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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10/02 15:31:38
Name   라임오렌지나무
Subject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2023)
(결말을 어느 정도 언급하니 스포일러가 있다고 말해야겠네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었던 것은 아마 “상실의 시대”부터 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책을 고르는 기준을 가지지 못했던 중학교 때, 책 뒷표지의 광고문구(아마도 "대학가를 강타한 베스트셀러" 이런 느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요)를 보고 집어들었던 것이 처음이었을 거예요. 몇 가지 사건들이 벌어졌다는 것 외에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하지만 무언가 나에게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있으리라는 예감 같은 것이 무라카미씨의 책을 읽는 이유였을 겁니다. 당시 구할 수 있던 무라카미씨의 책을 다 읽고, 이를테면 "태엽 감는 새" (나중에 원제인 "태엽 감는 새 연대기"로 다시 나왔지요), "댄스 댄스 댄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그리고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그의 단편집과 에세이집들, 저는 생각했었어요. 하루키의 작품은 역시 단편이지.

다른 사람들처럼 계속 그의 글들을 쫓아 읽었죠. "해변의 카프카"나 "1Q84" 때엔 적잖이 실망했던 것 같고, "언더그라운드"나 "여자 없는 남자들"에선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여전히 제 독서는 "상실의 시대" (또는 "노르웨이의 숲")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제가 책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함을 의미했겠지요. "노르웨이의 숲"은 제가 어떤 시점마다 다시 읽는 책들 중의 하나로 남아있었지만, 그것이 책을 다 이해함을 의미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작품에 등장하는 상징들을 해석하기엔 제 힘이 모자랐던 탓이지요.

시간이 지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을 때엔 나름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거꾸로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잡지는 않았습니다.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시간이 없거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여유가 없어 (결국에는 집중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그만두고 말았지요. 근작인 두 작품은 충분히 흥미로웠으며 무라카미씨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에 와닿는 주제들은 아니었어요. 이를테면, 다자키 쓰쿠루가 예전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그의 순례), 즉 자신을 규정해 버린 불가해한 사건을 나중에서야 바로잡기 위해 (또는 "알기"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표상은 우리 삶의 은유로(알 수 없는 거대한 일들이 일어나고, "나"는 후향적으로 그것들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는) 받아들이기엔 충분했으나 굳이 무라카미씨의 작품을 통해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엔 "상실의 시대"가 남겨놓은 질문들이 제게 남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우물"은 무엇인가와 같은.

그가 여러 작품들을 통해 구축해 놓은 "하루키 월드", 자신의 분신들이 때론 과거의 상실을 곱씹으며(주인공 A, "노르웨이의 숲"에서처럼), 때론 현실 속에서의 어긋남을 발견해 모험에 빠져들며(주인공 B,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언젠가는 과거의 치유를 위한 여정을 떠나는(주인공 C, "태엽 감는 새 연대기"를 시작이라 할 수 있을까)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를 저는 기다려 왔던 것 같아요.

이번 작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면서 "하루키 월드"가 그 시즌을 마감했음을 깨닫습니다. 그의 장편들 중에선 결코 길지 않은 분량(두껍긴 하지만, 어쨌든 단권이니까요)으로 나온 이 책은 지금까지 그의 작품이 던졌던 질문들을 갈무리하며, 이전까지 제시하지 않은 방향으로 답을 내놓으려 시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과거에 갑자기 자신의 삶에서 빠져나간 여자아이(심지어, 자신의 단편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일에 대하여"를 그대로 차용한)를 다시 만나기를 희구합니다. 재회를 위해 그녀가 이야기하던 세계로, 즉 자신과 그녀가 함께 구축한 비현실 또는 비일상의 세계로 가야 한다고 믿으며 그는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한 채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느날, 그는 자신이 "그 세계"에 와 있음을 알게 되지요. 그와 그의 그림자는 그의 선대인 고야스, 그의 후대인 M을 만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비현실을 경유하여 다시 현실에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무라카미씨는 이것을 자신의 소설론으로 내어 놓는 것으로 보여요. 소설 쓰기란, 어떤 이유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비현실을 경험한 누군가가 현실에서 다시 비현실을 불러내기 위해 불가능한 노력을 계속하는 작업이라고 이번 작품은 넌지시 말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상실을 곱씹는 일이기도 하며, 현실 속 "비현실"의 어긋남을 찾는 일이기도 하고, 과거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가 언젠가 야구장에서 경기를 보다 삼루로 날아가는 공을 보며 불현듯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고 고백한 것은, 그의 작품론을 체현하는 표현이었을 거예요.

