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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4/14 10:29:48
Name   서포트벡터
Subject   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5. 검열의 시대, KBS의 고뇌
<"악의 테마 그리고 후회" 입니다. 뭐 꼭 나쁜 사람 나올때 나오는 음악은 아니구요, 작중에서 리나가 "천사소녀 네티가 누군지 알려줄까"라고 묻는다든가, 최종화에서 네티의 머리가 풀릴때 라든지 이런 위기 상황에 자주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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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는 사회 환경이 바뀌면서 창작 활동에 거의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이미 길들여져 있었다.
틀에 박히고 딱딱해진 창작 욕구를 되살리는 데 4년 이상 걸렸다.

- 허영만 "부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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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1. 원작 만화처럼 로맨스 즐기기
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2. 샐리의 짝사랑
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3. 짝사랑에 빠진 소녀의 로맨스
천사소녀 네티 덕질 백서 - 4. 동화에서 다시 현실로, 외전2편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건 1998년 부터죠. 하지만 그 전에도 우리가 알게모르게 수많은 아동용 일본 만화영화들이 우리나라에 수입이 됐었고, 천사소녀 네티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만화가 우리나라에 처음 방영된 건 1996년입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이고, 따라서 로컬라이징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어느정도의 검열이 있었습니다.

뭐 등장인물이나 지명을 개명하거나 국적색을 줄이는 정도는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고 아동물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마찬가지라 별다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1996년의 검열은 이정도로 끝나지 않죠. 왜색 등에 대해서 공식적 검열 뿐만 아니라 여론으로 인한 검열, KBS의 알아서 기는 자체적인 검열 태도 등도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사소녀 네티(일본명: 괴도 세인트 테일)은 일본에서는 아사히 TV에서 1995년 10월부터 1996년 9월까지, 우리나라에서는 KBS에서 그 직후인 1996년 12월에서 97년 2월까지 방영됐습니다. 투니버스에서도 KBS버전을 1998년에 한번, 그리고 그 이후에 몇번 더 재방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검열 문제로 인해 잘린 회차가 있고, 약간의 내용 변경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KBS판이 일본판과 어떻게 다른지, KBS의 검열 방향은 어떠했는지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뭐 당시 KBS나 우리나라 사회상을 각잡고 비판하려는 거는 절대 아니구요, 그냥 이렇게 달랐더라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KBS판이라는 것 자체도 그런 시대상까지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모든 내용을 정리하기는 힘들고, 제가 인지하고 있는 내용 위주이니 다른 내용 아시는 분들은 더 말씀해 주시면 좋겠네요. 뭐 꼭 검열 뿐만 아니라 문화적 차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바뀐 것들도 있습니다.

정리하다가 예고장 내용은 길어져서 아예 따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1. 아예 방영이 되지 않은 회차들

일본에서 방영된 회차 중 아예 방영되지 않은 회차가 4개 있습니다. 군고구마 대추적은 정식 에피소드가 아니니 3개라고 보는게 정확하긴 합니다.

1) 2화 외전 "군고구마 대추적"


2화가 끝나고 짧게 방영된 외전입니다. 주인공들이 SD캐릭터로 나오는 소소한 에피소드죠. 여기서 세인트가 샐리에게 고구마 심부름을 어거지로 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편이 아니라서일수도 있고, 왜색 때문일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고장같은 중요한 것도 잘랐는데 뭐 군고구마 정도야.

2) 4화 "면사포가 제일 싫어"

<세인트는 이 회차에서 이미 샐리의 마음이 셜록스한테 가 있는걸 알고 있습니다.>

KBS판 기준으로는 대략 3화(고슴도치 루비)와 5화(인형도둑) 사이에서인데, 원작 기준으로 4화(화이트 크리스마스) 보다 한 회차 빠릅니다. 우리나라에서 방영한다면 4화가 되었을 겁니다.

셜록스의 얼굴에 샐리가 예고장을 써놓고 가는데, 회차 내내 셜록스가 세수를 하지 않고(...) 얼굴에 일본어를 써 놓고 다니기 때문에 편집의 한계상 방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집에까지 와서 얼굴에 예고장을 써 놓고 가다니, 샐리 누님 대단하네요.

