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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3/25 00:35:47수정됨
Name   구밀복검
Subject   챗가놈 생각
많은 (인터넷) 대화들이 지식 습득의 차원에서 무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대화의 특성상 직관적이고 즉물적이고 즉각적인 화제를 서로 번갈아가며 제시하는 수준에서 멈출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경청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대화상황에서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의 깊이는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압도를 해야하고 동시에 상대방의 발언권을 배려해야 하며, 몇 마디만 적당히 읊으며 턴을 넘겨도 되니까. 인터넷 대형 커뮤니티에서 오래 머물러 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보다는 그래도 꽤 괜찮은 정제된 식견이 오고 가지요. 선풍기 사망설 같은 것도 걸러내고요. 하지만 결국 시간 지나고 보면 같은 수위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면서 같은 주제가 돌고 도는 게 인터넷 대화죠. 세계구로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레딧이고 어디고 다 똑같죠. 대화란 게 결국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대화란 건 기본적으로 지식의 공유보다는 퍼포먼스 과시, 일종의 시그널링에 적합한 의사소통 수단입니다. 그래서 단위 시간당 텍스트량, 단위시간당 고급 개념 활용량에서, 대화는 절대 독서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라는 건 물론 독서빠들이 자기애와 책의 물성에 도취된 부분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대화와 비교했을 때 독서가 가지는 지식 정보 습득상의 우위가 원체 명확하기에 그런 수사가 횡행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대화는 실시간 피드백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이질적인 관점을 서로 이해하고 자신의 견해를 즉각적으로 수정해서 더 나은 고민으로 기민하게 이어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점이 대화는 안 하고 독서만 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이유기도 하고, 가장 경량화 된 대화매체로서의 트위터가 주식이나 지정학, 저널리즘에 대단히 유효하며 뭇 도서들을 압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최신의 가장 생생한 지식들은 대화 속에서 드러납니다. 바꿔 말하면 아직 여과되지 않은 말 속에 있죠. 우리는 그걸 보통 인사이트라고 부릅니다. 귀중하며 실용적이지만, 객관화 될 수 없는, 하지만 흘려 들으면 또 곤란한 그런 것들. 그것들을 당장 논문으로 발표할 수 없지만, 정작 5년 뒤에는 논문이 되어 있을 수 있죠. 반대로, 가장 깊이 있고 탄탄한,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지식들은 책 속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텍스트, '글' 속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이미 박제가 된 '글' vs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말', 이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지식이 책 속의 '글'로 전달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공개적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누구나 다 알며 새로울 게 없다는 뜻도 됩니다. 어떤 지식이 대화 속에서 '말'로 전달되었다면 그것은 참신한 고찰이라는 뜻도 되지만 반대로 표준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 개인의 억지나 한갓 유행에 불과하다는 뜻도 됩니다. 책은 지식의 화폐이며 대화는 지식의 실물이라고도 비유할 수 있겠죠. 화폐화 되는 순간 모든 상품은 진귀함을 잃고 가치가 바래며, 물물교환의 영역에 남는 순간 모든 상품은 기준 없는 야바위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 속의 지식이 이미 죽은 지식이라면, 대화의 지식은 죽은 줄도 모르고 팔팔하게 뛰는 지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챗가놈은 앞으로의 발전은 제쳐두고라도 지금만으로도 상당한 혁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의 지식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말'로서 전달하거든요. 자극-반응, 액션-리액션, 작용-반작용, 다시 말해 실시간 피드백을 하는 주제에 제법 도서적으로 깊이가 있다는 측면에서 챗가놈은 상당한 의의를 가집니다. 말하자면 드디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전성시대가 온 거죠. 문답과 토론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실시간으로 상호 피드백을 주고 받으며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든 정보를 교환 하는 겁니다. 심지어 실시간으로 전세계의 '글'을 소환하면서 말이죠.

