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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3/13 10:54:41수정됨
Name   meson
Subject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5. 예고된 변곡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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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전조: 계민가한

612년 수양제가 요동 원정에 나섰을 때, 그에게 대적하는 세력은 오로지 고구려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돌궐의 흥기 이래로 중국의 오랜 근심이었던 북방은 보가가한의 몰락으로 말미암아 그 위세가 줄었고, 새로이 동돌궐의 지배자로 떠오른 계민가한(돌리가한)은 수나라에게 막대한 원조를 받은 인물이었지요. 수양제가 고구려로 눈길을 돌린 것은 흔히 이러한 돌궐 문제의 해결 때문이었다고 여겨지곤 합니다.

예컨대 수문제는 보가가한에게 대패해 귀부한 돌리가한을 계민가한으로 책봉해 주었으며, 의성공주를 그에게 출가시켰고, 보가가한과 계민가한이 싸울 때는 늘 계민가한을 지원하였습니다.[5-1] 당시 계민가한은 사실상 수나라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계민가한의 백성이 약탈당하면 수나라 군대가 이를 되찾아 주기도 하였죠.[5-2] 수문제의 이러한 도움 덕분에 계민가한은 결국 보가가한의 세력을 붕괴시키고 동돌궐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5-3]

[5-1] 서길수, 「아프라시압 고구리[高句麗]사절에 대한 새 논란 검토 - 고구리[高句麗] 사신 사행(使行) 부정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Ⅱ)」, 『동북아역사논총』 68, 2020, 186쪽.
[5-2] 임정운, 『중원왕조와 돌궐1제국(545~630) 관계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2, 79-80쪽.
[5-3] 『隋書』 卷84 列傳49 北狄 突厥.


이렇게 보면 계민가한은 수나라에 당연히 협조적이어야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수문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해마다 조공을 바쳤습니다.[5-4] 또 수양제가 즉위한 뒤에도 거란이 영주를 침입하자 기병 2만 명을 동원해 토벌을 도왔으며, 당시 돌궐병은 수나라 장수의 지휘를 받았습니다.[5-5] 607년에도 계민가한은 수양제에게 중국의 법과 복식을 받아들이고 싶다고 요청하는 등 상당한 저자세를 취했지요.[5-6]

[5-4] 『北史』 卷99 列傳87 突厥.
[5-5] 임정운, 『중원왕조와 돌궐1제국(545~630) 관계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2, 83쪽.
[5-6] 『隋書』 卷84 列傳49 北狄 突厥.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사실 계민가한이 장성 이남의 비옥한 땅에 살며 막대한 재물을 하사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5-7] 실제로 계민가한은 수나라에 자신의 충심을 강조하면서도, 계속해서 물자를 지원받고 장성 이남에 거주하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5-7] 임정운, 『중원왕조와 돌궐1제국(545~630) 관계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2, 85쪽.


예컨대 다음과 같은 표문의 내용이 존재합니다.

대수성인막연가한(大隋聖人莫緣可汗, 수문제)께서 백성을 사랑으로 기르시매, 하늘처럼 덮어주지 않는 것이 없고, 땅처럼 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십니다. (···) 혹 남쪽으로 장성 안에 들어오거나, 백도천[白道]에 거주하게 된다면, 사람과 백성과 양과 말이 산곡[山谷]을 두루 채우게 될 것입니다.
大隋聖人莫緣可汗, 憐養百姓, 如天無不覆也, 如地無不載也. (···) 或南入長城, 或住白道, 人民羊馬, 遍滿山谷.
- 『수서』 북적열전 돌궐 -

