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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11/12 03:25:22 |
Name | 구밀복검 |
Subject | 자승자박 : 동녘 출판사가 사과문을 게재했습니다. |
이틀 전인 10일 오전 11시 51에 올라왔던데, 홍차넷에서는 사과문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직까지 올라오지 않아 한 번 올려봅니다. 다음은 페이스북에 올라온 동녘의 사과문 전문입니다.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한 점에 사과를 드립니다. 다만 원작자의 의도와 그 의도를 해석하고 공감하며 책을 출판해왔던 저희로서는 또 다른 해석을 낯설게 받아들여 그와 관련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부디 앞서 게재된 글이 하나의 의견으로서만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쏟아진 다양한 의견들을 겸허히 청취하며 수용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보여주신 관심에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책들을 출판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미 다회 지적되었다시피 동녘 측의 기존 입장은 자신들이 출판해낸 완역본에서 밝힌 입장과 모순을 이룬다는 것이었죠. 다음은 동녘 출판본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에 실린 번역자의 해설입니다. 한 마디로 [동녘 측 주장은 동녘 측 주장으로 반박 가능]이 되겠습니다. 자신들이 출판물에서 공개적으로 개진한 입장을 '우리의 완역본을 봤다면 할 수 없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몰아붙였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네요. 동녘 측이 이러한 자신들의 모순을 인지한 것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일단 기존의 입장은 철회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이 건은 한 바퀴 돌아 해프닝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었지요. 애초에 작가도 아닌 출판사가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한 것부터가 명명백백히 오만하고 그릇된 일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신들이 이전에 뱉은 말은 기억도 못한 상태로 나온 것이니, 그 격이 질박하다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동녘의 삽질이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판매부수 증가에는 기여할 테니, 의도야 그럴 리가 없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노이즈 마케팅이나 다름 없는 것이 된 셈이라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그저 아이유의 해석이 후지다 vs 안 후지다로 가십거리로 끝날 일을, 동녘이 자신들의 언행은 망각한채 성급하게 경거망동해서 일을 키우는 사고를 치고, 이제와 수습을 해보려 하는 모양새가 한심하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싶네요. 일개 출판사의 우발적인 망동에 모두가 현혹되어 놀아난 셈입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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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포털 메인의 뉴스 기사들은 결국 동녘의 사과를 받아낸 아이유 라며 폭격하고있죠.
출판사 수습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 한 가수의 커리어가 개박살나고 있는데 사과문 달랑 걸어놓고 뭐하자는건지...
이번 사건으로 허지웅과 진중권은 아가리파이터 경력에 한줄 더 들어가게 되었고 윤종신은(이전 아프리카 건도 있긴 하지만) 트위터를 그만두고 관둬야할게 하나둘 늘어난다는 말과 월간윤종신 뮤비를 함께 올렸습니다.
말씀하신것처럼 후지다 vs 안후지다 로 그쳤어야 할 일이 아마테라스처럼 아직까지도 활활 타오르고 있네요. 뭐 하나 완전히 타버려야 불길이 잡힐런지요.
출판사 수습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 한 가수의 커리어가 개박살나고 있는데 사과문 달랑 걸어놓고 뭐하자는건지...
이번 사건으로 허지웅과 진중권은 아가리파이터 경력에 한줄 더 들어가게 되었고 윤종신은(이전 아프리카 건도 있긴 하지만) 트위터를 그만두고 관둬야할게 하나둘 늘어난다는 말과 월간윤종신 뮤비를 함께 올렸습니다.
말씀하신것처럼 후지다 vs 안후지다 로 그쳤어야 할 일이 아마테라스처럼 아직까지도 활활 타오르고 있네요. 뭐 하나 완전히 타버려야 불길이 잡힐런지요.
뭐랄까요.. 궤는 다르지만 예전에 잔혹동시 사건이랑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뭔가 되게 \'촌스러운\' 논쟁이라고 생각되는데 여기다 팬심 들어가고 앤티 들어가고 소아 들어가고 섹시코드 들어가고 등등 섞여버린 부대찌게 같이 되버린 논란이에요. 저는 연예인 팬질 제대로 해본적도 없고 뭐 이런쪽에 문외한이고 해서 심드렁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참 이해하기 힘든 사태이긴 합니다. 아마 여기에 대한 감수성 유무를 따지면 대략 기성세대와 아닌 세대를 나눌 수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리얼라이프의 제 주변엔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잔혹동시는 그나마 애들 키우는 사람들의 리액션이 있기는 했는데..
이걸 떠나서 원작자도 아니고 번역자도 아닌 번역물 출간만 한 출판사가 뭐라 한다는거 자체도 좀 이상하기도 하네요. 애시당초 발을 안담궜어야 하는데..
이걸 떠나서 원작자도 아니고 번역자도 아닌 번역물 출간만 한 출판사가 뭐라 한다는거 자체도 좀 이상하기도 하네요. 애시당초 발을 안담궜어야 하는데..
무엇보다 실제 어린애를 데려와 스타킹을 신긴것도 아니고 가상의 그림에 스타킹을 신긴거고 그 그림이 대놓고 성행위 장면이나 직접적 노출을 보여준것도 아닌데 왜 이 야단인지 모르겠습니다. 핀업걸 자세라고 하는데 핀업걸 자세가 뭐 특정자세로 정해져있는것도 아니고 그 아이의 자세를 핀업걸 자세라고 단정할수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섹시하다라는 표현이야 한국에서는 매력적이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나요. 뇌섹남이라는건 두뇌가 매력적인 남자를 말하는거지 두뇌가 뛰어나 섹스하고 싶은 남자를 말하는게 아니듯이요.
뮤비의 성적인 은유야 그 뮤비가 제제 뮤비도 아닌데 왜 거기에 끼워맞추는건지도 모르겠고...
섹시하다라는 표현이야 한국에서는 매력적이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나요. 뇌섹남이라는건 두뇌가 매력적인 남자를 말하는거지 두뇌가 뛰어나 섹스하고 싶은 남자를 말하는게 아니듯이요.
뮤비의 성적인 은유야 그 뮤비가 제제 뮤비도 아닌데 왜 거기에 끼워맞추는건지도 모르겠고...
저는 아이유를 좋아하는데도 둘 다 이해가 갔어요.
팬덤과 비팬덤의 흙탕물 싸움이라기보다 저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첫째 죽음인데 둘째는 도덕붕괴인 것 같아요. 언젠가 댓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 신은 영희가 편의점에서 과자를 훔친 걸 아시냐 물으면 다들 안다고 백프로 자신하지만 영희가 짜장면을 좋아하는지 짬뽕을 좋아하는지 아시냐 물으면 약간 주춤하다가 그렇다고 대답하거든요. 비종교인의 관점에서 신은 인간이 자신들 최고의 공포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상정해 놓은 가상의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신이 ... 더 보기
팬덤과 비팬덤의 흙탕물 싸움이라기보다 저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첫째 죽음인데 둘째는 도덕붕괴인 것 같아요. 언젠가 댓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 신은 영희가 편의점에서 과자를 훔친 걸 아시냐 물으면 다들 안다고 백프로 자신하지만 영희가 짜장면을 좋아하는지 짬뽕을 좋아하는지 아시냐 물으면 약간 주춤하다가 그렇다고 대답하거든요. 비종교인의 관점에서 신은 인간이 자신들 최고의 공포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상정해 놓은 가상의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신이 ... 더 보기
저는 아이유를 좋아하는데도 둘 다 이해가 갔어요.
팬덤과 비팬덤의 흙탕물 싸움이라기보다 저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첫째 죽음인데 둘째는 도덕붕괴인 것 같아요. 언젠가 댓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 신은 영희가 편의점에서 과자를 훔친 걸 아시냐 물으면 다들 안다고 백프로 자신하지만 영희가 짜장면을 좋아하는지 짬뽕을 좋아하는지 아시냐 물으면 약간 주춤하다가 그렇다고 대답하거든요. 비종교인의 관점에서 신은 인간이 자신들 최고의 공포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상정해 놓은 가상의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신이 인간의 선악, 도덕에 최고로 관심이 많은 사실을 두고 인간은 도덕의 붕괴를 죽음 못지 않게, 내지 죽음 다음으로 공포스러워 한다는 것 또한 유추할 수 있어요.
아이유논란은 \'어찌하다보니\' 이런 인간의 공포본능을 자극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팬덤과 비팬덤의 흙탕물 싸움이라기보다 저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첫째 죽음인데 둘째는 도덕붕괴인 것 같아요. 언젠가 댓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 신은 영희가 편의점에서 과자를 훔친 걸 아시냐 물으면 다들 안다고 백프로 자신하지만 영희가 짜장면을 좋아하는지 짬뽕을 좋아하는지 아시냐 물으면 약간 주춤하다가 그렇다고 대답하거든요. 비종교인의 관점에서 신은 인간이 자신들 최고의 공포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상정해 놓은 가상의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신이 인간의 선악, 도덕에 최고로 관심이 많은 사실을 두고 인간은 도덕의 붕괴를 죽음 못지 않게, 내지 죽음 다음으로 공포스러워 한다는 것 또한 유추할 수 있어요.
아이유논란은 \'어찌하다보니\' 이런 인간의 공포본능을 자극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애초에 작가도 아닌 출판사가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한 것부터가 명명백백히 오만하고 그릇된 일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신들이 이전에 뱉은 말은 기억도 못한 상태로 나온 것이니, 그 격이 질박하다 하겠습니다.]
이거야 말로 수용자, 혹은 창작자의 권위를 잣대에 올려놓는 발언입니다. 이 논리는 정확히 진중권씨의 그 야만적인 발언과 겹치죠.
\"어디 출판사 따위가.....\"
진중권씨는 트윗에서 [아이유 \'제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을 출판사가 독점할 수 있다고 ... 더 보기
이거야 말로 수용자, 혹은 창작자의 권위를 잣대에 올려놓는 발언입니다. 이 논리는 정확히 진중권씨의 그 야만적인 발언과 겹치죠.
\"어디 출판사 따위가.....\"
진중권씨는 트윗에서 [아이유 \'제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을 출판사가 독점할 수 있다고 ... 더 보기
[애초에 작가도 아닌 출판사가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한 것부터가 명명백백히 오만하고 그릇된 일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신들이 이전에 뱉은 말은 기억도 못한 상태로 나온 것이니, 그 격이 질박하다 하겠습니다.]
이거야 말로 수용자, 혹은 창작자의 권위를 잣대에 올려놓는 발언입니다. 이 논리는 정확히 진중권씨의 그 야만적인 발언과 겹치죠.
\"어디 출판사 따위가.....\"
진중권씨는 트윗에서 [아이유 \'제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을 출판사가 독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이 시대에 웬만하큼 무식하지않으면 할 수 없는 망발이죠. 문학에 대해 표준적 해석을 들이대는 것은 역사를 국정화하는 박근혜보다도 수준 떨어지는 행위입니다.] 라고 트윗했습니다.
저는 이 발언이 창작의 자유에 대한 논쟁의 발화점이라고 봅니다. 어떤 단어는 어떤 행위의 중립적인 속성을 무시하고 손쉽게 그것을 \"악\"이라 칭하며 판단을 쏠리게 만들죠.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을 출판사가 독점할 수 있다고 믿는 발언이 있었나요?
동녘의 \"항의문\"을 봅시다.
[물론 창작과 해석의 자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대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다섯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표현의 자유도 대중들의 공감하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제제에다가 망사스타킹을 신기고 핀업걸 자세라뇨...핀업걸은 굉장히 상업적이고 성적인 요소가 다분합니다. 그리고 제제가 순수하면서도 심한 행동을 많이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도 결국은 심각한 학대에 따른 반발심과 애정결핍에 따른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학대라고 하는 후천적 요인에서 나온 것이죠. 이를 두고 제제를 잔인하고 교활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 생각이 듭니다.]