<이렇게 회차 내내 셜록스 얼굴에 일본어가 써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한 셜록스를 좋아하는 여학생(일본판 이름은 사야카, 만화 기준으로 엔젤카 라는 이름입니다.)이 나중에 KBS판 11화(축제 대소동)에서 "딱 한 컷"밖에 등장하지 않아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습니다. 아마 KBS판으로만 보셨던 분들은 11화에 이 여학생이 샐리의 회상에 한 컷 나타났을때 "쟤는 누구지" 싶긴 했을거에요. 샐리가 이 여학생한테 질투를 느끼면서 셜록스에 대한 마음이 커지는 것이 묘사되는 의미 있는 내용이긴 한데, 이게 4화를 땡겨오면서 어느정도 해결이 됐고, 이후로도 비슷한 묘사는 줄기차게 나와서 다행입니다.

<11화에 이렇게 딱 한컷 등장합니다. 자르기 귀찮았나봐요.>

3) 33화 "소녀 검사의 바람! 명도를 훔쳐라!"

KBS판 기준으로 31화(운동화를 찾아라)와 32화(애마뷰티) 사이의 회차입니다.


"소녀 검사" 라는 단어부터 알 수 있지만 회차 전체에 검객이 나오고 닌자 느낌 나는 다른 괴도가 나오고 하는 식으로 왜색이 엄청 짙게 깔려있는 회차라서 통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은 회차기도 하고, 메인 스토리 라인도 아니라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아쉽진 않긴 합니다.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에피소드 중에서도 완성도가 낮은 편이라고 생각해서요.

4) 41화 "강적!? 귀여운 악마의 함정!"

KBS판 기준으로 38화(엄마의 비밀)과 39화(로즈마리의 음모) 사이의 회차입니다.

이 회차가 날아간 이유를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왜색은 아닌 것 같구요, 이런 저런 정황 상, 중학생의 연애라든지, 아니면 최면에 걸려서 절규하는 샐리의 모습이라든지, 점을 친다든지, 이런 것들이 결합된것 같긴 해요.

근데 다음화나 최종화에서는 또 최면에 걸려드는 모습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진짜로 중학생이 연애하는 모습을 컷하려고 한건가 싶기도 하구요. 래시가 점집을 열었다는 것 부터 대사에서 잘랐으니 그게 문제인가 싶기도 하네요. 메인 스토리라인이고 샐리의 강한 두려움을 묘사하는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라 이 회차가 잘려나간건 좀 아쉽습니다.

<내용이 좀 강하긴 합니다. 맘먹고 샐리 멘붕시키는 회차라서요.>

이 회차가 샐리가 멘붕에 멘붕을 거듭하는 회차라 애들 보기에 좀 내용이 쎄긴 합니다. 개인적으로 의미가 꽤 크다고 생각하는 에피소드인데, 다행히 다른 회차들 이어붙인것도 아주 말이 안 되는건 아니라서 스토리가 망가지진 않았습니다.

2. 묘하게 다른 대사들?

KBS의 검열 방향은 본작에서 로맨스의 강도를 조금 낮추고, 천사소녀 네티의 괴도 속성을 조금 더 높히려는 방향으로 짜여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고장 말투도 조금 다르고. 근데 로맨스를 올리는 방향으로 진행된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1) 리나와 셜록스의 내기 내용

리나는 샐리가 네티라는 것을 확신하고 셜록스에게 내기를 겁니다. 원작과 일본판의 내용은 "만약 샐리가 천사소녀가 아니라는게 밝혀지면, 나도 더이상 샐리를 미행하지 않겠어. 하지만 같은 인물이라면, 나(리나)랑 사귀어 줘."입니다. 이 얘길 샐리가 듣고 대체 왜 그런 내기를 했는지 엄청 신경을 쓰죠. "그런 내기가 있다면, 절대로 잡히고 싶지 않아!"라고 하면서요. 세인트가 "어머, 그럼 잡히고 싶었어요?"라면서 팩트폭력을...