그러나 계민가한이 동돌궐을 통일하면서 장성 이남에 돌궐을 들여놓은 상황을 부담스러워하는 여론이 생겨났고,[5-8] 수양제는 마침내 계민가한을 장성 이북으로 올려보내게 됩니다.[5-9] 그러자 계민가한은 그간의 충성스럽던 모습을 대번에 뒤바꾸고, 이오(伊吾) 토벌에 파병하겠다는 맹약을 파기했습니다.[5-10] 그의 뒤를 이은 시필가한도 612년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에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고요.[5-11] 이를 보자면 수양제가 요동으로 출정할 당시 돌궐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악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5-8] 『隋書』 卷60 段文辰傳; 『隋書』 卷41 高熲傳.
[5-9] 임정운, 『중원왕조와 돌궐1제국(545~630) 관계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2, 89쪽.
[5-10] 『隋書』 卷65 薛世雄傳.
[5-11] 이성제, 「高句麗와 투르크계 北方勢力의 관계 : 이해의 방향과 연구방법에 대한 모색」, 『고구려발해연구』 52, 2015, 157-158쪽.


그렇게 점점 유명무실해져 가던 수나라에 대한 동돌궐의 충성은 아직 고수전쟁 중이던 613년에 시필가한이 수나라를 침공해 약탈하면서 거의 소멸해 버렸습니다.[5-12] 시필가한은 수나라가 2차 고수전쟁으로 약화되자마자 군사 활동을 개시했고, 615년에는 북방을 순행하던 수양제를 안문(鴈門)에서 포위하기까지 했습니다.[5-13] 결국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에 골몰하는 동안 동돌궐은 다시 강성해졌고, 630년 멸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중국을 위협하기에 이릅니다.[5-14]

[5-12] 이성제, 「高句麗와 투르크계 北方勢力의 관계 : 이해의 방향과 연구방법에 대한 모색」, 『고구려발해연구』 52, 2015, 157쪽.
[5-13] 『隋書』 卷84 列傳49 北狄 突厥.
[5-14] 임정운, 『중원왕조와 돌궐1제국(545~630) 관계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2, 106쪽.


그렇다면 그 동돌궐 멸망의 주역인 당태종은 무언가 달랐을까요.

두 번째 전조: 진주가한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645년 당태종이 요동 원정에 나섰을 때 그에게 대적하는 세력은 오로지 고구려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수나라의 멸망 이래로 중국의 오랜 근심이었던 동돌궐은 힐리가한의 생포로 말미암아 그 날개가 꺾였고, 새로이 막북의 지배자로 떠오른 설연타는 돌궐만큼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지요. 당태종이 고구려로 눈길을 돌린 것은 흔히 이러한 북방의 약화 때문이었다고 여겨지곤 합니다.

예컨대 설연타의 족장 이남(夷男)은 628년 힐리가한에게 반란을 일으키고도 쉽사리 가한을 칭하지 못하다가 당태종의 책봉을 받고서야 비로소 진주비가가한(眞珠毗伽可汗)으로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5-15] 또한 641년에 설연타가 당나라에 귀부한 돌궐 부락을 공격하자, 당태종은 즉시 사방에서 병력을 동원하여 낙진수(諾眞水)에서 그들을 대파했습니다.[5-16] 그러자 진주가한이 사신을 파견해 사죄하며 혼인을 청했고, 당태종은 설연타는 이제 감히 변경을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라며 국혼을 대번에 거절했죠.[5-17]

[5-15] 『新唐書』 卷217 列傳142 回鶻.
[5-16] 『舊唐書』 卷199 列傳149 鐵勒.
[5-17] 『新唐書』 卷217 列傳142 回鶻.


그런데 이듬해에는 상황이 다시 달라집니다. 642년 설연타는 당에 내속해 있던 계필부를 이반시켜 귀부하도록 했고, 계필하력은 이를 막지 못하고 설연타로 끌려갔습니다.[5-18] 당태종은 결국 신흥공주(新興公主)를 출가시키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계필하력을 돌려받을 수 있었고요.[5-19] 진주가한은 그제야 유화적으로 나왔습니다. 혼인을 위해 폐물은 물론 말 5만 필, 소와 낙타 1만 두, 양 10만 마리를 헌납한 것입니다.[5-20] 가축들을 고비사막 너머 1만 리 길로 보내는 동안에만 거의 절반이 손실되었고,[5-21] 설연타 제부들은 아직 국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막심한 지출을 감내한 셈이었습니다.