이런 캐릭터의 이런 측면을 간과하고 성적 매력만 부여해서 재해석하는 것이 맞느냐? 라고 \"해석\"으로 \"항의\"하는 거죠.동녘은 분명히 \"창작과 해석의 자유\"를 원 항의문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니 이건 자승자박이 아니에요.
해석의 자유가 있으니 너네 마음대로 제제를 해석하고 놀려무나
제제는 섹시해~
야!! 너 누가 제제를 네 마음대로 해석하랬어!!
이게 아니라
해석의 자유가 있으니 너네 마음대로 제제를 해석하고 놀려무나
제제는 섹시해~
야... 암만 해석의 자유라지만, 제제가 섹시하다는 건 좀 그렇지 않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 이미지에 나온 책의 하이라이트 부분은 (저건 출판사도 아니고 번역자의 후기입니다) 딱히 상충하지 않죠. 동녘이 말하는 - 저 책에서 언급된 해석의 자유란 세상 모든 음란하고 잔인발칙한 상상들까지 다 커버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거야 상정 외니까 말을 안하는거죠. 그러니 해석의 자유라며 이제와서 해석의 자유를 못가지게 하냐, 라는 것은 말꼬투리 잡기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분법이죠. 그렇게 치면 이재수를 고소했던 서태지는 창작과 해석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인간이 됩니다. 서태지가 과연 그런 인간일까요?
[그런데 밍기뉴 관점에서 만든 노래가 제제는 교활하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상처받고 있을 수많은 제제들을 위로하기 위한 책이기도 하구요]
동녘의 원 항의문입니다. 아마 이 부분을 두고 구밀복검님은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한다고 했을텐데요. 그 비판은 지나칩니다.
그러한 비판은 \"작자의 의도와는 완전히 엇나가는 해석에 작자의 의도를 핑곗거리로 쓰는 경우\"에만 해당되는거죠.
스필버그가 초창기 만든 영화는 대부분 꿈과 희망, 가족을 이야기하려는 창작자의 의도가 있다 - 라는 해석도 그럼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하는 행위가 될까요?
어떤 작품을 읽고서 우리는 굳이 작자의 인터뷰나 해석을 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대부분의 추정을 기정사실화합니다.
동녘 출판사는 타당한 해석으로 대부분이 공감하는 \"작자의 의도\"를 이야기했기에 이것은 \"참칭\"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한다는 말도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정말로 해석의 자유가 모든 이에게 온당하다면, 그것은 \"창작자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거죠.)
제가 유명한 야설 작가고, 오즈의 마법사를 제 마음대로 바꿔서 도로시가 양철 나무꾼이랑 섹스하고, 사자랑 섹스하고, 허수아비랑 섹스하고, 마지막에는 오즈랑 포썸을 즐기다가 화가 난 일행에게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허수아비는 짚으로 도로시이 코와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졸라대며, 나무꾼은 도끼로 손가락 발가락을 하나씩 자르고, 사자는 발톱으로 도로시의 눈알을 긁고 머릿가죽을 벗기며 내장을 물어뜯고 오즈는 엉망이 된 시체를 끓여 먹는 하드코어 \"재해석\"을 했다고 칩시다.
그럼 여기에 대해 오즈의 마법사 원작 출판사는 침묵을 지켜야 제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게 될까요? 거기에는 얼마든지 보편타당한 해석을 근거로 \"이러한 재해석은 과하다\" 라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출판사의 \"권위\"에 기대서 아이유를 과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잘못이지 출판사가 항의한 것 자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그것이 해석의 자유와 부딪히는 것도 아닙니다. 해석의 자유가 있으니까 \"출판사의 해석\"과 \"아이유의 해석\"이 부딪힐 수 있는거죠.
황진미씨의 트윗을 복붙합니다.
창작과 비평은 함께 발전하는 것이다.비평에 대한 원천적인 무시는 더나은 작품의 창작을 저해한다.작가에게 창작의 고통이 있다면,비평가에게는 비평의 고통이 따른다. 또한 출판사도 단순히 \"책장사\"가 아니라 우리사회의 공론장에 기여하는 주체다
이거야 말로 수용자, 혹은 창작자의 권위를 잣대에 올려놓는 발언입니다. 이 논리는 정확히 진중권씨의 그 야만적인 발언과 겹치죠.
\"어디 출판사 따위가.....\"
진중권씨는 트윗에서 [아이유 \'제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을 출판사가 독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이 시대에 웬만하큼 무식하지않으면 할 수 없는 망발이죠. 문학에 대해 표준적 해석을 들이대는 것은 역사를 국정화하는 박근혜보다도 수준 떨어지는 행위입니다.] 라고 트윗했습니다.
저는 이 발언이 창작의 자유에 대한 논쟁의 발화점이라고 봅니다. 어떤 단어는 어떤 행위의 중립적인 속성을 무시하고 손쉽게 그것을 \"악\"이라 칭하며 판단을 쏠리게 만들죠.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을 출판사가 독점할 수 있다고 믿는 발언이 있었나요?
동녘의 \"항의문\"을 봅시다.
[물론 창작과 해석의 자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대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다섯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표현의 자유도 대중들의 공감하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제제에다가 망사스타킹을 신기고 핀업걸 자세라뇨...핀업걸은 굉장히 상업적이고 성적인 요소가 다분합니다. 그리고 제제가 순수하면서도 심한 행동을 많이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도 결국은 심각한 학대에 따른 반발심과 애정결핍에 따른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학대라고 하는 후천적 요인에서 나온 것이죠. 이를 두고 제제를 잔인하고 교활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 생각이 듭니다.]
이런 캐릭터의 이런 측면을 간과하고 성적 매력만 부여해서 재해석하는 것이 맞느냐? 라고 \"해석\"으로 \"항의\"하는 거죠.동녘은 분명히 \"창작과 해석의 자유\"를 원 항의문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니 이건 자승자박이 아니에요.
해석의 자유가 있으니 너네 마음대로 제제를 해석하고 놀려무나
제제는 섹시해~
야!! 너 누가 제제를 네 마음대로 해석하랬어!!
이게 아니라
해석의 자유가 있으니 너네 마음대로 제제를 해석하고 놀려무나
제제는 섹시해~
야... 암만 해석의 자유라지만, 제제가 섹시하다는 건 좀 그렇지 않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 이미지에 나온 책의 하이라이트 부분은 (저건 출판사도 아니고 번역자의 후기입니다) 딱히 상충하지 않죠. 동녘이 말하는 - 저 책에서 언급된 해석의 자유란 세상 모든 음란하고 잔인발칙한 상상들까지 다 커버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거야 상정 외니까 말을 안하는거죠. 그러니 해석의 자유라며 이제와서 해석의 자유를 못가지게 하냐, 라는 것은 말꼬투리 잡기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분법이죠. 그렇게 치면 이재수를 고소했던 서태지는 창작과 해석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인간이 됩니다. 서태지가 과연 그런 인간일까요?
[그런데 밍기뉴 관점에서 만든 노래가 제제는 교활하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상처받고 있을 수많은 제제들을 위로하기 위한 책이기도 하구요]
동녘의 원 항의문입니다. 아마 이 부분을 두고 구밀복검님은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한다고 했을텐데요. 그 비판은 지나칩니다.
그러한 비판은 \"작자의 의도와는 완전히 엇나가는 해석에 작자의 의도를 핑곗거리로 쓰는 경우\"에만 해당되는거죠.
스필버그가 초창기 만든 영화는 대부분 꿈과 희망, 가족을 이야기하려는 창작자의 의도가 있다 - 라는 해석도 그럼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하는 행위가 될까요?
어떤 작품을 읽고서 우리는 굳이 작자의 인터뷰나 해석을 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대부분의 추정을 기정사실화합니다.
동녘 출판사는 타당한 해석으로 대부분이 공감하는 \"작자의 의도\"를 이야기했기에 이것은 \"참칭\"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한다는 말도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정말로 해석의 자유가 모든 이에게 온당하다면, 그것은 \"창작자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거죠.)
제가 유명한 야설 작가고, 오즈의 마법사를 제 마음대로 바꿔서 도로시가 양철 나무꾼이랑 섹스하고, 사자랑 섹스하고, 허수아비랑 섹스하고, 마지막에는 오즈랑 포썸을 즐기다가 화가 난 일행에게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허수아비는 짚으로 도로시이 코와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졸라대며, 나무꾼은 도끼로 손가락 발가락을 하나씩 자르고, 사자는 발톱으로 도로시의 눈알을 긁고 머릿가죽을 벗기며 내장을 물어뜯고 오즈는 엉망이 된 시체를 끓여 먹는 하드코어 \"재해석\"을 했다고 칩시다.
그럼 여기에 대해 오즈의 마법사 원작 출판사는 침묵을 지켜야 제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게 될까요? 거기에는 얼마든지 보편타당한 해석을 근거로 \"이러한 재해석은 과하다\" 라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출판사의 \"권위\"에 기대서 아이유를 과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잘못이지 출판사가 항의한 것 자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그것이 해석의 자유와 부딪히는 것도 아닙니다. 해석의 자유가 있으니까 \"출판사의 해석\"과 \"아이유의 해석\"이 부딪힐 수 있는거죠.
황진미씨의 트윗을 복붙합니다.
창작과 비평은 함께 발전하는 것이다.비평에 대한 원천적인 무시는 더나은 작품의 창작을 저해한다.작가에게 창작의 고통이 있다면,비평가에게는 비평의 고통이 따른다. 또한 출판사도 단순히 \"책장사\"가 아니라 우리사회의 공론장에 기여하는 주체다
모든 맥락을 차단하고 아이유, 출판사, 평론가, 대중이 주체들이고 노래, 앨범, 책이 객체들이라고 생각하면 아이유는 정의롭지 못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정의란 표현의 자유, 사회적 통념, 도덕 관념, 심지어 사법적 판단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한 어떤 것이겠죠.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표현의 자유를 상회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의성과 내용의 적절성에 있는데, 피해를 받은 사람이 명확하지 않고 최대한 보수적으로 생각해도 미풍양속을 해친 정도가 매우 경미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사건의 경과와 맥락을 봐야합... 더 보기
그렇지만 사건의 경과와 맥락을 봐야합... 더 보기
모든 맥락을 차단하고 아이유, 출판사, 평론가, 대중이 주체들이고 노래, 앨범, 책이 객체들이라고 생각하면 아이유는 정의롭지 못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정의란 표현의 자유, 사회적 통념, 도덕 관념, 심지어 사법적 판단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한 어떤 것이겠죠.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표현의 자유를 상회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의성과 내용의 적절성에 있는데, 피해를 받은 사람이 명확하지 않고 최대한 보수적으로 생각해도 미풍양속을 해친 정도가 매우 경미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사건의 경과와 맥락을 봐야합니다. 정의의 여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눈먼자이기에 가장 나중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겁니다.
어차피 이 사건은 아이유에서 시작해서 아이유에서 끝나는 일입니다. 아이유는 보드리야드의 시뮬라시옹입니다. 이걸 하나 하나 따져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 따지고 있는 일 자체가 대중 매체를 소비하는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일입니다. 가장 능동적으로 소비하는 행동양식으로 나는 소비하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는 꼴이거든요.
우리가 이 사건에서 아이유라는 개인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주체로 다루고 있는 것 자체가 아이유를 시뮬라시옹으로 우상화시키는 집착적 소비 행태입니다. 그 인격을 보호하든 짓밟든 똑같습니다. 진짜 아이유는 인격이 없는 존재인데 진짜 진짜 아이유는 인격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진짜 진짜 ... 진짜 아이유는 우리가 인격을 만들어 준 존재입니다.
