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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0/30 15:07:02
Name   매일이수수께끼상자
Subject   [조각글 2주차] (1주차와 약간 믹스, 약 기독) 노래는 가사지
* 아래 올려주신 조각글 모임이 흥미로워서, 불현듯 꼽사리낍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약간의 기독교 내용이 들어갑니다. 종교가 다르시면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 1주차 주제도 조금 혼합시켰습니다.
* 홍차넷 자게 처음인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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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유품 정리를 다 동생에게 시켰기 때문에 엄마를 추억할 수 있는 물건 하나 요구하기가 미안했다. 다만 동생이 엄마 얼굴 크게 나온 독사진 한 장 말고는 딱히 다른 물건에 미련이 없어 보여서 몇 가지 두고 보자며 이것저것 주워왔다. 그 중에 성경이 한 권 있었다. 엄마 아플 땐 별로 찾아가보지도 못했고, 그것 때문에 밤마다 몰래 자는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나와 용변기 위에서 끽끽 청승맞게 굴던 때라 엄마 손때 가득할 성경을 그때는 열어볼 수 없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책꽂이에 꽂아두기로 하고 열지 않았다.

한 1년쯤 지났을 때였나, 이제 책꽂이 3층까지 손이 닿을 정도로 자란 딸 아이가 잊고 있었던 엄마의 성경을 장난치다가 무심코 뽑아재꼈다. 파르륵, 영혼이 날갯짓이라도 하듯 뭔가가 그 책으로부터 우수수 떨어졌다. 가서 보니 스크랩 조각들. 신문에 가끔 나는 좋은 시, 좋은 글귀들, 조각조각난 건강 팁들이 전부였는데 옛날 찬송가 악보 하나가 거기 섞여 있었다. 엄마가 가끔 흥얼거리시던 것이었다. 전설 속 왕처럼 책 뽑기에 성공한 딸은 책꽂이를 잡고 이미 영토를 확장하듯 저쪽으로 가고 있었고, 나는 전설이 떠난 빈자리에 주저앉아 엄마의 옛 노래를 난데없이 듣고 있었다. 식구들 다 떠나간 빈 집을 엄마는 이 노래로 채우고 계셨구나.

아들 보기에 외롭지 않은 엄마가 어디 있을까. 내가 보기에 우리 엄마도 그랬다.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빠가 그 외로움의 주범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처량히 앉아 있는 엄마 보기 불편해 새벽처럼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는 나도 엄마를 무척 외롭게 했음이 분명하다. 왜 그리 내 방문은 주말에도 단단히 입을 닫고 있었을까. 어쩌다 마루에서 TV라도 같이 볼 때면 화면이 아니라 날 보고 웃으시던 엄마의 시선을 왜 모른 척 했을까. 남편과 아들이 끝까지 채우지 못했던 외로움을 달래던 엄마의 노래를 더 들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울리고 마음이 깨져나가는 거 같았다. 난 그 갱지 조각들을 모아 떨어진 성경에 우겨놓고 다시 책꽂이로 돌려놓았다.

어떤 이유에선지 엄마의 신앙은 아들에게도 딸에게도 그리 짙게 전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며느리의 그것이 엄마를 꼭 닮았다. 그렇다고 아내가 엄마와 사이가 좋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딱히 나쁠 것도 없었지만 ‘고부’라는 관계가 원래 그런 것인지 어느 정도 서로를 불편해 함은 분명히 거기 있었다. 엄마는 며느리가 차려준 밥 한 번 먹어보고 싶었고, 신혼 초에 조산으로 첫 아이를 잃은 아내는 음식에 창의력을 발휘할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먹을 게 뭐라고, 서로가 솔직히 말을 꺼내 표현하기에 너무나 알량한 서운함들이 해소되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딸아이의 백일 날, 낮에 빌린 식당에서 외식을 하고도 굳이 집까지 찾아와 아내가 끓인 미역국 한 그릇 얻어 드시고 ‘아, 역시 우리 며느리가 해준 밥이 맛있다’고 하시고, 아내가 죄송하다고 서로 손 맞잡고 화해한 것이 영원히 퇴원 못하실 병원으로 들어가시기 몇 주 전이었다는 게 다행이었다면 다행이랄까.

생각해보면 엄마는 찬양 부르는 걸 참 좋아했다. 남자인 내가 당시에는 여자애들만 배운다던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엄마가 아들 반주에 맞춰 찬양을 불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이올린도, 기타도, 다 그런 목적으로 배웠다. 손바닥 맞아가며 배웠던 그 지긋지긋한 악기들이 물주의 목적을 제대로 달성한 건 중학교 입학 전까지였다. 머리가 굵어지고, 아빠의 가정생활이 삐거덕거리기 시작하면서 난 내 입으로든 엄마의 입으로든 찬양을 돕기가 싫어졌거나 악기가 지겨워졌다. 그 즈음부터 엄마는 몇 년씩이나 독창을 흥얼거렸다. 부엌에서 들어오지도 않는 아들의 생일 미역국을 끓이며, 아빠가 완전히 집을 나가고 이혼을 하자며 전화로 종용을 하던 날 화장실에서 수돗물을 틀어놓고 울음을 삼키시며.