[5-18] 『舊唐書』 卷109 列傳59 契苾何力.
[5-19] 『資治通鑑』 卷196, 貞觀 16年 10月 조.
[5-20] 『資治通鑑』 卷197, 貞觀 17年 閏6月, “薛延陀眞珠可汗使其侄突利設來納幣, 獻馬五萬匹, 牛·橐駝萬頭, 羊十萬口.”
[5-21] 『舊唐書』 卷199 列傳149 鐵勒.


하지만 정작 당나라 측에서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계필하력은 진주가한은 성질이 사나워 혼인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불과 1~2년 안에 병사하며, 그러면 두 아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므로 설연타를 쉽게 제어할 수 있다고 간언했죠.[5-22] 이 계책은 당태종에게 수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침 설연타가 보낸 가축과 예물이 기한을 넘겨 도착했고, 당태종은 이를 빌미로 혼인 약속을 파기해 버렸지요.[5-23] 가축을 추가로 보내라는 것도 아니고, 손실된 가축을 보전해 준 것도 아니며, 받은 가축을 돌려주었는지도 불확실한 처사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설연타는 다시 돌궐 항호들을 공격하고, 당나라의 변경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5-24]

[5-22] 『資治通鑑』 卷197, 貞觀 17年 閏6月 10日 조.
[5-23] 『新唐書』 卷217 列傳142 回鶻.
[5-24] 『舊唐書』 卷199 列傳149 鐵勒.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떠난 것은 바로 이러한 때였습니다. 기실 설연타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었던 것입니다. 당태종도 이를 알았고요. 그는 원정을 떠나며 설연타의 사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의 가한에게 전해라. ‘우리 부자가 함께 동쪽으로 고려(高麗)를 정벌할 것이니, 네가 만약 변경을 약탈할 수 있다면, 어디 곧바로 와 보아라.’”
“語爾可汗, ‘我父子並東征高麗, 汝若能寇邊者, 但當來也.’”
- 『구당서』 철륵열전 -

신당서 회흘전에는 이로 인해 진주가한이 위축되어 감히 침공을 모의하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5-25] 또 구당서 철륵전에 따르면 진주가한은 주필산 전투 이후 연개소문이 보낸 사신이 후한 이득[厚利]으로 유혹했을 때도 당나라가 두려워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5-26] 그런데 신당서 집실사력전에는 당태종이 요동으로 떠난 시점에 설연타의 10만 대군이 하남(河南)에서 하주(夏州)까지 쳐들어왔다가 퇴각했으며, 집실사력이 이를 600리나 추격하다가 진주가한의 죽음을 알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5-27] 이를 보자면 설연타는 실제로 당나라의 변경을 공격한 것이 됩니다.

[5-25] 『新唐書』 卷217 列傳142 回鶻, “夷男沮縮, 不敢謀, 以使謝, 固請助軍.”
[5-26] 『舊唐書』 卷199 列傳149 鐵勒, “夷男氣懾不敢動.”
[5-27] 『新唐書』 卷110 列傳35 執失思力.


집실사력전의 내용을 취신한다면, 설연타가 하주까지 공격해 온 시점은 진주가한이 사망하기 이전입니다. 비록 당태종이 645년 9월 7일에 진주가한을 위해 발상하였다는 기록[5-28]이 유명하지만, 이것은 요동에 있던 당태종이 발상을 한 날짜이지 진주가한이 사망한 날짜는 아니지요.[5-29] 반면에 8월 10일에는 당태종이 “내가 연타(진주가한)의 죽음을 헤아리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5-30] 이때는 643년에 계필하력이 진주가한의 병사를 예상한 뒤로 꼭 2년가량이 지난 시점이었고요. 그렇다면 당태종은 이미 나름의 경로를 통해 진주가한이 8월 10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던 것으로 여겨지며,[5-31] 설연타의 침공은 그 이전에 발생한 것입니다.