애초에 출판사가 페이스북 따위로 대중 가요 해석에 반대를 하고 나선 이유가 장기하 열애설과 상관이 없다고 진정으로 믿는 순간 아이유를 나는 논리왕 게임으로 소비하는 편집증 대열에 합류하는 겁니다.
메갈리안과 오유의 싸움도 결국 그들이 행동양태에서 조금도 변수 없이 움직입니다. 다만 메갈리안 쪽이 아이유를 상정할 때 피해와 가해 사이에서 훨씬 헷갈려할 뿐이죠. 인터넷 여론에서 아직까지도 종속되어 있는 마이너 여론의 비애죠.
아이유는 아이유로서 계속 있고 굳이 정의를 따지자면 이 이상 아이유에게 합당한 대우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이유는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추가로, 이 사건은 여태까지의 표현의 자유와 연관 있었던 그 어떤 사건과도 유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이유의 다른 사건과 유사하죠.
그렇지만 사건의 경과와 맥락을 봐야합니다. 정의의 여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눈먼자이기에 가장 나중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겁니다.
어차피 이 사건은 아이유에서 시작해서 아이유에서 끝나는 일입니다. 아이유는 보드리야드의 시뮬라시옹입니다. 이걸 하나 하나 따져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 따지고 있는 일 자체가 대중 매체를 소비하는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일입니다. 가장 능동적으로 소비하는 행동양식으로 나는 소비하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는 꼴이거든요.
우리가 이 사건에서 아이유라는 개인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주체로 다루고 있는 것 자체가 아이유를 시뮬라시옹으로 우상화시키는 집착적 소비 행태입니다. 그 인격을 보호하든 짓밟든 똑같습니다. 진짜 아이유는 인격이 없는 존재인데 진짜 진짜 아이유는 인격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진짜 진짜 ... 진짜 아이유는 우리가 인격을 만들어 준 존재입니다.
애초에 출판사가 페이스북 따위로 대중 가요 해석에 반대를 하고 나선 이유가 장기하 열애설과 상관이 없다고 진정으로 믿는 순간 아이유를 나는 논리왕 게임으로 소비하는 편집증 대열에 합류하는 겁니다.
메갈리안과 오유의 싸움도 결국 그들이 행동양태에서 조금도 변수 없이 움직입니다. 다만 메갈리안 쪽이 아이유를 상정할 때 피해와 가해 사이에서 훨씬 헷갈려할 뿐이죠. 인터넷 여론에서 아직까지도 종속되어 있는 마이너 여론의 비애죠.
아이유는 아이유로서 계속 있고 굳이 정의를 따지자면 이 이상 아이유에게 합당한 대우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이유는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추가로, 이 사건은 여태까지의 표현의 자유와 연관 있었던 그 어떤 사건과도 유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이유의 다른 사건과 유사하죠.
옆동네에서 소란 치르고 오느라 답이 늦었습니다.
전 초기 입장 글에서도 제제란 아이는 작가인 주제의 자전적인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잘못된 해석이다, 그런 아이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들어갔는데, 여기서 작품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고 흑백을 판정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설혹 동녘이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한들, 결과적으로는 그리 되었다고 보고요. 이런 사태가 초래된 이유는, 논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원작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적어도 논란에 참여한 사람들 중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완역본을 읽은 사람보다 읽지 않았던 사... 더 보기
전 초기 입장 글에서도 제제란 아이는 작가인 주제의 자전적인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잘못된 해석이다, 그런 아이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들어갔는데, 여기서 작품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고 흑백을 판정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설혹 동녘이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한들, 결과적으로는 그리 되었다고 보고요. 이런 사태가 초래된 이유는, 논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원작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적어도 논란에 참여한 사람들 중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완역본을 읽은 사람보다 읽지 않았던 사... 더 보기
옆동네에서 소란 치르고 오느라 답이 늦었습니다.
전 초기 입장 글에서도 제제란 아이는 작가인 주제의 자전적인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잘못된 해석이다, 그런 아이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들어갔는데, 여기서 작품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고 흑백을 판정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설혹 동녘이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한들, 결과적으로는 그리 되었다고 보고요. 이런 사태가 초래된 이유는, 논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원작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적어도 논란에 참여한 사람들 중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완역본을 읽은 사람보다 읽지 않았던 사람이 많았을 겁니다. 대부분 축약본으로 읽었거나 편집된 형태를 읽었거나 간접 경험을 통해 작품의 이미지 정도만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읽은 사람이라고 해도 근년에 일부러 찾아 읽진 않은 이상 상세하게 모든 내용을 파악하고 있진 않았을 테고요. 사실 저 역시도 몇몇 인상적인 장면 - 제제의 악동짓이나 구타받는 장면이나 뽀르뚜가와 결부된 것 등등 - 이나 기억하고 있고 전반적인 흐름과 톤과 캐릭터의 특성 정도나 기억하고 있는 정도지, 토씨 하나 대사 하나 어휘 하나를 디테일하게 기억하고 있진 못합니다. 다음 링크의 댓글 보고 생경했던 것도 그런 이유고..http://pgr21.com/?b=8&n=61960&c=2397204
말하자면 원전에 대해 [확신]을 갖고 견해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논쟁이 반복되는 와중에 원작에 서술된 제제의 다층적인 모습 - 누나에게 쌍욕을 한다든가, 뽀르뚜가를 소아성애자로 착각한 것이라든가, 그 외 막나가는 행동들 - 에 대해 생경함을 느낀 사람이 적잖았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고 봅니다.
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완역본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비판을 했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어렴풋이 이질감을 가지고 있거나, 긴가민가한 상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동녘이 출판사로서 비판을 하고, 동녘이 온갖 고생을 거쳐 완역본을 냈다는 사실이 전파되고, 동녘이 저렇게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소중한 작품을 아이유가 파괴한 것처럼 보이는 양상이 되고, 그러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아 역시 내가 느낀 이질감은 아이유가 원작과 전혀 상관 없는 말도 안 되는 파괴적 해석을 해서 일어난 것이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었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테고요. 그런데 막상 동녘의 비판이 충실한 원작 이해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논란의 여지가 많지요.
요컨대, 나름의 합리성에 기인해 비판을 출발한 사람도 적잖이 있겠지만, 원작에 대한 정보가 불충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꽤나 많을 수 있었다는 것이죠. 이 상황에서 동녘의 선언이 가해지고, 이때의 동녘은 언론이라기보다는 헌재에 가까웠죠. 동녘의 문제제기글은 마치 판결문처럼 작용했고요.
이외에, 저도 논의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인데, 동녘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지적되기도 하더군요. http://pgr21.com/?b=8&n=61960&c=2397303
전 초기 입장 글에서도 제제란 아이는 작가인 주제의 자전적인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잘못된 해석이다, 그런 아이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들어갔는데, 여기서 작품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고 흑백을 판정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설혹 동녘이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한들, 결과적으로는 그리 되었다고 보고요. 이런 사태가 초래된 이유는, 논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원작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적어도 논란에 참여한 사람들 중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완역본을 읽은 사람보다 읽지 않았던 사람이 많았을 겁니다. 대부분 축약본으로 읽었거나 편집된 형태를 읽었거나 간접 경험을 통해 작품의 이미지 정도만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읽은 사람이라고 해도 근년에 일부러 찾아 읽진 않은 이상 상세하게 모든 내용을 파악하고 있진 않았을 테고요. 사실 저 역시도 몇몇 인상적인 장면 - 제제의 악동짓이나 구타받는 장면이나 뽀르뚜가와 결부된 것 등등 - 이나 기억하고 있고 전반적인 흐름과 톤과 캐릭터의 특성 정도나 기억하고 있는 정도지, 토씨 하나 대사 하나 어휘 하나를 디테일하게 기억하고 있진 못합니다. 다음 링크의 댓글 보고 생경했던 것도 그런 이유고..http://pgr21.com/?b=8&n=61960&c=2397204
말하자면 원전에 대해 [확신]을 갖고 견해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논쟁이 반복되는 와중에 원작에 서술된 제제의 다층적인 모습 - 누나에게 쌍욕을 한다든가, 뽀르뚜가를 소아성애자로 착각한 것이라든가, 그 외 막나가는 행동들 - 에 대해 생경함을 느낀 사람이 적잖았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고 봅니다.
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완역본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비판을 했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어렴풋이 이질감을 가지고 있거나, 긴가민가한 상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동녘이 출판사로서 비판을 하고, 동녘이 온갖 고생을 거쳐 완역본을 냈다는 사실이 전파되고, 동녘이 저렇게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소중한 작품을 아이유가 파괴한 것처럼 보이는 양상이 되고, 그러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아 역시 내가 느낀 이질감은 아이유가 원작과 전혀 상관 없는 말도 안 되는 파괴적 해석을 해서 일어난 것이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었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테고요. 그런데 막상 동녘의 비판이 충실한 원작 이해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논란의 여지가 많지요.
요컨대, 나름의 합리성에 기인해 비판을 출발한 사람도 적잖이 있겠지만, 원작에 대한 정보가 불충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꽤나 많을 수 있었다는 것이죠. 이 상황에서 동녘의 선언이 가해지고, 이때의 동녘은 언론이라기보다는 헌재에 가까웠죠. 동녘의 문제제기글은 마치 판결문처럼 작용했고요.
이외에, 저도 논의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인데, 동녘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지적되기도 하더군요. http://pgr21.com/?b=8&n=61960&c=2397303
저는 사실 이 사태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이에 대한 미학적 해석을 어떻게 해야할까에 대해 고민을 좀 했는데요. 뭐 뻘글이라고 생각하시고 읽어주세요.
[예술의 해석을 의지가 구축한 하나의 편견으로 볼 수 있을까?]하는 물음을 먼저 던져보았습니다. 즉, 작품을 하나의 이데아로 보고 그 해석을 그림자로 본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죠. 플라톤은 그림자를 부정하기에 모든 해석은 일종의 전락이고, 최고의 해석은 [작품 그 자체]가 되어버리죠. 아이유가 그저 작품에 대... 더 보기
[예술의 해석을 의지가 구축한 하나의 편견으로 볼 수 있을까?]하는 물음을 먼저 던져보았습니다. 즉, 작품을 하나의 이데아로 보고 그 해석을 그림자로 본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죠. 플라톤은 그림자를 부정하기에 모든 해석은 일종의 전락이고, 최고의 해석은 [작품 그 자체]가 되어버리죠. 아이유가 그저 작품에 대... 더 보기
저는 사실 이 사태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이에 대한 미학적 해석을 어떻게 해야할까에 대해 고민을 좀 했는데요. 뭐 뻘글이라고 생각하시고 읽어주세요.
[예술의 해석을 의지가 구축한 하나의 편견으로 볼 수 있을까?]하는 물음을 먼저 던져보았습니다. 즉, 작품을 하나의 이데아로 보고 그 해석을 그림자로 본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죠. 플라톤은 그림자를 부정하기에 모든 해석은 일종의 전락이고, 최고의 해석은 [작품 그 자체]가 되어버리죠. 아이유가 그저 작품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다면 이런 의미에서 비난이 가능하겠지만, 아이유가 내놓은 것은 또 다른 이데아의 형상을 띠고 있죠. 즉 작품을 내놓은 것이죠. 아이유가 그가 구축하려는 예술의 분야에 있어서 궁극에 이르렀는지 아닌지는 제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비평의 궁극에 이르는 길은 예술의 형상을 띠는 것이라는 사실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자승자박에 관해서라면 제가 한 자승자박합니다. 가끔 제가 올리는 문학글에 \'현실세계의 윤리를 허구의 세상에 적용하는 것은 헛되다.\'하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자승자박이거든요. 만약 현실 세계의 윤리가 없다면 굳이 허구를 탐할 이유도 없지요.