KBS판에서는 "만약 샐리가 천사소녀가 아니라는게 밝혀지면, 나도 더이상 샐리를 미행하지 않겠어. 하지만 같은 인물이라면, 내가 꼭 잡고 말겠어."죠. 한마디로 네티를 나한테 넘기라는 제안으로 바뀝니다. 어쨌든 KBS판에서도 "난 말이지, 리나한테는 절대로 붙잡히고 싶진 않아!"라고 얘기하는데, 세인트가 "그럼 셜록스한텐 붙잡혀도 괜찮고?"라고 얘기하죠. 세인트 무서운 아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니!" 하지만 누님께서도 그렇게 티를 내셨으니까.>

그...사귄다는 말 한마디 빼려고 로맨스를 오히려 강화한 느낌이죠. 셜록스에게는 붙잡혀도 된다는 느낌이 생기니까요. 실제로 후에 일본판이든 KBS판이든 "난 리나한테 붙잡히긴 죽어도 싫어. 누구한테 잡혀야 한다면, 셜록스 너한테 잡히고싶어!"라고 고백을 하기 때문에, 일단 결이 맞긴 합니다. KBS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내용이죠. 애들끼리 사귀자는 말은 어떻게든 빼야 하는데 이걸 뭘로 대체해야 하나 하고 말이죠.

<천사소녀의 고백. 다른 건담 나오는 애니메이션에도 비슷한 표현 했던 여주인공이 있었던것 같은데 말이죠.>

근데 장면만 생각하면 내가 샐리를 잡겠다고 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리나의 모습이 굉장히 어색하긴 합니다.(?) 어렸을 때도 뭔가 어색하게 생각했던것 같은데 말이죠. 어쨌든 "천사소녀를 네가 잡지 못하게 하겠다"는 내용이니 넓게 보면 뭐 나름 번역자의 고뇌가 있는 내용입니다.

<본인이 천사소녀를 잡겠면서 왜 얼굴이 빨개지니?>

 2) 샐리의 "잡히는 것"에 대한 태도

23화(향수의 비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요.

<샐리에게 본격적으로 두려움이 피어나는 회차입니다.>

샐리의 꿈 속에서 셜록스에게 "여지껏 나를 속였구나!"라는 말을 들은 이후에

일본판에선 "아니야, 속인 게 아니야, 그동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것 뿐이야."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그 후에 "역시 말할 수 없어 루비. 천사소녀 네티가 나라는 걸. 절대로 말할 수 없어, 절대로 잡힐 수 없어." 정체를 들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강하게 표현하는데요.

KBS판에선 "아니야, 속인 게 아니야, 언젠간 꼭 너한테 진실을 말하려고 했었단 말이야!"라는 대사입니다. 그 후에 "천사소녀 네티가 나라는 걸, 절대 말하지 않을거야. 절대 셜록스에게 잡히지 않을 거라고."라고 하죠. 말투나 이런게 좀더 강해요. 약간 더 능동적으로 느껴지죠.


셜록스가 샐리가 넘어질 뻔한 걸 잡아주는 장면인데요, 이 장면 뒤에 샐리가 독백으로 KBS판은 "천사소녀는 너같은 애한테 잡히지 않아! 절대로 잡히지 않을거라고!"라고 합니다. 일본판의 대사는 "내가 천사소녀라는 걸 말할 수는 없어, 절대로 잡히면 안돼!"라는 대사였죠. 말투도 KBS판 쪽이 좀더 강합니다. 포커스가 일본판은 셜록스에게 가 있다면 KBS판은 천사소녀한테 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 대사도 그렇고, 은근히 네티의 "짝사랑하는 소녀"보단 "괴도"로서의 속성을, 천사소녀의 과업에 관한 의지를 강화하는 느낌을 준거죠.

그 회차 마지막 장면에서도 KBS판의 대사는 "난 아직, 셜록스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어. 할일이 많은 걸." 이라고 합니다. 일본판의 대사는 "아직은 잡힐 수는 없어...잡힐수는..."이라고 합니다. 이 에피소드 전체에서 일본판이 잡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냈다면 KBS판은 천사소녀로서의 과업에 방점을 둔 얘기죠.

참고로 원작에는 방금 말씀드린 마지막 대사가 아예 없습니다. 원작에서는 "말로는 전할 수 없어서 다른 것으로 전한다"는 내용에 방점이 찍힌 에피소드인데, 애니에서는 "정체를 알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방점이 찍혀 있거든요.

26화(샴푸 모델 경연대회)에서도 이 차이가 조금 드러납니다.