[5-28] 『資治通鑑』 卷198 貞觀 19年 9月 壬申 조.
[5-29] 서영교, 「연개소문의 對설연타 공작과 당태종의 안시성 撤軍」, 『동북아역사논총』 44, 2014, 266쪽.
[5-30] 『資治通鑑』 卷198, 貞觀 19年 8月 10日 考異, “實錄上謂近臣曰, ‘以我量之延陀其死矣.’ 聞者莫能測.”
[5-31] 서영교, 「연개소문의 對설연타 공작과 당태종의 안시성 撤軍」, 『동북아역사논총』 44, 2014, 269쪽.


물론 병중인 진주가한이 당나라를 침공한 10만 대군을 직접 지휘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설연타의 군대는 그의 두 아들이 상당 부분 장악하고 있었으며,[5-32] 기실 641년에 당군과 전투를 벌인 설연타의 지휘관도 진주가한 본인이 아닌 그의 아들이었습니다.[5-33] 그렇다면 설연타는 실제로 645년에 당나라의 하주를 공격한 것으로 보이며,[5-34] 가한의 아들이 침공을 지휘했고, 이 때문에 진주가한의 죽음이 알려지자 설연타군이 곧 퇴각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32] 서영교, 「주필산(駐蹕山) 전투와 안시성(安市城)」, 『동국사학』 58, 2015, 74쪽.
[5-33] 『舊唐書』 卷199 列傳149 鐵勒.
[5-34] 정원주,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목적과 의미」, 『고구려발해연구』 67, 2020, 93쪽.


이때 당나라의 하주(陜西省 靖邊縣 紅墩界鎮 白城子村)[5-35]에서 안시성까지는 대략 1500km입니다. 또한 전한대(前漢代)의 긴급한 군사보고는 하루에 500리 이상을 주파하였는데,[5-36] 전한의 1리는 약 405m이므로 하루에 200km가량을 이동한 셈입니다.[5-37] 이렇게 하루에 500리가량을 이동하는 보고 속도는 당나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므로,[5-38] 설연타의 침공에 대한 정보는 최초 습득 이후 약 8일 만에 당태종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5-35] 서길수, 「아프라시압 고구리[高句麗]사절에 대한 새 논란 검토 - 고구리[高句麗] 사신 사행(使行) 부정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Ⅱ)」, 『동북아역사논총』 68, 2020, 196쪽.
[5-36] 임중혁, 「한대의 문서행정」, 『중국학보』 29, 139쪽.
[5-37] 김재효, 강연석, 고호경, 「전통적인 길이 척도 환산에 대한 역사ㆍ문화적 재고」, 『한국의사학회지』 23(2), 2010, 17쪽.
[5-38]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3쪽.


그 결과, 당태종은 주필산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였음에도 안시성 공성에 소극적으로 임하기 시작했습니다.[5-39] 1차 고당전쟁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고구려는 재정비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죠.[5-40] 8월 10일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공성에 나섰을 것으로 보이나, 안시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9월 7일에 진주가한의 적자 발작(拔酌)이 서자 예망(曳莽)을 죽이고 다미가한(多彌可汗)으로 즉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듯합니다.[5-41] 당태종의 기대와는 달리 설연타의 내분이 빠르게 종식된 것이지요. 이에 당군은 9월 18일부로 철수했고, 당태종은 곧바로 설연타와 새로운 전쟁을 수행해야 했습니다.[5-42]

[5-39] 서영교, 「주필산(駐蹕山) 전투와 안시성(安市城)」, 『동국사학』 58, 2015, 69쪽.
[5-40] 서영교, 「연개소문의 對설연타 공작과 당태종의 안시성 撤軍」, 『동북아역사논총』 44, 2014, 280쪽.
[5-41] 서영교, 「주필산(駐蹕山) 전투와 안시성(安市城)」, 『동국사학』 58, 2015, 70-71쪽.
[5-42] 서영교, 「연개소문의 對설연타 공작과 당태종의 안시성 撤軍」, 『동북아역사논총』 44, 2014, 278쪽.


수양제에 이어 당태종도 이러했다면, 당고종은 달랐을까요.