[예술의 해석을 의지가 구축한 하나의 편견으로 볼 수 있을까?]하는 물음을 먼저 던져보았습니다. 즉, 작품을 하나의 이데아로 보고 그 해석을 그림자로 본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죠. 플라톤은 그림자를 부정하기에 모든 해석은 일종의 전락이고, 최고의 해석은 [작품 그 자체]가 되어버리죠. 아이유가 그저 작품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다면 이런 의미에서 비난이 가능하겠지만, 아이유가 내놓은 것은 또 다른 이데아의 형상을 띠고 있죠. 즉 작품을 내놓은 것이죠. 아이유가 그가 구축하려는 예술의 분야에 있어서 궁극에 이르렀는지 아닌지는 제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비평의 궁극에 이르는 길은 예술의 형상을 띠는 것이라는 사실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자승자박에 관해서라면 제가 한 자승자박합니다. 가끔 제가 올리는 문학글에 \'현실세계의 윤리를 허구의 세상에 적용하는 것은 헛되다.\'하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자승자박이거든요. 만약 현실 세계의 윤리가 없다면 굳이 허구를 탐할 이유도 없지요.
구밀복검님이 쓰신 논지와 흡사한 내용의 유게 게시물 http://pgr21.com/?b=10&n=256827 에서 저나 저 신경쓰여요 님이 지적하는 부분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구밀복검님이 제시하는 반론의 논지는 저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조금 어긋나있습니다. 이건 출판사의 \"선언\"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가치판단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심지어 저 유게글에서 출판사의 행위에 대한 저 신경쓰여요 님의 의견은 제 의견은 다릅니다) 저나 다른 분들은 지금 이 글의 논지 ... 더 보기
구밀복검님이 쓰신 논지와 흡사한 내용의 유게 게시물 http://pgr21.com/?b=10&n=256827 에서 저나 저 신경쓰여요 님이 지적하는 부분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구밀복검님이 제시하는 반론의 논지는 저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조금 어긋나있습니다. 이건 출판사의 \"선언\"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가치판단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심지어 저 유게글에서 출판사의 행위에 대한 저 신경쓰여요 님의 의견은 제 의견은 다릅니다) 저나 다른 분들은 지금 이 글의 논지 전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출판사의 해석을 비판하는 것은 \"한 입으로 두 말하고 있네\" 이런 거겠죠? 저는 저게 한 입으로 두말 한 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출판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 와 아무 상관이 없이요. 지엽적인 부분을 가지고 섬세하게 해야 할 가치판단을 \"퉁쳐버리는\" 식의 논지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해석의 자유가 있으니 너네 마음대로 제제를 해석하고 놀려무나
제제는 섹시해~
야!! 너 누가 제제를 네 마음대로 해석하랬어!!
이게 아니라
해석의 자유가 있으니 너네 마음대로 제제를 해석하고 놀려무나
제제는 섹시해~
야... 암만 해석의 자유라지만, 제제가 섹시하다는 건 좀 그렇지 않니?]
이렇다는 거죠.
다음으로 구밀복검님의 논지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출판사의 행위를 일종의 \"월권 행위\"로 바라보고 계시다는 겁니다. 사례를 들어볼까요. 은교의 원작자인 박범신은 금요일엔 수다다 에 출연해서 영화화된 은교가 좋았지만, 생이라는 시간의 사이클을 한번 역전시켜버린 원작의 주제가 축소되고, 그것이 여성을 향한 (늙은) 남성의 욕망으로만 소비되는 것은 아쉽다고 했습니다. 원작자가, 2차 해석을 두고, 자신의 의도를 직접 설명하며, 그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감독의 2차 해석을 직접 부정하고, 재단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하물며 원작에 대한 이해는 원작자가 가장 깊을 수 밖에 없겠죠. 그렇다면, 이것 역시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할까요? 혹은 그렇진 않을까요? 원작자라서 \"누군가가 참칭할 수 없는\" 권위를 가졌으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구밀복검님의 논지를 따라가면 \"출판사\"는 감히 그럴 수 없지만 \"원작자(창작자)\"는 그래도 된다는 함정에 빠집니다. \"표현의 자유\"에서 \"창작자의 권위\"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진중권식 야만입니다. 해석의 반론을 제기하는 데 \"출판사\" 따위가 다 안다고 가정한다는 것을 비웃고 계시는데, 그렇다면 과연 원작이란 어느 누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것이 소비되는 데는 그 어떤 권위도 \"합리타당한 비평과 분석\"에 이길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소비되는 과정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해석에서 당위적 우열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기에 표현의 자유, 비판의 자유는 평등한 것이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표현의 자유, 비판의 자유는 그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그것은 오로지 의견의 정합성 그 자체로 우리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그것은 길거리에 노숙하고 있던 심성진(52, 무직)이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어렴풋한 이해를 가진 오영아(16, 서초중)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름 글쟁이로 밥벌어먹는 정이현( ??, 소설가)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얼마나 알고서 그런 비판을 하느냐, 를 적용하면 여기에 대해서는 출판사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 미싱질을 해야 합니다.
출판사 너네는 완역본 뭐 얼마나 잘 안다고? 여기 사람들은 그 완역본을 다 알고 비판하는 것도 아닌데? 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해석을 한 사람이 이 사안에 대해 입을 열 수 있다\" 라는 권위 부여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다는 겁니다. 어찌보면 비평의 양비론이죠. 아이유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잘 모른다고? 그럼 출판사 너네는 얼마나 잘 아는데? 그 [확신]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이해를 담보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작품의 2차 해석에 반발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지 사회적인 합의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자유\"라는 가치관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구밀복검님은 이 \"자유\"를 \"이해도\"란 조건으로 제한하고 계시는 게 되구요. 그리고 출판사 정도라면 원작에 대한 이해도는 원작자 정도는 아닐지라도, 거의 그와 흡사한 수준이라고 우리는 어림짐작할 수 있죠.
[아 역시 내가 느낀 이질감은 아이유가 원작과 전혀 상관 없는 말도 안 되는 파괴적 해석을 해서 일어난 것이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었어]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대중\"이라는 그룹의 \"속성\"입니다. 그것은 그냥 어쩔 수 없는 한계고, 우리 모두가 저지르는 실수이면서 어떤 주장에 대해서는 유효한 근거가 되기도 하는 거죠. 대중들은 그 권위를 출판사에 \"자기들이 부여한 거고\" \"자기들이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 부분에서 비판의 책임은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출판사의 권위를 등에 업고 날 뛴 대중\"에게 있는거죠. 이동진을 참조하면 트랜스포머는 구리다고 하더라, 나도 [왜 그런지 정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트랜스포머를 보면서 구리다고 느꼈다. 그럼 트랜스포머를 비평한 이 대중 역시 완벽한 이해가 없고 평론가의 권위로 자신의 의견을 \"보좌\"하고 있으니 이는 \"옳지 못한\" 평가이며 여기서 이동진은 \"언론이라기보다는 헌재에 가까운\" 행위를 한 게 되는 걸까요? (이런 식의 단어 사용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이런 식의 엄격함을 \"대중\"이 \"문화 상품\"에 대한 감상을 말하는 데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거야말로 진중권이 디워가 구리다고 말 할 때 \"영화평론가도 아니고 감독도 아닌게\" 라고 대중들이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하던 논리와 흡사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대중 속 개개인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지 \"권위가 부여된\" 그 누군가가 \"아, 내가 이렇게 말하면 대중들이 이렇게 휩쓸리겠구나\" 하고 예언자 같은 몸가짐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니죠. 이전부터 \"동녘출판사\"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문학 평단의 권위자였던 것도 아니고 듣보잡에 가까운 상황에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대중들이 내 말을 이렇게 저렇게 퍼트리며 진영 충돌이 발생하겠군\" 하고 신중했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건 대중들이 \"옳다구나\" 하고 자신의 주장에 보태쓴 것에 불과합니다. 왜 이 책임을 출판사에게 묻고 계시는 건지요. 그 권위라는 게 출판사 측에 있지도 않았고, 대중들은 자기 마음대로 순식간에 반응해서 지들이 인용하고 써먹어댄건데요.
(이 문단을 읽으시면 좀 언짢으시겠지만 저한테는 더 은유적이고 온건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글깜냥이 없습니다. 구밀복검님의 양해를 바랍니다. 이 비판은 \"글\"에 한정됩니다)
http://pgr21.com/?b=8&n=61960&c=2397204 이 링크의 글을 근거로 쓰는 구밀복검님의 자세는 \"강경한 논조\"와 부합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강경하게 말하는 글이라면 거기에는 \"이러이러한 나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논지의 바탕 역시 있어야죠. 따라서 출판사의 권위적 해석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려면 왜 그 해석이 글러먹었는지, 그 이해도는 어째서 이렇게 떨어지는지를 \"본인의 근거\"로 제시하셔야죠. 그런데 출판사의 해석에 의구심을 품고 이를 적극적으로 힐난하는 구밀복검님도 정작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라는 원작에 대한 이해도는 가물가물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출판사의 해석이 다 맞지 않을 수도 있다 - 라는 \"원작자가 아니니 출판사의 해석 또한 정답은 아니다\" 라는 상대주의식 논지와, 논쟁을 하다 \"줍게 된\" 남의 근거만이 존재합니다. 첫번째 논지는 어째서 틀렸는지 이미 지적해드렸고, 제가 지금 항의하는 두번째 지점은 어쩌다 맞아떨어진 조각을 \"강경한 주장\"의 근거로 쓰는 이 글 속의 구밀복검님의 태도가 좀 \"쪼잔해\" 보인다는 거죠. 출판사 이 웃기지도 않는 것들이?? 작가도 아닌 주제에? 한 입으로 두 말하네? 너네는 뭘 얼마나 잘 안다고 떠드냐? (물론 나도 다 알고 떠드는 건 아니지만) 아, 이런 근거도 있었습니까? 자 다들 보쇼. 출판사의 이해가 딸린다는 증거를 여기 이 사람이 말하고 있네!! 이렇게 가면 구밀복검님이 내세운 \"비평의 양비론\"의 덫에 스스로 걸리고 맙니다.
http://pgr21.com/?b=8&n=61960&c=2397204 이 링크 자체를 반박해보죠. \'소설 속에 원래 나왔다\" 는 것은 변호로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렇게 치면 장미, 시리얼, 스타킹, 우유, 아이유의 로리타 컨셉에 있는 그 모든 사물과 소재들은 자연 상태에서는 아무런 성적 함의도 갖지 않으며 가치중립적인 물건들이죠. 중요한 것은 2차 해석을 하는 이가 \"어떻게 활용했는가\" 이지 \"원작에 나왔느냐 안나왔느냐\" 가 아닙니다. 2차 해석에서 \"어떻게 보이는가\" 를 가지고 이야기해야지 \"원작에 나왔느냐 안나왔느냐\"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터보레이터도 깔 수가 없죠.\"어서 나무에 올라와\" \"하나뿐인 꽃을 꺾어가\" \"Climb up me\" 이런 것도 다 2차 해석인 \"제제\"라는 아이유의 노래 속에서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가 중요합니다. 원작에 나오냐 안나오느냐는 별로 무게를 갖지 못합니다. 똑같은 장면을 패러디하고, 오마쥬를 해도 그 인상은 천지차이가 됩니다. 이재수의 립싱크가 원작과 흡사하다고 해서 그게 저질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죠.