<네티가 잡힐뻔한 것 중 제일 확실한 위기였던 장면입니다.>

KBS판의 대사는 "잡히면 안 돼! 아직 잡힐 수 없어!"인데 일본판은 "말도 안 돼, 싫어할거야! 싫어하지 말아줘...안돼!"입니다. 일본판 대사가 훨씬 더 셜록스한테 큰 방점이 찍혀 있죠. 일본판에선 잡히든 말든 셜록스가 날 싫어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KBS판은 잡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반적으로 후반부의 샐리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대한 공포감을 "셜록스에게 미움받는 것에 대한 공포"에 완전하게 매몰시킨 원작/일본판에 비해 "괴도로서 잡히는 것"에 조금 더 힘을 실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당시 일본 기준으로는 형사미성년자(...)였던 샐리가 경찰한테 잡히는게 딱히 문제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3) 이 밖에 로맨스에 관련된 소소한 차이점들

<오히려 로맨스를 가속시키는 쪽으로 대사가 잡힌 장면>

5화(인형 도둑)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보면 행복해진댔어."라는 대사, 일본판에서는 "커플(カップル)끼리 보면 행복해진다고...?"입니다. 이 차이로 인해서 셜록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회차가 조금 빨라집니다. 뭐 누가 봐도 샐리가 셜록스 좋아하는 건 티 팍팍 나는 상황이라 큰 차이는 아닙니다. (일본판에선 8화 "아더의 글러브") 역시 중학생들이 커플 타령 하는건 되는건 좀 그렇다고 생각한게 아닐지 싶습니다.

7화(네티의 위기) 에피소드는 일단 눈에 보이는 연적인 리나가 등장해서인지 뉘앙스를 바꾼 대사가 좀 더 있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96년에는 이미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셜록스한테 비비적(...)대는 리나를 보면서 KBS판에서 "언제 봤다고 셜록스랑 친한척이야! 셜록스하고 난 초등학교때부터 친구였다고!"라는 말을 하죠. 하지만 누님, 누님은 국민학교 졸업하셨을 연배인데(...). 여튼 일본판 대사는 "뭐야 딱 달라붙어가지고! 뭐 맘대로 해!" 그니까 비비적대는게 꼴보기 싫다는 말인건 같긴 한데 스킨십이 연상되는 단어를 배제하기 위한 역자의 고뇌가 보이죠.

사족으로 26화(샴푸 모델 경연대회)에서 샐리 어머님은 "요즘은 국민학생들도 좋아하는 이성친구가 있다던데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죠, 그때 어른들은 다들 국민학교라고 하셨으니까 뭐. 사실 초등학교로 바뀐게 96년 1학기니까요 네네.

<아빠한테 마술 도구를 빌려와서 예고장을 준비하는 샐리>

예고장을 준비하는 샐리의 대사가 일본판은 "진짜 멋진 예고장을 보낼거라고"인데, KBS판은 "날마다 예고장 보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니까." 라는 대사로 바뀝니다. 원작 대사는 "이렇게 된 바에 비장의 예고장을 날리는 거라고!" 이 예고장이 대놓고 필살기로 보낸 러브레터인데, 그걸 컷을 했네요.

<갑자기 궁금해진게, 둘이 연애할땐 이런거 해줬을까요?>

이때 준비한 예고장은 엄청나게 공들인 하트뿅뿅 도시락입니다. KBS판에선 당연히 이건 일본어 문제로 날아갔고, 이걸 본 리나의 대사도 "괴도 치고는 상당히 사랑스러운 예고장이네."에서 "도시락에 편지까지 쓸 정도면 천사소녀랑 아주 친한가 보구나?"로 도시락에 편지를 썼다는 걸 알리는 내용으로 바뀌었죠. 뭐 내용이야 일본어니까 날린다고 치고, 그 예고장이 비장의 러브레터라는것까지 걸렀어야 됐나 싶긴 한데, 하긴 96년입니다. 수녀가 도둑질 권장한다고 뭐라 그러는 사람들이 있을 때고 길거리에서 만화책 불태우는 퍼포먼스가 있고 하던 때니까요.

8화(아더의 글러브) 에피소드에 셜록스가 샐리가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주러 다가가는데, 팔끼리 닿아서 샐리가 좀 부끄러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이 컷 됐는데, 이건 아무래도 일본어가 나오는 교과서가 보여서 컷 된거 같아요. KBS판에서도 팔이 닿아서 샐리가 부끄러워 한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15화(옛 사랑)에서 일이 끝나고 명장의 가게로 식사를 하러 간 셜록스와 샐리에게 명장이 "쬐끄만 녀석들이 벌써부터 데이트하냐?"라고 묻는데, 일본어 대사는 "오늘은 걸프렌드(ガールフレンド)랑 데이트냐?"입니다. 뭐 데이트가 더 중요하긴 하니 큰 문제는 아니지만 역시 여자친구라는 의미의 단어를 짤랐습니다.