세 번째 전조: 철륵제부

물론 661년 당군이 고구려로 출정했을 때, 제국에 대적하는 세력은 오로지 고구려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태종의 붕어 이래로 중국의 오랜 근심이었던 서돌궐은 사발라가한의 생포로 말미암아 당나라의 판도에 들어왔고, 설연타의 멸망 이후 막북에 남은 철륵 제부들은 대개 당나라의 기미부주로 편제되어 있었지요. 당고종이 고구려로 눈길을 돌린 것은 흔히 이러한 유목 세력들의 평정 때문이었다고 여겨지곤 합니다.

650-65-2019-255
(이성제, 「650년대 전반기 투르크계 북방세력의 동향과 고구려 - 고구려 사절이 아프라시압 궁정벽화에 그려진 배경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65, 2019, 255쪽. 참고용 지도입니다.)

그런데 철륵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는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막북에 설치한 기미부주를 감독할 연연도호부가 막남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지요.[5-43] 그래서 철륵에 대한 통치는 간접적이었고, 각 부족들이 연합하여 당나라로 쳐들어오지 않게 조정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5-44] 회흘부의 족장이자 한해도독이었던 토미도(吐迷度)가 647년에 가한을 자칭하며 돌궐과 같은 관제를 설치하자, 당고종이 일부 부족을 다른 도독부 소속으로 옮겨 버린 것[5-45]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5-43] 『新唐書』 列傳142下 回鶻.
[5-44] 서길수, 「아프라시압 고구리[高句麗]사절에 대한 새 논란 검토 - 고구리[高句麗] 사신 사행(使行) 부정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Ⅱ)」, 『동북아사논총』 68, 2020, 199쪽.
[5-45] 『新唐書』 列傳142下 回鶻.


토미도는 아마 위와 같은 당나라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을 법합니다. 그런데 토미도는 648년에 조카 오흘(烏紇)에게 살해당했고, 오흘 등은 돌궐의 차비가한에게 귀부하려 하였습니다.[5-46] 이에 당나라는 재빨리 오흘을 유인하여 죽이고, 토미도의 아들 파윤을 새 도독으로 임명했지요.[5-47] 파윤은 이처럼 당나라의 지원을 통해 권위를 확립하였기 때문에 향후 친당적인 성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서돌궐 토벌전에 5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657년 소정방이 사발라가한을 대파할 때도 회흘병을 이끌고 종군한 것이 대표적입니다.[5-48] 파윤은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우위대장군에 올랐으며, 2차 고당전쟁에도 파병하였습니다.[5-49]

[5-46] 『舊唐書』 卷195 列傳145 回紇.
[5-47] 『新唐書』 列傳142下 回鶻.
[5-48] 이성제, 「650년대 전반기 투르크계 북방세력의 동향과 고구려 - 고구려 사절이 아프라시압 궁정벽화에 그려진 배경에 대한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65, 2019, 253쪽.
[5-49] 『新唐書』 列傳142下 回鶻.


그런데 이러한 당나라의 군사 동원은 회흘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고부를 비롯한 다른 철륵 제부들도 당나라와 서돌궐의 전쟁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5-50] 그리고 앞서 거란과 해의 경우에서 그러했듯, 이러한 당나라의 군사 징발은 철륵의 반발을 야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5-51] 전투 손실과 전쟁 준비로 인한 희생에 비해 당나라의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파윤과 같은 수장들만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죠.[5-52] 그 결과 복고부(복골부), 동라부, 사결부, 발야고부 등 4부는 이미 660년 8월에 반란을 일으켰고, 당나라를 침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5-53]

[5-50] 이성제, 「650년대 전반기 투르크계 북방세력의 동향과 고구려 - 고구려 사절이 아프라시압 궁정벽화에 그려진 배경에 대한 검토」, 『동북아사논총』 65, 2019, 254쪽.
[5-51] 박원길, 「바이칼호 주변의 철륵(鐵勒) 3부(Bokhud, Bayirkhu, Khurigan) 고찰」, 『몽골지역연구』 1(1), 2016, 14쪽.
[5-52] 이재성, 「아프라시아브 궁전지 벽화의 '조우관사절(鳥羽冠使節)'이 사마르칸트[康國]로 간 원인, 과정 및 시기에 대한 고찰」, 『동북아역사논총』 52, 2016, 160쪽.
[5-53] 『資治通鑑』 卷200, 唐紀16 高宗 顯慶 5年 조.


