인적인 욕망은 그 사회에서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사회에서 벗어난 열정과 욕망이란 일본에서는 허락되지 않는듯 하다. 여기서 묘사된 일본은 사회에 온전히 박제되어 욕망이라는 개인성을 잃어버린 사람들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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