동녘의 동기를 붙이는 건 굳이 제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일 겁니다. 김혜리의 평론에 제가 동감할 수 없다고 해서 김혜리가 그 영화사로부터 뒷돈을 받아먹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며 불필요한 해석입니다. 저는 구밀복검님이 왜 이렇게 출판사를 \"악의 축\" 혹은 \"멍청이\"로 몰려고 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이 글 전체가 지나치게 정치적입니다. 저는 어떤 글이 논지의 부족함을 메꾸려고 할 때 \"과격한 단어\"를 동원하는 현상을 발견하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구밀복검님의 이 글 역시 그런 부분들이 보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평가하는 것이 상당히 주제넘은 짓인줄은 알고 있지만, 구밀복검님을 글쟁이로서 어느 정도 존중하고 있기에 이렇게 쓴 소리 남깁니다. (저는 구밀복검님이 이렇게\"밖에\"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 나름 신선하고 흥미롭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출판사의 해석을 비판하는 것은 \"한 입으로 두 말하고 있네\" 이런 거겠죠? 저는 저게 한 입으로 두말 한 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출판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 와 아무 상관이 없이요. 지엽적인 부분을 가지고 섬세하게 해야 할 가치판단을 \"퉁쳐버리는\" 식의 논지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해석의 자유가 있으니 너네 마음대로 제제를 해석하고 놀려무나
제제는 섹시해~
야!! 너 누가 제제를 네 마음대로 해석하랬어!!
이게 아니라
해석의 자유가 있으니 너네 마음대로 제제를 해석하고 놀려무나
제제는 섹시해~
야... 암만 해석의 자유라지만, 제제가 섹시하다는 건 좀 그렇지 않니?]
이렇다는 거죠.
다음으로 구밀복검님의 논지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출판사의 행위를 일종의 \"월권 행위\"로 바라보고 계시다는 겁니다. 사례를 들어볼까요. 은교의 원작자인 박범신은 금요일엔 수다다 에 출연해서 영화화된 은교가 좋았지만, 생이라는 시간의 사이클을 한번 역전시켜버린 원작의 주제가 축소되고, 그것이 여성을 향한 (늙은) 남성의 욕망으로만 소비되는 것은 아쉽다고 했습니다. 원작자가, 2차 해석을 두고, 자신의 의도를 직접 설명하며, 그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감독의 2차 해석을 직접 부정하고, 재단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하물며 원작에 대한 이해는 원작자가 가장 깊을 수 밖에 없겠죠. 그렇다면, 이것 역시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할까요? 혹은 그렇진 않을까요? 원작자라서 \"누군가가 참칭할 수 없는\" 권위를 가졌으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구밀복검님의 논지를 따라가면 \"출판사\"는 감히 그럴 수 없지만 \"원작자(창작자)\"는 그래도 된다는 함정에 빠집니다. \"표현의 자유\"에서 \"창작자의 권위\"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진중권식 야만입니다. 해석의 반론을 제기하는 데 \"출판사\" 따위가 다 안다고 가정한다는 것을 비웃고 계시는데, 그렇다면 과연 원작이란 어느 누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것이 소비되는 데는 그 어떤 권위도 \"합리타당한 비평과 분석\"에 이길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소비되는 과정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해석에서 당위적 우열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기에 표현의 자유, 비판의 자유는 평등한 것이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표현의 자유, 비판의 자유는 그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그것은 오로지 의견의 정합성 그 자체로 우리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그것은 길거리에 노숙하고 있던 심성진(52, 무직)이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어렴풋한 이해를 가진 오영아(16, 서초중)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름 글쟁이로 밥벌어먹는 정이현( ??, 소설가)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얼마나 알고서 그런 비판을 하느냐, 를 적용하면 여기에 대해서는 출판사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 미싱질을 해야 합니다.
출판사 너네는 완역본 뭐 얼마나 잘 안다고? 여기 사람들은 그 완역본을 다 알고 비판하는 것도 아닌데? 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해석을 한 사람이 이 사안에 대해 입을 열 수 있다\" 라는 권위 부여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다는 겁니다. 어찌보면 비평의 양비론이죠. 아이유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잘 모른다고? 그럼 출판사 너네는 얼마나 잘 아는데? 그 [확신]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이해를 담보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작품의 2차 해석에 반발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지 사회적인 합의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자유\"라는 가치관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구밀복검님은 이 \"자유\"를 \"이해도\"란 조건으로 제한하고 계시는 게 되구요. 그리고 출판사 정도라면 원작에 대한 이해도는 원작자 정도는 아닐지라도, 거의 그와 흡사한 수준이라고 우리는 어림짐작할 수 있죠.
[아 역시 내가 느낀 이질감은 아이유가 원작과 전혀 상관 없는 말도 안 되는 파괴적 해석을 해서 일어난 것이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었어]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대중\"이라는 그룹의 \"속성\"입니다. 그것은 그냥 어쩔 수 없는 한계고, 우리 모두가 저지르는 실수이면서 어떤 주장에 대해서는 유효한 근거가 되기도 하는 거죠. 대중들은 그 권위를 출판사에 \"자기들이 부여한 거고\" \"자기들이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 부분에서 비판의 책임은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출판사의 권위를 등에 업고 날 뛴 대중\"에게 있는거죠. 이동진을 참조하면 트랜스포머는 구리다고 하더라, 나도 [왜 그런지 정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트랜스포머를 보면서 구리다고 느꼈다. 그럼 트랜스포머를 비평한 이 대중 역시 완벽한 이해가 없고 평론가의 권위로 자신의 의견을 \"보좌\"하고 있으니 이는 \"옳지 못한\" 평가이며 여기서 이동진은 \"언론이라기보다는 헌재에 가까운\" 행위를 한 게 되는 걸까요? (이런 식의 단어 사용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이런 식의 엄격함을 \"대중\"이 \"문화 상품\"에 대한 감상을 말하는 데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거야말로 진중권이 디워가 구리다고 말 할 때 \"영화평론가도 아니고 감독도 아닌게\" 라고 대중들이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하던 논리와 흡사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대중 속 개개인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지 \"권위가 부여된\" 그 누군가가 \"아, 내가 이렇게 말하면 대중들이 이렇게 휩쓸리겠구나\" 하고 예언자 같은 몸가짐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니죠. 이전부터 \"동녘출판사\"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문학 평단의 권위자였던 것도 아니고 듣보잡에 가까운 상황에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대중들이 내 말을 이렇게 저렇게 퍼트리며 진영 충돌이 발생하겠군\" 하고 신중했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건 대중들이 \"옳다구나\" 하고 자신의 주장에 보태쓴 것에 불과합니다. 왜 이 책임을 출판사에게 묻고 계시는 건지요. 그 권위라는 게 출판사 측에 있지도 않았고, 대중들은 자기 마음대로 순식간에 반응해서 지들이 인용하고 써먹어댄건데요.
(이 문단을 읽으시면 좀 언짢으시겠지만 저한테는 더 은유적이고 온건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글깜냥이 없습니다. 구밀복검님의 양해를 바랍니다. 이 비판은 \"글\"에 한정됩니다)
http://pgr21.com/?b=8&n=61960&c=2397204 이 링크의 글을 근거로 쓰는 구밀복검님의 자세는 \"강경한 논조\"와 부합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강경하게 말하는 글이라면 거기에는 \"이러이러한 나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논지의 바탕 역시 있어야죠. 따라서 출판사의 권위적 해석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려면 왜 그 해석이 글러먹었는지, 그 이해도는 어째서 이렇게 떨어지는지를 \"본인의 근거\"로 제시하셔야죠. 그런데 출판사의 해석에 의구심을 품고 이를 적극적으로 힐난하는 구밀복검님도 정작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라는 원작에 대한 이해도는 가물가물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출판사의 해석이 다 맞지 않을 수도 있다 - 라는 \"원작자가 아니니 출판사의 해석 또한 정답은 아니다\" 라는 상대주의식 논지와, 논쟁을 하다 \"줍게 된\" 남의 근거만이 존재합니다. 첫번째 논지는 어째서 틀렸는지 이미 지적해드렸고, 제가 지금 항의하는 두번째 지점은 어쩌다 맞아떨어진 조각을 \"강경한 주장\"의 근거로 쓰는 이 글 속의 구밀복검님의 태도가 좀 \"쪼잔해\" 보인다는 거죠. 출판사 이 웃기지도 않는 것들이?? 작가도 아닌 주제에? 한 입으로 두 말하네? 너네는 뭘 얼마나 잘 안다고 떠드냐? (물론 나도 다 알고 떠드는 건 아니지만) 아, 이런 근거도 있었습니까? 자 다들 보쇼. 출판사의 이해가 딸린다는 증거를 여기 이 사람이 말하고 있네!! 이렇게 가면 구밀복검님이 내세운 \"비평의 양비론\"의 덫에 스스로 걸리고 맙니다.
http://pgr21.com/?b=8&n=61960&c=2397204 이 링크 자체를 반박해보죠. \'소설 속에 원래 나왔다\" 는 것은 변호로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렇게 치면 장미, 시리얼, 스타킹, 우유, 아이유의 로리타 컨셉에 있는 그 모든 사물과 소재들은 자연 상태에서는 아무런 성적 함의도 갖지 않으며 가치중립적인 물건들이죠. 중요한 것은 2차 해석을 하는 이가 \"어떻게 활용했는가\" 이지 \"원작에 나왔느냐 안나왔느냐\" 가 아닙니다. 2차 해석에서 \"어떻게 보이는가\" 를 가지고 이야기해야지 \"원작에 나왔느냐 안나왔느냐\"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터보레이터도 깔 수가 없죠.\"어서 나무에 올라와\" \"하나뿐인 꽃을 꺾어가\" \"Climb up me\" 이런 것도 다 2차 해석인 \"제제\"라는 아이유의 노래 속에서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가 중요합니다. 원작에 나오냐 안나오느냐는 별로 무게를 갖지 못합니다. 똑같은 장면을 패러디하고, 오마쥬를 해도 그 인상은 천지차이가 됩니다. 이재수의 립싱크가 원작과 흡사하다고 해서 그게 저질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죠.