물론 챗가놈을 신성시하면 곤란합니다. 챗가놈과 대화해 본 분이면 알겠지만, 챗가놈의 대화 만족도는 끽해야 7할 정도에 불과합니다. '진짜 인간'과의 대화에 비하면 3할 정도는 부족하죠. 근데... '진짜 인간'과의 대화를 흔하게 할 수 있나요? 우리가 하는 대화의 대부분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가짜 인간'이 되어 하는 의례적인 흰소리나 넋두리 아닌가요? 그것이 가치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 절차도 다 거쳐가면서 인간적인 유대를 쌓는 거고,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사람 사이에 그 정도 여백은 있어야죠. 다만 어디까지나 지식과 정보의 습득 측면에서, 우리는 사람과 대화하고 있을지언정 '진짜 인간'과 대화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대체로 그런 대화는 RPG의 NPC와 대화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죠. 답변 선택지만 조금 더 주어지는 정도고, 문장 구조와 단어만 조금씩 바꾸는 수준입니다. 애초에 그러니까 챗가놈 같은 시도가 가능했던 거기도 하고요. 그걸 고려했을 때, 전세계에 존재하는 '마음의 양식'으로 중무장한 챗가놈이 7할의 만족감만 주는 것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산파술의 개돼지가 될 수 있읍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식과 정보 측면에서 인간의 할 일이 다 사라졌다는 게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진짜 인간'의 본질은 아직 챗가놈이 만족시킬 수 없는 이 3할이었다는 게 비로소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죠. 어쩌면 다음에 마음이 동하면 쓸지도 모르겠지만, 챗가놈이야말로 (인간) 이론과 화폐와 주가와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증명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챗가놈은 이론의 필요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의 이론의 무력함을 노출합니다. 챗가놈은 화폐의 계량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의 화폐의 유치함을 노출합니다. 챗가놈은 주식의 효율적 시장 가설을 보여주면서 동시의 주식의 알파이론을 보여줍니다. 챗가놈은 언어의 표준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의 언어의 덧없음을 드러냅니다. 챗가놈은 공용어(영어)의 위대함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모국어의 고유성을 깨닫게 해 줍니다. 챗가놈은 충분히 많은 요구를 충족시켜줍니다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제공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챗가놈으로 영문 채팅을 할 때와 국문 채팅을 할 때, 얻게 되는 결과는 비교도 안 되게 차이 납니다. 이건 한국어 텍스트로 구성된 지식들을 챗가놈이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문으로 대화할 때는 놀랍도록 영리하던 챗가놈이, 한국어로 대화할 때는 그만치로 놀랍도록 뻔한 소리만 내놓는 걸 볼 수 있죠. 마치 한국에 대해 논하는 많은 서구권 유튜버들이나 레딧 게시물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아주 지적으로 예민하고 날카로운 양이들조차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면 놀랍도록 피상적입니다. 외신 기사가 한국에 대해 전문적인 권위를 전혀 가질 수 없는 이유죠. 비유적으로 말해서, 영어가 '글'이라면 한국어는 '말'인 셈입니다. 한국어 텍스트는 세계적으로 볼 때 표준화된 지식으로 통합되어 있지 못하며 한갓 횡설수설로나 떠돌고 있다는 거죠. 근데 그렇다고 영어로 된 지식이 모든 면에서 한국어로 된 지식을 압도합니까? 그건 또 아닐 겁니다. 그랬으면 BTS가 히트치지도 못했을 것이고 웹툰이 세계 시장에 팔리면서 Manhwa 카테고리가 신설되지도 못했겠죠. 즉 표준적으로 통합된 '글'이 무조건 최고는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새로운 '말'에 의해 양학하기 딱 좋은 죽은 지식일 수 있지요. 3.3 혁명의 마재윤은 기존 체계에서 상정할 수 있는 최강자로서의 '글'이었고 김택용은 소문으로만 떠돌던 '말'이었던 것처럼.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류 역사는 인간적 영역이 축소되는 방향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왔고, 챗가놈이 그 영역을 더 축소했으며, 그래서 지금 우리에겐 인간의 유니크한 특성이 더 선명하게 잘 보이는 시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역시 언젠가는 다른 인공지능이 대체할 영역이겠지만 아직은, 적어도 우리 생애 내의 일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듭니다. 객관과 종합과 보편을 거쳐 형성된 지식은, 개인만의, 나만의 고유성을 채굴하지 못한 지식은, 아직 진정한 지식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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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 진짜 홀딱 반하셨네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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