<나중에 외전에서도 셜록스가 둔탱이 짓 해서 "루비랑 오붓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내야지"라고 하는 대사가 있죠.>

26화(샴푸 모델 경연대회) 에서,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만인의 연인을 연기하는 데이지 씨를 보며 샐리가 "저것도 못할 짓이다"라고 합니다. 이걸 보고 시무룩해진 샐리가 방에 올라가서 루비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는 루비야!"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죠. 일본판의 대사는 "데이지 씨 괴롭겠네...", "루비가 내 연인(恋人, 코이비토)이네?"입니다. 샐리가 남자친구와 마음껏 사귀지 못하는 연예인에게 느끼는 감정, 셜록스에게 원하는 것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죠. 자기가 만약 샴푸 모델이 된다면 셜록스와 멀어질까봐 두려워 하는 것은 같습니다. 역시 애인 비슷한 대사 컷.

38화(엄마의 비밀), 래시가 "얼마전에 이 학교 근처로 이사왔는데, 좋아하는 친구 있으면 꼭 같이 와!"라고 합니다. 래시의 원래 대사가 "이 학교 근처에 점집을 열었는데, 남자친구(彼氏, 카레시)랑 꼭 와줘!"입니다. 일단 래시가 오라는 가게가 점집이라는 것도 짤렸고, 셜록스를 "남자친구"로 지칭하는 것도 짤렸죠. 그놈의 킹풍갓속이 이걸 또. 근데 이 장면에서 셜록스가 "나랑 같지 있지 않는게 좋겠네."라고 하는 것도 같이 짤렸습니다? 왜죠? 그 다음에 샐리가 "누가 싫다고 했니?"라고 말해서 셜록스가 샐리의 마음을 어느정도 확인하는 건 또 안짤렸고요.

<아니 이런 중요한건 다 나왔는데 왜 무고한 장면을 짤랐...?>

애인이니 여자친구니 하는 얘기는 일단 짜르고 보는 방향이 아니었나 싶어요. 뭐 말고도 소소하게 대사의 뉘앙스를 많이 바꿔놨는데, 주로 샐리가 좀더 능동적인 느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이밖에 차이가 있는 대사들

8화(아더의 글러브)에서 네티가 "투수 1구!"라든가, "경기를 빨리 끝내야지?"라든가 이런 야구 쪽 표현을 쓰는데 우리나라에선 야구와 관계 없는 표현으로 교체됐습니다. 이유는 글쎄요? 원작에서도 야구 쪽 표현을 썼는데 왤까요. 우리나라에서도 당시에 야구가 보편적이긴 했는데, 아저씨들 스포츠라서 그랬던 걸까요.

일본판에서 네티는 셜록스에게 반쯤 존댓말을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일관적으로 반말을 합니다. 세인트도 평소 친구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그냥 반말이죠. 아무래도 우리나라 문화 상 동갑내기들 사이에서 존댓말을 한다는게 좀 이상하긴 하죠.

여담으로 후배인 카드캡터 체리의 서포터인 지수도 일본판에서는 체리에게 존댓말을 씁니다. 우리나라야 두 사람의 성우분도 이현선 성우님으로 같기도 하고 해서 많이 비교가 되는데, 다른 문화권에서도 이런 여러 유사점 덕에 세인트와 지수를 유사하다고 느낀다고 하네요. 하긴 머리색 매치라든지 어른스런 성격이라든지 버프(?)를 걸어준다든지 둘이 비슷한 점이 많긴 하죠. 주인공인 샐리와 체리 사이에도 어느정도 유사성이 있긴 하구요.

그리고 KBS판에서 샐리는 부모님께 깍듯하게 존대를 합니다. 일본판에선 대충 편한 말로 하죠. 요즘도 아동용 애니메이션 번역을 그렇게 하나 모르겠네요.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일본판에서는 셜록스가 경찰들에게 말이 점점 짧아지는데, 우리나라에선 반드시 존대를 합니다.