동녘의 동기를 붙이는 건 굳이 제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일 겁니다. 김혜리의 평론에 제가 동감할 수 없다고 해서 김혜리가 그 영화사로부터 뒷돈을 받아먹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며 불필요한 해석입니다. 저는 구밀복검님이 왜 이렇게 출판사를 \"악의 축\" 혹은 \"멍청이\"로 몰려고 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이 글 전체가 지나치게 정치적입니다. 저는 어떤 글이 논지의 부족함을 메꾸려고 할 때 \"과격한 단어\"를 동원하는 현상을 발견하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구밀복검님의 이 글 역시 그런 부분들이 보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평가하는 것이 상당히 주제넘은 짓인줄은 알고 있지만, 구밀복검님을 글쟁이로서 어느 정도 존중하고 있기에 이렇게 쓴 소리 남깁니다. (저는 구밀복검님이 이렇게\"밖에\"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 나름 신선하고 흥미롭습니다)
창작자의 해석조차도 작품 해석에 있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순 없을 겁니다. 그러나 논쟁의 영역에 있고, 모든 경우에 깔끔하게 창작자를 추방할 수 없는 것이죠. 어쨌든 작가의 창작 노트와 의도를 모두 참고하긴 하니까요. 이렇게 창작자는 모호한 존재로 남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창작자 역시도 모두와 똑같은 독자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점들이 있죠. 토론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토론이 어떻게 되든 간에, 창작자도 독자와 다를 바가 전혀 없든 아니면 그래도 다를 바가 영역에 따라 조금 있... 더 보기
창작자의 해석조차도 작품 해석에 있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순 없을 겁니다. 그러나 논쟁의 영역에 있고, 모든 경우에 깔끔하게 창작자를 추방할 수 없는 것이죠. 어쨌든 작가의 창작 노트와 의도를 모두 참고하긴 하니까요. 이렇게 창작자는 모호한 존재로 남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창작자 역시도 모두와 똑같은 독자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점들이 있죠. 토론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토론이 어떻게 되든 간에, 창작자도 독자와 다를 바가 전혀 없든 아니면 그래도 다를 바가 영역에 따라 조금 있든 간에, 최소한 출판사가 [창작자가 가질 수도 있는 권위]를 가질 일이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쟁론의 여지가 없죠. 출판사는 왕천군님 말씀대로 똑같은 독자일 뿐입니다.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면 어느 누구가 권위를 참칭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동녘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거나 그네들이 권위를 참칭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태가 전개된 실질적인 양상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제 주장은 작품 해석의 권리를 가진 이는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이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그야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어디까지나 바람직할 따름이지요). 그것이 아니라, 그저 동녘이 권위를 담지하게 된 매커니즘을 기술한 거죠. 이 논란에 참여한 사람들의 평균적인 원작의 내용 숙지 정도가 충분치 못했다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바고, 그런 상황에서는 몇몇 지적권위를 참칭하는 이가 출현하기 쉬운 조건이 형성되며, 이번 건에서는 동녘이 이를 담당했다는 것이죠. \'출판사\'라는 직함은 더더욱 힘을 미치고요. 예컨대, 모두가 유럽 축구에 대한 이해도가 부실한 상황에서는 박문성이나 서형욱 같은 이가 지적 권위를 획득하고 누군가를 쉬 억압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해설자\', \'유럽 축구학 유학파\'라는 직함은 여기에 힘을 한층 실어주게 되고요. 여기서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박문성이나 서형욱 같은 이가 그렇게 지적 권위를 휘두르는 것의 문제가 그네들에게 이견에 반박을 가할 표현의 자유가 없어서가 아니거든요. 실질적인 권력과 권위의 문제죠. 동녘도 마찬가지입니다. 출판사도 작가도 해석에 찬반을 표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적인 것이고, 실제로 출판사가 이 건에 있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명목을 뛰어넘는 실질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왕천군님께서 [그리고 출판사 정도라면 원작에 대한 이해도는 원작자 정도는 아닐지라도, 거의 그와 흡사한 수준이라고 우리는 어림짐작할 수 있죠.]라고 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출판사는 권위를 확보하기가 매우 용이합니다. 우리와 왕천군님과 제가 모두 쉬 짐작할 수 있는 바라면,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결과로도 증명되었다면, 출판사 입장에서도 무의식적나마 짐작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요.
그나마 이것이 정말 작품의 해석에 대한 것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런 것도 아니지요. 아이유라는 인물의 캐릭터 재창작에 대한 것입니다. 말이 재해석이라 쓰이므로 작품 해석에 대한 것이라고 도맷금으로 넘어가는 것이지, 실제로는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원작의 해석과 원작을 소재로 한 2차 창작은 같은 궤에 있지 않지요. 예컨대 아이유의 독후감이 올라왔고 이에 대해 동녘에서 반박을 했다면, 여전히 권위 참칭이라는 껄끄러운 문제는 남지만, 그것을 논리, [내가 생각하는 일관성 있고 작품에 들어맞는 독해]를 통해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독해에 대해서는 옳은 독해와 그른 독해가 논해지며 흑백이 가려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동녘의 일련의 행보를 보면 그것이 가능했을 성 싶지 않고 그 경우에는 현재와 똑같이 헬게이트가 열렸겠습니다만 여하간. 그런데 특정인의 캐릭터 메이킹이나 동인지 같은 2차 창작에 있어서 옳고 그름이란 게 존재할 수는 없지요. 매력적이냐 그렇지 않으냐만 존재할 뿐이지요. 가령 <삼국장군전> 같은 만화책을 두고서 장비가 여자로 나왔으니 잘못된 작품이라고 한다면 어불성설이겠지요. <해리 포터>의 동인지를 두고서 문학 수첩에서 잘못된 해석을 운운한다고 해도 웃음거리가 될 테고요(이 경우에는 조앤 K 롤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물론 그러한 2차 창작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기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게드 전기>가 모두에게 외면받는 것처럼 쌍욕을 먹을 수도 있죠. 딱 그렇게 취향과 선호의 문제로 돌아가면 될 문제였지요. 옳음과 그름이 아니라 말이지요.
그나마 동녘이 작품의 정확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었다면 적어도 정합성이라도 따져보았겠습니다만, 그렇지도 않았지요. 이에 대해 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물으실 수 있겠습니다만, 제제를 [일면적]으로 해석하고 [정답을 도출]하는 것을 반박하는 데에 있어서 작품 전체를 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하에서 반례를 제시하면 되죠.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특성들을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작품의 일부에서도 그 정도로 나오는데 전체에서는 오죽할까요. 제가 링크를 건 것 역시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제가 기존에 알고 있던 부분만으로도 이미 일면적 해석론의 관점에서는 일관성 있는 수습이 불가능한데, 보다 상세히 작품을 꿰고 계신 분이 있고, 그 경우에는 더 걷잡을 수 없이 논리의 구멍이 발견된다는 것일 따름이죠. 물론 링크 드린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라도 제가 기존에 기억하고 있던 부분으로라도 최소한 동녘 쪽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바로도 제제는 뽀르뚜가를 처음 보고 쇼타콘 변태 소아 성욕자로 오인하기도 하고, 누나에게 갈보라고 욕하는 것을 밥 먹듯 하고, 밍기뉴와 부비적거리기도 하고(물론 이는 전혀 성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 외에도 일탈적인 행동을 보이는, 우리네의 악의어린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마냥 불쌍하고 순수한 아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캐릭터로서, 흔히 어른들이 특정한 유형의 아이들을 두고 말할 때 쓰는 표현인 \'맹랑하다, 앙큼하다, 잔망스럽다\'가 어울리는 캐릭터죠. 이렇게 비틀린 일면들이 성장해가며 완숙해지고 치유되는 것 자체가 소재이고 주제이지요. 동녘측의 해석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이런 양상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일관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렇듯, 제 일련의 가치 판단들은 최소주의적입니다. 이 논란이 맞닿고 있는 지점들의 모든 논의를 정리하고 결을 정돈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동녘의 태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최소한]을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제 관심사는 동녘에 의해 촉발된 이 우리네의 혼돈의 개탄스러움이지, 그 외의 심화적인 논의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호의적으로 봐주더라도 최소한이 확보가 안 된다는 것이고요. 창작자라면 또 모르겠는데 출판사고, 순수히 작품 해석의 정합성에 대한 것이면 또 모르겠는데 2차 창작에 대한 것이고, 그나마 작품을 전문성 있게 이해하고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가물가물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개 독자인 나조차도 헛점이 드러나 보여서 정말 제대로 읽어본 사람 눈에는 얼마나 추가적으로 약점이 보일지 모르겠고, 해서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가 안 된다는 이야기이지요.
동녘의 동기에 대한 부분은, 곁다리로 넣은 것이기도 하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지만, 동녘측이 자신들이 이 건에서 가져갈 수 있는 <출판사>라는 직함이 띨 수 있는 권위를 고려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하죠. 물론 의혹은 의혹일 따름이고 어디까지나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기는 하죠. 저 링크를 참고할 경우, 이 건은 우발적인 삽질(제가 본문에 쓴 것처럼)이었든가, 의도적인 시비(링크처럼)였든가 둘 중 하나가 되고, 그에 따라 멍청이 혹은 악의 축 둘 중 하나로 판단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을 제시하기 위한 것일 따름이지요.
사실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며 서로 다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 궁극적으로 이것이 상한 떡밥이라고 생각하고, 이 글 역시 그를 역설하기 위해 쓴 것이었죠. 애초에 동녘 아니면 이렇게 커질 일도 아닌데, 동녘이 분탕질을 해서 모두 심력 낭비만 했다는. 이 점에서 제 동기도 설명이 될 것 같고요. 제가 좀 헐겁게 이야기한 것은, 대체로들 이 건에 대해 나하고 비슷하게들 생각하고 있겠거니, 그러니 내가 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다들 알아듣겠거니 가벼이 생각했기 따름이지,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뭐 지금와 생각하면 오판이었을 따름입니다만. 상한 떡밥임을 역설하려다가 결과적으로 저 역시도 역설적으로 상한 떡밥에 참전하게 되었으니 역설의 역설이고 자승자박의 자승자박인 셈이겠지요.
이에 대해 동녘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거나 그네들이 권위를 참칭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태가 전개된 실질적인 양상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제 주장은 작품 해석의 권리를 가진 이는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이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그야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어디까지나 바람직할 따름이지요). 그것이 아니라, 그저 동녘이 권위를 담지하게 된 매커니즘을 기술한 거죠. 이 논란에 참여한 사람들의 평균적인 원작의 내용 숙지 정도가 충분치 못했다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바고, 그런 상황에서는 몇몇 지적권위를 참칭하는 이가 출현하기 쉬운 조건이 형성되며, 이번 건에서는 동녘이 이를 담당했다는 것이죠. \'출판사\'라는 직함은 더더욱 힘을 미치고요. 예컨대, 모두가 유럽 축구에 대한 이해도가 부실한 상황에서는 박문성이나 서형욱 같은 이가 지적 권위를 획득하고 누군가를 쉬 억압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해설자\', \'유럽 축구학 유학파\'라는 직함은 여기에 힘을 한층 실어주게 되고요. 여기서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박문성이나 서형욱 같은 이가 그렇게 지적 권위를 휘두르는 것의 문제가 그네들에게 이견에 반박을 가할 표현의 자유가 없어서가 아니거든요. 실질적인 권력과 권위의 문제죠. 동녘도 마찬가지입니다. 출판사도 작가도 해석에 찬반을 표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적인 것이고, 실제로 출판사가 이 건에 있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명목을 뛰어넘는 실질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왕천군님께서 [그리고 출판사 정도라면 원작에 대한 이해도는 원작자 정도는 아닐지라도, 거의 그와 흡사한 수준이라고 우리는 어림짐작할 수 있죠.]라고 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출판사는 권위를 확보하기가 매우 용이합니다. 우리와 왕천군님과 제가 모두 쉬 짐작할 수 있는 바라면,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결과로도 증명되었다면, 출판사 입장에서도 무의식적나마 짐작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요.
그나마 이것이 정말 작품의 해석에 대한 것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런 것도 아니지요. 아이유라는 인물의 캐릭터 재창작에 대한 것입니다. 말이 재해석이라 쓰이므로 작품 해석에 대한 것이라고 도맷금으로 넘어가는 것이지, 실제로는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원작의 해석과 원작을 소재로 한 2차 창작은 같은 궤에 있지 않지요. 예컨대 아이유의 독후감이 올라왔고 이에 대해 동녘에서 반박을 했다면, 여전히 권위 참칭이라는 껄끄러운 문제는 남지만, 그것을 논리, [내가 생각하는 일관성 있고 작품에 들어맞는 독해]를 통해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독해에 대해서는 옳은 독해와 그른 독해가 논해지며 흑백이 가려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동녘의 일련의 행보를 보면 그것이 가능했을 성 싶지 않고 그 경우에는 현재와 똑같이 헬게이트가 열렸겠습니다만 여하간. 그런데 특정인의 캐릭터 메이킹이나 동인지 같은 2차 창작에 있어서 옳고 그름이란 게 존재할 수는 없지요. 매력적이냐 그렇지 않으냐만 존재할 뿐이지요. 가령 <삼국장군전> 같은 만화책을 두고서 장비가 여자로 나왔으니 잘못된 작품이라고 한다면 어불성설이겠지요. <해리 포터>의 동인지를 두고서 문학 수첩에서 잘못된 해석을 운운한다고 해도 웃음거리가 될 테고요(이 경우에는 조앤 K 롤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물론 그러한 2차 창작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기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게드 전기>가 모두에게 외면받는 것처럼 쌍욕을 먹을 수도 있죠. 딱 그렇게 취향과 선호의 문제로 돌아가면 될 문제였지요. 옳음과 그름이 아니라 말이지요.
