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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4/08/04 05:19:12수정됨 |
Name | 후안무치 |
Subject | 첫 번째 티타임(코털에 대하여) |
녹차, 정확하게는 가루녹차를 참 좋아하는데 막걸리에 가루녹차를 타 먹던 와중에 '이것도 일종의 티타임 아니야?' 하는 생각이 저를 여기로 이끌었습니다. ------------------------------------------------------------------- 잠 오지 않는 밤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하고도 얄궂은 일이다. 무료함을 달랠 수 있다는 위안으로 마음이 편안해 지다가도 생각이 생각을 낳는 끝없는 윤회의 끝에서 점점 더 명료해지는 정신을 마주할 때면 회전도어 같은 입면의 순간이 저 멀리 아득해지는걸 뚜렷이 느낀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항상 그 타이밍이 관건인. 코털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항상 그 은폐가 관건인. 내가 좋아하는 그녀는 코털이 있다. 아 물론 나도 있다. 하물며 내 것이 더 길고 풍성하다. 최근 그녀의 코털을 자주 목도한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걸까? 만나는 횟수가 더 잦아지고, 스스럼 없이 속내를 얘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가며, 이미 여러차례 입고 나갔던 옷을 다시 입고 나가는 것도 서로 개의치 않을 정도의 친밀함이 싹텄을때 쯤. 그 친구(=코털)도 어느새 그 모든 순간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 샤브샤브 집에서도, 침대에서도, 그녀가 나를 힐난하며 잘잘못을 따지고 있는 따가운 순간에도. 종종 인터넷에서 보던 '뀨잉' 이라는 의성어가 그녀의 콧구멍에서 현현하고 있었다. 미리 짚고 넘어가건데 코털 때문에 정이 떨어졌다거나 멀리 한다거나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넌 코털도 귀엽게 자라는구나' 라는 되먹지 않은 멘트를 쳤다가 이미 욕은 오지게 먹었으니 오해는 말았으면 좋겠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터럭 하나 조차도 헐어 상하지 않게 하는게 도리 라고는 하나, 그 터럭 하나가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할 때 우리 인간은, 정확히 나는. 깊고 깊은 번뇌의 골짜기를 얼마나 서성이게 되던가. 결론을 내렸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리 좋은 성품의 소유자는 아닌듯 하다. 하릴없이 휘날렸던건 그녀의 코털이 아니라 단지 내 마음이었구나. 유안진, 신달자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라는 수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은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 건널목이 아닌 대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 게다. 나 또한 그의 눈에 눈꼽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 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 게다. 지란지교는 '지초(芝草)와 난초(蘭草)의 교제(交際)' 라는 뜻이다. 흔히들 얘기하듯 모든 관계는 결국 친구관계로 수렴한다. 남녀관계 역시 우선 좋은 친구가 되면 마땅히 알아서 잘 굴러갈 노릇이다. 오늘부터 그녀의 코털은 지초, 내 코털은 난초다. 그간 그녀가 조용히 보아 넘긴게 고작 내 난초 뿐이랴. 내 번뇌의 골짜기보다도 훨씬 더 깊고 흉흉한 크레바스 같은 흠들을 그 너른 마음으로 무심히도 덮어 줬겠지.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홀로 삼켰을까. 뒤늦게 나도 혼자 흉내 내 보는 쌉싸래한 티타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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