물론 660년의 공격은 정인태에 의해 격퇴되었으며, 추장들도 참수되었습니다.[5-54] 철륵 제부 중 가장 세력이 강한 회흘부도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고요.[5-55] 따라서 당고종이 보기에는 사태가 극도로 심각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실제로 661년에 소사업이 회흘병을 거느리고 고구려 원정에 출정할 때도 별다른 반란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고요.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반란이 모두 평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친당적인 부족장 파윤이 반당 활동을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5-56]

[5-54] 박원길, 「바이칼호 주변의 철륵(鐵勒) 3부(Bokhud, Bayirkhu, Khurigan) 고찰」, 『몽골지역연구』 1(1), 2016, 7-8쪽.
[5-55] 이재성, 「아프라시아브 궁전지 벽화의 '조우관사절(鳥羽冠使節)'이 사마르칸트[康國]로 간 원인, 과정 및 시기에 대한 고찰」, 『동북아역사논총』 52, 2016, 162쪽.
[5-56] 이성제, 「高句麗와 투르크계 北方勢力의 관계 : 이해의 방향과 연구방법에 대한 모색」, 『고구려발해연구』 52, 2015, 162-163쪽.


초원의 격변: 당군이 한 팔을 잃다

실제로 661년 10월경 파윤이 사망하자, 그를 계승한 조카 비속독(比粟毒)은 복고부 및 동라부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5-57] 이들은 당나라의 칙사를 살해하고,[5-58] 변경을 침공하였습니다.[5-59] 그 세력은 10만 명에 달했으며,[5-60] 사결부와 다랍갈부 등 여러 부족이 가담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5-61] 바야흐로 철륵 9성(九性)이 모반한 것입니다.

[5-57]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206쪽.
[5-58] 『冊府元龜』 卷986 外臣部 征討5.
[5-59] 『舊唐書』 卷195 列傳145 回紇.
[5-60] 『舊唐書』 卷83 薛仁貴傳.
[5-61] 이재성, 「아프라시아브 궁전지 벽화의 '조우관사절(鳥羽冠使節)'이 사마르칸트[康國]로 간 원인, 과정 및 시기에 대한 고찰」, 『동북아역사논총』 52, 2016, 167쪽.


이러한 북방의 변동으로 인하여 당고종은 661년 10월 11일에 철륵 토벌군을 편성하였으며, 고구려를 공격 중이던 아사나충과 소사업도 여기에 동원되었습니다.[5-62] 이때 소사업의 부여도행군은 군대 전체가 철륵 공격을 위해 이동했다고 여겨지며, 시간상 고구려군과 제대로 전투를 벌이지 못한 상태에서 회군했을 것입니다.[5-63] 당시 설인귀가 요동성까지 도달했음에도 별다른 전투 없이 불상만 베껴 그리고 돌아왔다는 기록[5-64]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설인귀 역시 철륵 토벌에 참전한 것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아사나충의 장잠도행군 또한, 부여도행군과 비슷한 경로로 지상에서 이동한 만큼 이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5-62]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2쪽.
[5-63]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7-188쪽.
[5-64] 『集神州三寶感通錄』 中, “五十唐龍朔中. 有事遼左行軍將薛仁貴. 行至隋主討遼古地. 乃見山像空曠蕭條絕於行往. 討問古老云. 是先代所現. 便圖寫傳本京師云云.”