그나마 동녘이 작품의 정확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었다면 적어도 정합성이라도 따져보았겠습니다만, 그렇지도 않았지요. 이에 대해 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물으실 수 있겠습니다만, 제제를 [일면적]으로 해석하고 [정답을 도출]하는 것을 반박하는 데에 있어서 작품 전체를 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하에서 반례를 제시하면 되죠.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특성들을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작품의 일부에서도 그 정도로 나오는데 전체에서는 오죽할까요. 제가 링크를 건 것 역시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제가 기존에 알고 있던 부분만으로도 이미 일면적 해석론의 관점에서는 일관성 있는 수습이 불가능한데, 보다 상세히 작품을 꿰고 계신 분이 있고, 그 경우에는 더 걷잡을 수 없이 논리의 구멍이 발견된다는 것일 따름이죠. 물론 링크 드린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라도 제가 기존에 기억하고 있던 부분으로라도 최소한 동녘 쪽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바로도 제제는 뽀르뚜가를 처음 보고 쇼타콘 변태 소아 성욕자로 오인하기도 하고, 누나에게 갈보라고 욕하는 것을 밥 먹듯 하고, 밍기뉴와 부비적거리기도 하고(물론 이는 전혀 성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 외에도 일탈적인 행동을 보이는, 우리네의 악의어린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마냥 불쌍하고 순수한 아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캐릭터로서, 흔히 어른들이 특정한 유형의 아이들을 두고 말할 때 쓰는 표현인 \'맹랑하다, 앙큼하다, 잔망스럽다\'가 어울리는 캐릭터죠. 이렇게 비틀린 일면들이 성장해가며 완숙해지고 치유되는 것 자체가 소재이고 주제이지요. 동녘측의 해석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이런 양상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일관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렇듯, 제 일련의 가치 판단들은 최소주의적입니다. 이 논란이 맞닿고 있는 지점들의 모든 논의를 정리하고 결을 정돈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동녘의 태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최소한]을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제 관심사는 동녘에 의해 촉발된 이 우리네의 혼돈의 개탄스러움이지, 그 외의 심화적인 논의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호의적으로 봐주더라도 최소한이 확보가 안 된다는 것이고요. 창작자라면 또 모르겠는데 출판사고, 순수히 작품 해석의 정합성에 대한 것이면 또 모르겠는데 2차 창작에 대한 것이고, 그나마 작품을 전문성 있게 이해하고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가물가물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개 독자인 나조차도 헛점이 드러나 보여서 정말 제대로 읽어본 사람 눈에는 얼마나 추가적으로 약점이 보일지 모르겠고, 해서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가 안 된다는 이야기이지요.
동녘의 동기에 대한 부분은, 곁다리로 넣은 것이기도 하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지만, 동녘측이 자신들이 이 건에서 가져갈 수 있는 <출판사>라는 직함이 띨 수 있는 권위를 고려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하죠. 물론 의혹은 의혹일 따름이고 어디까지나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기는 하죠. 저 링크를 참고할 경우, 이 건은 우발적인 삽질(제가 본문에 쓴 것처럼)이었든가, 의도적인 시비(링크처럼)였든가 둘 중 하나가 되고, 그에 따라 멍청이 혹은 악의 축 둘 중 하나로 판단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을 제시하기 위한 것일 따름이지요.
사실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며 서로 다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 궁극적으로 이것이 상한 떡밥이라고 생각하고, 이 글 역시 그를 역설하기 위해 쓴 것이었죠. 애초에 동녘 아니면 이렇게 커질 일도 아닌데, 동녘이 분탕질을 해서 모두 심력 낭비만 했다는. 이 점에서 제 동기도 설명이 될 것 같고요. 제가 좀 헐겁게 이야기한 것은, 대체로들 이 건에 대해 나하고 비슷하게들 생각하고 있겠거니, 그러니 내가 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다들 알아듣겠거니 가벼이 생각했기 따름이지,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뭐 지금와 생각하면 오판이었을 따름입니다만. 상한 떡밥임을 역설하려다가 결과적으로 저 역시도 역설적으로 상한 떡밥에 참전하게 되었으니 역설의 역설이고 자승자박의 자승자박인 셈이겠지요.
1. 그러니까, 도대체 동녘 출판사가 언제 어떤 어휘로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출판사 아닌 일개 독자가 \"완역본을 읽었다면 할 수 없는 해석\" 이라고 말하면 그 일개 독자는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한 게 됩니까.
이건 공정하지 않은 단어 선택이라는 겁니다. 소위 \"어그로\" 논란과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죠. 어느 키배에서 누가 일 대 다로 싸우는 걸 \"장판파 벌리고 있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순식간에 찌질이가 되고 \"어그로 또 시작이네\" 라고 하면 꼬투리 잡으면서 분쟁을 일으키는... 더 보기
이건 공정하지 않은 단어 선택이라는 겁니다. 소위 \"어그로\" 논란과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죠. 어느 키배에서 누가 일 대 다로 싸우는 걸 \"장판파 벌리고 있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순식간에 찌질이가 되고 \"어그로 또 시작이네\" 라고 하면 꼬투리 잡으면서 분쟁을 일으키는... 더 보기
1. 그러니까, 도대체 동녘 출판사가 언제 어떤 어휘로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출판사 아닌 일개 독자가 \"완역본을 읽었다면 할 수 없는 해석\" 이라고 말하면 그 일개 독자는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한 게 됩니까.
이건 공정하지 않은 단어 선택이라는 겁니다. 소위 \"어그로\" 논란과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죠. 어느 키배에서 누가 일 대 다로 싸우는 걸 \"장판파 벌리고 있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순식간에 찌질이가 되고 \"어그로 또 시작이네\" 라고 하면 꼬투리 잡으면서 분쟁을 일으키는 관심종자가 됩니다. 왜 구밀복검님은 이런 식으로 동의할 수 없는 가치판단을 \"매우 공격적인 수사\"로 뒷받침하시는 건가요. 객관적이지도 않은, 본인의 자의적인 가치판단이 들어간 단어로 누군가의 행위를 \"규정\"한 다음 이를 기정사실화 한 다음에 논지를 펼치는 건 올바른 글쓰기가 아니죠. 이것은 기껏해야 \"나는 너에게 몹시 화가 났다\" 는 감정의 표현이죠. 구밀복검님의 본문은 이런 면에서 \"선동\"의 결을 많이 띄고 있습니다.
[제제는 다섯살짜리 아이로 가족에게서도 학대를 받고 상처로 가득한 아이입니다.
\"왜 아이들은 철들어야만 하나요?\"
라는 제제의 말에서 수많은 독자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제제에게 밍기뉴는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는 유일한 친구이구요. 그런데 밍기뉴 관점에서 만든 노래가 제제는 교활하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상처받고 있을 수많은 제제들을 위로하기 위한 책이기도 하구요. 그런 작가의 의도가 있는 작품을 이렇게 평가하다니요.
물론 창작과 해석의 자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대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다섯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표현의 자유도 대중들의 공감하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제제에다가 망사스타킹을 신기고 핀업걸 자세라뇨...
핀업걸은 굉장히 상업적이고 성적인 요소가 다분합니다.
그리고 제제가 순수하면서도 심한 행동을 많이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도 결국은 심각한 학대에 따른 반발심과 애정결핍에 따른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학대라고 하는 후천적 요인에서 나온 것이죠. 이를 두고 제제를 잔인하고 교활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 생각이 듭니다.]
어느 부분에서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 했습니까? \"참칭\"이란 어휘가 나올 정도의 과격하고 독재적인 말을 하고 있나요?
2-1. [그것이 아니라, 그저 동녘이 권위를 담지하게 된 매커니즘을 기술한 거죠.]
이것이 정말 현상에 관한 해석이 본문의 의도였다면, 어조를 이렇게 쓰시면 안되죠.
[한 마디로 [동녘 측 주장은 동녘 측 주장으로 반박 가능]이 되겠습니다. 자신들이 출판물에서 공개적으로 개진한 입장을 \'우리의 완역본을 봤다면 할 수 없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몰아붙였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네요. 동녘 측이 이러한 자신들의 모순을 인지한 것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일단 기존의 입장은 철회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이 건은 한 바퀴 돌아 해프닝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었지요.
애초에 작가도 아닌 출판사가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한 것부터가 명명백백히 오만하고 그릇된 일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신들이 이전에 뱉은 말은 기억도 못한 상태로 나온 것이니, 그 격이 질박하다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동녘의 삽질이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판매부수 증가에는 기여할 테니, 의도야 그럴 리가 없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노이즈 마케팅이나 다름 없는 것이 된 셈이라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그저 아이유의 해석이 후지다 vs 안 후지다로 가십거리로 끝날 일을, 동녘이 자신들의 언행은 망각한채 성급하게 경거망동해서 일을 키우는 사고를 치고, 이제와 수습을 해보려 하는 모양새가 한심하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싶네요. 일개 출판사의 우발적인 망동에 모두가 현혹되어 놀아난 셈입니다.]
그렇다면 메커니즘만 기술하고, 거기에 대한 가치판단은 부로 붙이시면 됐을 일입니다. 본문의 어디를 \"매커니즘에 대한 기술\"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까.
2-2. 해당 본문에는 [ 이 논란에 참여한 사람들의 평균적인 원작의 내용 숙지 정도가 충분치 못했다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바고, 그런 상황에서는 몇몇 지적권위를 참칭하는 이가 출현하기 쉬운 조건이 형성되며, 이번 건에서는 동녘이 이를 담당했다는 것이죠.] 라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밀복검님은 본문에서 매커니즘을 기술한 적이 없어요. 현상에 대한 짤막한 제시 - 사진 - 가치판단, 이렇게만 구성되어있는 글에서 구밀복검님이 댓글에 단 것 같은 \"설명\"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내용과 어조가 완전히 다른 해명을 보고 아, 작가의 의도는 사실 그러한 것이었구나 라고 글의 독자들이 판단해야 하나요. 이거야말로 아이유의 제제 사과문과 비슷한 형태의 억지죠.
2-3. 언제부터 동녘 출판사가 그렇게 거대한 권위를 가졌었나요. 문학 해석이나 소아 성애 논란에서 무슨 전가의 보도로 쓰인 적이라도 있던가요. 그 영향력이라고는 듀나나 미녀 정신과의사 같은 일개 트위터리안보다도 하찮았던 상황입니다. 듣보잡에게 대중들이 \"권위\"를 부여한 것이고 그 \"권위\"를 자기들이 마음껏 이용한 것이지 이걸 마치 거대 권력의 횡포처럼 묘사하는 건 부당한 해석입니다. 그 비판은 \"대중들\'에게 향해야죠. 마치 충무로는 한마디도 안했는데 이송희일이 심형래의 디워를 깠다는 이유로 \"충무로의 선민 의식\" 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밀복검님은 정치적 해석을 기반으로 사실에 관한 해석까지도 겸하려고 하는 겁니다. \"너가 그러면 안되지\" 라고 하는 건데, 그러면 \"내가 틀린 말 했어?\" 라고 엄연히 되물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지금 떠드는 건 그게 틀린 말인지 맞는 말인지 \"말\" 자체의 정합성에 관한 거에요. 잔혹동시 논란이 떠올랐을 때 시인 본인이나 시인의 어머니인 또 다른 시인이 해명을 했을 때 대중들이 아 그렇구나....라며 들었습니까. 안 들었어요. 깔 사람은 계속 까고 \"전 그래도 이해할 수가 없네요\" 같은 논리로 불호의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심지어 창작자의 발언이라는 것도 이렇게 들쑥날쑥 권위가 오고가는데, 왜 자꾸 일개 출판사 따위의, 이 전까지는 동녘인지 서녘인지 아무도 몰랐던 출판사의 항의를 \"거대한 권력의 집행\"으로 받아들이시나요.