26화(샴푸 모델 경연대회)에서 아빠가 "샐리는 사춘기인데 아직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도 이상하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거 일본판에선 "남자애가 좋은 게 아니면 혹시 여자애가 좋니?"(...)라는 대사였습니다. 당연히 컷.

3. "성적인 요소"가...원래도 별로 없지만 그나마 있던것도 제거

사실 원작 만화는 아예 섹스어필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애초 원작자 그림체 자체도 그렇고, 원작 만화가도 단행본 서비스컷에서 셜록스가 "난 아직 중학생이라구요." 라고 하는, 그래서 키스신 그리기는 어렵다는 듯한 얘기를 한 적이 있을 정도죠. 키스신은 외전에서나 나오고, 그것도 뽀뽀고, 둘이 포옹하는게 제일 강한 스킨십입니다. 흔한 서비스컷 하나 없고 둘이 실수로 스킨십이 생겨도 포옹 이상의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노출도 그냥 없어요. 아예 0이죠. 오죽하면 샐리와 셜록스의 관계에서 플라토닉 러브를 배운다는 얘기까지 있었을까요. 플라토닉이라니, 그런 거 아닌데 허허허허허.

애니메이션도 원작 만화랑 크게 다르지 않아서 뭐 변신할때 뱅크신에 어깨 잠깐 나온 정도 빼면 노출도 아예 없고 한데...애니에는 그나마 모든 에피소드에 걸쳐서 이런 씬이 "딱 한 씬"이 있습니다.

<"나 지금 치마 입었단 말이야!">

시청자들한테 꽤 인상깊었던 장면인지, 요즘도 천사소녀 네티 얘기하면 꽤나 자주 언급되는 바로 이 장면입니다.

근데 이것도 굉장히 번역가의 고뇌가 들어가 있는 대사입니다. 왜냐면 일본판 대사가..."싫어, 이 변태!"라서인데요. 그..."엣찌(エッチ)"입니다. 이 건전하기 그지 없는 만화에 유일하게 나오는 섹슈얼한 의미가 있는 단어지 싶은데, 그것도 샐리 입을 통해 발화가 되다 보니 허허허.

이걸 뭐 보통 만화책에서 번역하듯이 얘기하자니 공중파에서 애들 보는 프로에 나가긴 너무 강했던것 같고, 결과적으로 "치마를 입었다"라는 좀더 상황을 설명하는 표현을 사용했네요.

4. 등장인물의 개명

등장인물들의 본작 이름과 로컬 이름이 따로 있는건 애니메이션에선 문화권과 상관 없이 워낙 흔한 일이고, 지금도 어느정도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니 굳이 세세히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겠죠.

좀 특징적인 게 있다면 "샐리"와 "네티"는 아마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컬러 퍼플"에서 따온 듯 합니다. 여기서 두 여주인공의 이름이 셀리(Celie)와 네티(Nettie)이기 때문이죠. 다만 샐리는 작중 내내 엄청나게 명확하게 "샐"리로 발음이 되고 표기도 샐리입니다. 내용적으로 컬러 퍼플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천사소녀 네티에 컬러 퍼플의 네이밍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좀 신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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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세일러문이 방영될 때, 변신 뱅크신에서 알몸 실루엣이 나오는 것으로 설화가 된 적이 있었죠. 90년대에는 아마 만화에 애들 연애하는 장면이 나왔다 하면 방송국보다 일부 단체에서 더 열을 냈을 것 같긴 하네요. 참, 사회적 인식이라는건 무서워요.

다 지난 일이니 이렇게 차이점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네요. 어떻게든 내용 보존을 하면서 검열당국의 칼날과 비판적인 세력들을 피해보려는 KBS 편집진의 고뇌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나중에 또 글을 올리겠지만, 예고장들이 통으로 짤린건 좀 아쉬운 일이긴 합니다. 당시의 리니어 편집기술이라는 한계로 인해서 이걸 어떻게 해보는게 불가능했겠지만 말이죠.

KBS가 아닌 다른 방송국에서 천사소녀 네티를 방영한 세계선이 있다면, 거기에서는 또 어떻게 이 검열의 파고를 넘었을지 궁금해집니다. 특히 왜색 문제는 다른 방송사들이라고 해도 피해갈 수 없던 시절이니 말이죠.

p.s. 이 글 쓰다가 그동안 쓴 글에서 회차 카운팅이 잘못됐다는걸 깨달았습니다(...) 나중에 고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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