다만 아사나충군은 철륵 토벌을 명령받았음에도 실제로는 고구려와 연결된 거란족과 먼저 전투를 벌인 것으로 보여 주목됩니다. 금석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경(顯慶) 5년(660)에 (아사나충이) 장잠도행군대총관에 임명되었다. 진한(辰韓)이 움직여 소요를 일으키니, 종군하여 잔악한 무리를 제거하였는데, 거란이 독(毒)을 뿜어내므로, 창끝[戈]을 돌려 난을 평정하였다. 현도(玄兎)의 떠도는 혼[遊魂]을 없애고, 황룡(黃龍)의 저항을 진압하였다.
顯慶五年, 詔爲使持節長岺道行軍大摠管. 辰韓俶擾, 從旆除殘, 契丹縱毒, 迴戈拯亂. 剿玄兎之遊魂, 覆黃龍之巨.
- 「아사나충비(阿史那忠碑)」 -

위 기록에서 진한과 현도가 고구려를 뜻한다는 것은 명확해 보입니다. 따라서 아사나충은 사실 거란의 반란으로 인해 고구려 전선에서 회군하였으며, 이 반란은 고구려의 사주로 일어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5-65] 또한 거란과 철륵의 반란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5-66] 아사나충은 분명 거란을 공격하기 위해 회군했음에도, 신당서에는 그가 철륵 반란 진압에 동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죠.[5-67] 당시 당나라가 철륵과 거란이 한통속이라고 생각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1차 고당전쟁 당시 고구려가 말갈을 매개로 설연타와 연계하였듯이, 2차 고당전쟁에서 고구려가 거란을 매개로 철륵 제부와 연계를 시도했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5-68]

[5-65] 이민수, 「660~661년 당의 고구려 공격군 편성과 水軍 운용 전략」,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155쪽.
[5-66] 서영교, 「唐高宗 百濟撤兵 勅書의 背景」, 『동국사학』 57, 2014, 335쪽.
[5-67] 『新唐書』 卷3, 高宗本紀 龍朔 元年(661) 10月 癸酉 조.
[5-68]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14쪽.


한편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 또한 철륵의 반란으로 인하여 회군하였습니다. 그런데 계필하력은 흔히 9월에 철군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압록수 도하와 전투 등의 사건들이 전부 소급된 기록이므로 정확한 시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5-69] 반면 당고종의 철륵 공격 조서는 10월에 발표되었으므로, 연락 시간을 고려하면 요동도행군은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철군했을 공산이 큽니다.[5-70] 이 때문에 압록수 도하 이후부터 철군까지의 시간 동안 요동도행군이 평양 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을 두고 고구려군의 반격을 상정하기도 합니다.[5-71] 만일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 주체는 648년 박작성을 구원했던 오골성과 안시성의 병력이었을 것입니다.[5-72]

[5-69]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3쪽.
[5-70]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3쪽.
[5-71]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95쪽.
[5-72]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4쪽.


661-2
(신광철, 『관방체계를 통해 본 고구려의 국가전략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2, 314쪽. 참고용 지도입니다.)

당나라의 전선 방기: 과대팽창의 한계

이처럼 막북에서 발생한 철륵 제부의 반란은 2차 고당전쟁의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수양제는 물론 당태종 시절보다도 약화된 듯 보였던 북방이 이번에도 고구려 침공의 변수로 작용한 것입니다.

이때 거란과 철륵의 반란으로 인해 계필하력, 소사업, 아사나충이 회군한 사실은 이들이 당나라 방위에 필수적인 존재였음을 시사합니다.[5-73] 물론 소사업의 경우 회흘을 비롯한 철륵병을 이끌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동요를 고려하여 회군했을 수 있고, 계필하력의 경우 철륵 출신인데다 이후 실제로 철륵안무대사가 되어 철륵 회유에 나서므로[5-74] 불러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휘관만 교체하는 등의 대안 대신 3개 도행군 전체가 회군하는 방법을 택한 것을 보면, 당시 고구려에 투입된 병력 자체도 당나라의 주력군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5-75]

[5-73]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94쪽.
[5-74] 『資治通鑑』 卷200, 唐紀16 高宗 龍朔 2年 조.
[5-75]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57쪽.


그렇다면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주력군을 동원한 결정적인 일격을 준비했으나, 이것이 효과를 발휘하기도 전에 팽창 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5-76] 공세의 일부를 포기하게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고구려에게는 승전의 호기가 되어주었지요.

[5-76]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94쪽.


이로써 2차 고당전쟁의 전황은 점차 반전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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