물론 "노르웨이의 숲"은 그의 작품이 시작한 곳이 아닙니다만, 저에게 그 책이 만들어 놓은 질문들은 큼지막하게 남아 있었더랬어요. 이번 책을 읽고 나서야 저는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정신병원으로 상정되는 비현실의 공간을 방문하는 것은 그가 "글"을 쓰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경로였다는 것. 나, 친구, 친구의 여자친구가 이루던 완벽한 삼각형은 실은 각자의 이유로 인해 계속될 수 없었던 상상의 장소였다는 것. 아니, 사실 그런 삼각형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 숲 속의 "우물", 길을 가다 빠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완벽한 어둠의 공간은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상처이기도 하다는 것.

이번 작품에서 "마음의 역병"으로 표현되는 고통과 상처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작품의 "도시"(각자의 무의식)는 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벽을 쳐 놓았어요. 그로서 도시는 온존하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 시간도 "축적"도 없는 도시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변화해야 하고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주인공은 스스로 도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요. 하지만 어떻게?

그를 위해 무라카미씨가 내놓은 답은 다음 세대예요. 자신은 전대 "도서관장"인 고야스씨로부터 배웁니다. 고야스씨, 자신, 그리고 자신의 후대인 M은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기 어려운 이들이지요. 고야스씨는 베레모를 쓰고 스커트를 입는 것으로 (즉, 삶의 양식을 다르게 취하는 것으로) 세계와 표면적으로 화해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답일 수 없고, 다음 차례인 주인공에게 답을 찾는 과정을 넘기게 되지요.

한편, "잊혀진 꿈"들(개인들의 슬픔과 아픔)을 읽는 일을 부여받은 주인공은 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완벽히 파악하는 능력은 결여하고 있어요. 꿈들은 앞뒤가 맞지 않고 복잡한 이야기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꿈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M, 다음 세대예요. 그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이 세계에 속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진기억력, 한번 본 것을 완벽히 기억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그가 바로 꿈을 읽을 수 없기에, M은 주인공을 필요로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무라카미씨가 작품에서 꿈 읽는 일, 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위치하는 것은 글 쓰는 일을 상징해요. 그렇다면, M에게 자신의 일을 넘겨주는 것은 작가 자신에겐 다음 세대에게 글 쓰는 일을 넘겨주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결국,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 자신의 소설론이면서, 자신이 도달한 곳을 명시하고 다음 세대가 그것을 이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작품으로 읽혀요. 세상에는 슬픔과 아픔이 만들어낸 불가해함들이 있으며, 그것을 경험했다가 돌아온 이는 글을 쓸 수밖에 없기에 작가가 된다, 하지만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으며, 자신이 할만큼 한 다음에는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무라카미씨의 작품과 함께 성장해 온 저로선 한 세계의 끝을 바라보는 일이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아마,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제게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누군가가 있음을(그것이 결코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고 그저 타인과 섞이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긴 하지만), 그리하여 안정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토양을 확보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제가 그의 작품을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할 수 있을만한 자리까지 왔고, 그것을 통해 나의 글쓰기를 비추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예컨대, 제가 어릴 때 무라카미씨의 소설들에 끌렸던 것은 저 또한 무언가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겠지요)은 지금까지 제가 걸어온 시간들을 깨닫게 해요.

그리고 그의 이번 작품은 이제 저 또한 무언가를 해야 함을 요청하고 있음으로 읽혀요. 비현실을 경험한 이, 그리하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로서, 그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낳을 것을. 부담스러운 일이라 해도 그것을 진지하게 취해야 하는 것이 독자의 의무, 또는 독서의 윤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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