악기 배워놓은 게 빛을 발한 건 20년이나 지나서면서였다. 여전히, 그러나 그저 머쓱하다는 이유로, 엄마와 찬양을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난 엄마의 신앙을 꼭 닮은, 찬양하기 좋아하는 지금의 아내에게 흔히 볼 수 없는 악기 세 개 다룰 줄 아는 남자임을 과시하며 떠듬떠듬 반주를 해주고 있었고, 그것이 바탕이 되었는지 아닌지 아직도 확인할 길은 없지만 결혼에 안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바이올린은 운지법을 다 잊어버려 ‘할 줄 안다’고 말만 하고 실제로 보여준 적이 없는데도, 아내는 내가 두들기는 건반 소리에 눈을 반짝였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무척 배우고 싶어 했으나, 집이 너무 가난해서 그럴 수가 없었단다. 건반을 치는 게 아내에겐 동경하던 기술이었다. 바이올린을 치든 못 치든, 기타를 퉁기든 말든, 양손으로 검은 건반 흰 건반 다 누를 줄 알면 아내는 일단 신기해했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난 ‘우린 역시 운명이었어’라고 말 하며 난생 처음 악기를 가르쳐준 엄마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탕자처럼 불량하게 사느라 돈도 한 푼 모으지 못해 결혼을 목전에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들에게 수입도 한 푼 없던 엄마가 오로지 불 안 키고 보일라 안 떼고 TV 소리 죽여가시며 아무도 모르게 모은 돈 5천만원을 주셨을 때 두 번째로 감사했다. 세 번째는, 아내가 대신했다.

아이들도 혼자 놀 정도로 크고, 엄마의 오랜 병원생활도 끝나고 아내는 조금씩 여유가 돌아오는 걸 느꼈는지, 어느 날 갑자기 중고 키보드를 하나 사들고 - 정확히 말하면 부둥켜안고 - 들어왔다. 2만 원짜리였다. 소리도 깽깽거리고 건반이 두 번씩 눌려서 초보자들 손 망가지기에 딱 좋은 그런 물건이었다. 좋은 거 사줄 때까지 많이 치지 말라고 했지만 아내는 아는 동생에게서 간단히 코드 잡는 법을 배우더니 아이들과 남편 재우고 날마다 새벽 서너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자서 찬양을 불렀다. 그렇게 재밌니, 물었더니 그렇게 재밌단다. 아직 뚱땅거리는 수준인데도 신이 나서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건반을 쳐드렸다. “엄마, 이거 내가 그렇게 가르쳐달라던 피아노야! 어때? 감동스럽지? 울어! 울라고!” 장모님과 나도 아내를 따라 덩달아 신이 났다.

어제는 낮에 사무실에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또 새 곡을 익혔나보다. 난 전화기를 들고 나가 아내의 반주를 감상하려 했다. 새 곡은 새 곡이었는데, 많이 들어본 것이었다. 되게 촌스러운 행진곡 스타일의 찬송가였다. 하긴, 옛날 곡일수록 코드 진행이 간편하긴 하다. 그런데 반주를 다 마친 아내가 “이거, 어머님이 알려주신 곡이야.”란다. “엄마? 장모님?” “어머님.” “잉?”

처가가 아이들 학원 보내는 건 생각도 못했던 옛날, 아내가 우연히 친구 따라 동네 교회 가서 배운 노래 가사가 ‘인내하며 부르짖으라,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여서 어린 마음에도 힘을 받았단다. 그런데 너무 어렸을 때라 ‘그런 노래에 위로받은 적이 있었지’라는 어렴풋한 그리움만 있었지, 곡조고 정확한 가사고 기억이 나질 않았단다. 한번쯤 찾아보고 싶었는데 그게 이제 무의식 저쪽에 한 자락 걸치고 있는 그런 기억이라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었단다. 그런데 아이들이 여느 때처럼 책꽂이에서 책을 막 헤집기 시작하는데 엄마 성경책이 딱 떨어지고 곡조처럼 종이 한 장이 팔랑팔랑 아내 건반 위로 떨어지더란다. 동시에 그 기억이 무의식을 탈출했단다. 참, 엄마가 아들의 반주를 잃고, 남편을 다른 곳에 잃고, 건강도 잃고, 생명을 잃을 때까지 내 주변 어디선가 외롭게 흥얼거리던 그 촌스런 찬양이 바로 그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 인내하며 부르짖으라’였다는 걸 앞에서 말했던가.

“신기하지? 감사하드라, 이 악보를 여기 넣어두신 게.”
두 사람의 거짓말 같은 드라마에 제 3자인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난 아내에게 다시 쳐달라고, 다시 쳐달라고 신청곡을 넣기만 했다. 들으며 손을 꼽아보니 점심값 아끼면 연말까지 괜찮은 키보드 하나 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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