2-4. 구밀복검님의 논리를 따르면 소위 논객, 유명세가 있는 사람들, 전문가들은 죄다 조용히 하고 있어야죠. 그 매커니즘에 따르면 일반 대중은 해당 \"권위자\"들보다 이해나 파급력이 떨어질 테고, 이들이 지적 권위를 휘두르는 것에 휩쓸릴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세상의 모든 비평과 해석에 관한 또 다른 폭력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듀나나 이동진을 \"영화 해석에 대한 권위자\"로 바라봅니다. 그럼 이들은 블로그를 멈추고, 칼럼을 중지해야 할까요.
결국 그 \"권위\"라는 것도 대중이 부여한 거고 대중들이 \"취사선택\"하는 겁니다. 그 비판을 왜 자꾸 \"권위의 유무\"에 따라서 판단하시나요. 다이버젼트 2를 듀나가 아주 탈탈 털었고, 그에 대한 해석이 엇갈린다면 저는 \"이들이 실질적으로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이들 역시 그것을 파악하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라고 공격하는 것이 온당할까요? 대중들이 휩쓸리건 말건, 자기한테 어떤 영향력이 있건 없건, 누구에게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로이 표출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중권이 여전히 키보드워리어 짓을 하는 거고 허지웅이 트위터리안 힙스터 노릇을 하는거죠. 결국 구밀복검님의 논리는 \"하지 말아야 할 당위\"를 설명하지 못해요.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한\" 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하면 안된다는\" 내용의 결론을 내리시는 겁니다. 바람직하면 바람직하지만,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도 충분히 할 수 있고 그것을 대중들은 이용할 수 있죠.
2-5. [말하자면 원전에 대해 [확신]을 갖고 견해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논쟁이 반복되는 와중에 원작에 서술된 제제의 다층적인 모습 - 누나에게 쌍욕을 한다든가, 뽀르뚜가를 소아성애자로 착각한 것이라든가, 그 외 막나가는 행동들 - 에 대해 생경함을 느낀 사람이 적잖았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고 봅니다.
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완역본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비판을 했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어렴풋이 이질감을 가지고 있거나, 긴가민가한 상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동녘이 출판사로서 비판을 하고, 동녘이 온갖 고생을 거쳐 완역본을 냈다는 사실이 전파되고, 동녘이 저렇게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소중한 작품을 아이유가 파괴한 것처럼 보이는 양상이 되고, 그러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아 역시 내가 느낀 이질감은 아이유가 원작과 전혀 상관 없는 말도 안 되는 파괴적 해석을 해서 일어난 것이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었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테고요. 그런데 막상 동녘의 비판이 충실한 원작 이해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논란의 여지가 많지요. ]
여기서 구밀복검님이 출판사를 비판하는 요지는 \" 충실한 원작 이해가 없다 \" 는 것 아닌가요. 복붙한 문단의 첫 부분부터 구밀복검님은 \"올바른 비판\"의 조건으로 \"원전에 대한 확신\", 즉 원전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내세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출판사에 대해서는 \"충실한 원작 이해가 있는지 논란이 있다\" 라면서 이들의 비판 자격이 그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계시죠.그러니까 [작품 해석의 권리를 가진 이는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이로 제한] 하자는 것까지 가지 않더라도, \"출판사는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해당 비판을 할 수 있었다\" 는 논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지적하는 \"참칭\"이라는 단어를 구밀복검님은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3. [그나마 이것이 정말 작품의 해석에 대한 것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런 것도 아니지요. 아이유라는 인물의 캐릭터 재창작에 대한 것입니다. 말이 재해석이라 쓰이므로 작품 해석에 대한 것이라고 도맷금으로 넘어가는 것이지, 실제로는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원작의 해석과 원작을 소재로 한 2차 창작은 같은 궤에 있지 않지요.] 아니요. 이 부분에서는 구밀복검님이 의도적으로 논점을 흐리는 기분마저 듭니다. \"작품의 해석\"과 \"캐릭터 재창작\"은 어떻게 서로 구분될 수 있습니까? \"캐릭터 재창작\"은 \"작품의 해석\"과 무관하게 이루어집니까? 아이유의 제제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속의 제제를 \"해석\"한 다음에 나온 가사죠. 출판사는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 겁니다.
[ 예컨대 아이유의 독후감이 올라왔고 이에 대해 동녘에서 반박을 했다면, 여전히 권위 참칭이라는 껄끄러운 문제는 남지만, 그것을 논리, [내가 생각하는 일관성 있고 작품에 들어맞는 독해]를 통해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독해에 대해서는 옳은 독해와 그른 독해가 논해지며 흑백이 가려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해괴한 문장입니다. 저는 그렇게밖에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정말로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그리고 출판사가 권위적인 기관이라면, 그것은 아이유가 \"재창작\"을 했건 \"독후감\"을 썼건 누군가의 감상에 토를 달 수 없는 것이죠. 본문에서 구밀복검님은 어떻게 출판사의 행위를 바라보셨나요. [ 자신들이 출판물에서 공개적으로 개진한 입장을 \'우리의 완역본을 봤다면 할 수 없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몰아붙였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네요. ] 구밀복검님 본인도 출판사의 행위를 \"잘못된 해석\"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갑자기 \"재창작물에 대한 반발\" 로 나누어질 수 없는 행위가 갑자기 나눠져서 독후감은 평가해도 되고, 재창작은 하면 안되는, 이분법으로 똑같은 행위가 다른 가치판단이 이루어지게 됩니까. 독후감은 재창작이 아닌가요? 그것은 목적이 다를 뿐이지 \"원전을 기반으로 한 누군가의 개인적 해석을 글로 표현해 재생산\" 했다는 부분에서는 똑같이 재창작이 됩니다. 원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노래 가사를 쓰는 건 해석이 아닙니까? 백현진은 장률 감독의 <경주>에 어울리는 엔딩곡을 만들었고 그 부분에서 직접 본인이 연기를 뛰었던 영화를 \"해석\"했을 겁니다. 해석과 재창작이 이분될 수 있다는 주장은 전혀 동의할 수 없어요. 재창작은 해석의 결과물이고, 해석은 그 자체로 재창작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평도 문학의 한 장르라는 담론이 나올 이유가 없죠) 아이유의 제제를 향한 출판사의 비판은 아이유가 재창작하기까지의 과정이었던 \"해석\"을 비판한 겁니다. 그렇다면, 서태지의 사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창작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원작자로서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습니까? 원작자가 아니면 그러한 재창작을 다 아무 비판도 할 수 없게 되나요?
원작을 잘못 해석했다는 비판은 전문적 비평 여러군데에서 아주 쉽게 발견됩니다. 듀나가 강우석 감독의 이끼를 비판했던 것도 그런 논리지 않습니까. 바즈 루어먼의 위대한 개츠비를 영화 평론가들은 원작 해석의 잘못이라고 깠어요. 출판사 측의 해석 역시도 본인의 원작 해석에 기반한 \"나는 싫은데?\" 에 불과합니다.
4-1. 저는 지금 \"논증의 형식\"에서 오는 설득력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위의 사례와 연결해보죠. 이동진이 바즈 루어먼의 위대한 개츠비를 \"원작 해석을 잘 했는지 알 수 없다\" 라고 깠다 칩시다. 그렇다면 그 주장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동진 본인이 자신의 정합적인 원작 해석이 있을 거라 전제합니다. 그런데 이 다음 이동진이 \"저는 원작의 내용이 가물가물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짚어준 부분에 따르면 이러이러하다더군요.\" 라고 했다 칩시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설득되는 논거는 \"이동진 본인의 근거\" 가 아니라 \"이동진이 인용한 다른 사람의 근거\" 가 되요. 여기서 원 주장을 제시한 화자의 설득력이란 매우 떨어집니다. \"남들이 그랬다더라\" 는 해석을 주장의 실질적 근거로 쓰는 글을 읽고 어느 누가 고개를 끄덕이나요. (이 역시도 권위에 기댄 오류로 충분히 볼 여지가 있습니다)
구밀복검님은 말씀하신 대로 [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하에서 반례를 제시하면 되죠.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특성들을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작품의 일부에서도 그 정도로 나오는데 전체에서는 오죽할까요. ] 구밀복검님 자신의 반례를 제시하셨나요. 기존에 알고 있던 구밀복검님의 해석을 첨부하셨습니까. 이것은 매우 게으른 논증입니다. 나는 잘못되었다고 읽었지만, 내 해석을 붙이진 않겠다, 내가 몰랐던 다른 사람의 해석은 첨부하겠다, 그러니 여기에서 내가 말하지 않은 나의 해석까지도 유추해서 읽어야 한다 라고 하면 어떤 독자도 이런 식의 논증에 신뢰를 보내지 않을 겁니다. 이러한 해명은 이 바로 전 댓글에 쓰신 내용이 본문이나 이 전까지의 댓글에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거죠.
4-2. [제제는 뽀르뚜가를 처음 보고 쇼타콘 변태 소아 성욕자로 오인하기도 하고, 누나에게 갈보라고 욕하는 것을 밥 먹듯 하고, 밍기뉴와 부비적거리기도 하고(물론 이는 전혀 성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 외에도 일탈적인 행동을 보이는, 우리네의 악의어린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마냥 불쌍하고 순수한 아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캐릭터로서, 흔히 어른들이 특정한 유형의 아이들을 두고 말할 때 쓰는 표현인 \'맹랑하다, 앙큼하다, 잔망스럽다\'가 어울리는 캐릭터죠. 이렇게 비틀린 일면들이 성장해가며 완숙해지고 치유되는 것 자체가 소재이고 주제이지요. 동녘측의 해석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이런 양상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일관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 성적으로 볼 수 있느냐는 자유겠죠. 그런데, [제제를 [일면적]으로 해석하고 [정답을 도출]하는 것]이고 출판사의 주장을 해석하는 것은 곡해에 가깝습니다. 출판사가 언제 일면적으로 해석을 하고 정답을 도출했나요. (정답을 도출했다, 이런 표현 역시도 가치판단이 포함된 주장입니다. 그렇게 치면 저 역시도 진중권이나 허지웅의 동녘 출판사 관련 발언들은 \"비판의 자유를 압살하고 대중적 인기에 영합한 기회주의적 선언\" 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의 표현은 선동전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제제가 순수하면서도 심한 행동을 많이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도 결국은 심각한 학대에 따른 반발심과 애정결핍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판사 역시도 구밀복검님이 제시하시는 맹랑하고 앙큼한 부분들을 인지하고 그 이중적인 면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구밀복검님의 비판은 출판사가 제제를 \"맹랑하고, 앙큼하고, 잔망스럽지 않다\" 라고 주장했을 때나 성립할 수 있는 거죠.
5. [오로지 동녘의 태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최소한]을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제 관심사는 동녘에 의해 촉발된 이 우리네의 혼돈의 개탄스러움이지, 그 외의 심화적인 논의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어조와 내용에 배치되는 해명은 무의미합니다. (정당화 라는 단어 역시 누군가가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 창작자라면 또 모르겠는데 출판사고, 순수히 작품 해석의 정합성에 대한 것이면 또 모르겠는데 2차 창작에 대한 것이고, 그나마 작품을 전문성 있게 이해하고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가물가물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개 독자인 나조차도 헛점이 드러나 보여서 정말 제대로 읽어본 사람 눈에는 얼마나 추가적으로 약점이 보일지 모르겠고, 해서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가 안 된다는 이야기이지요. ] 이 부분들은 제가 다 위에서 반박드렸으니 더 할말은 없습니다.
6. 그 의혹이란 게 매우 정치적이고, 그래서 \"선동\" 수준의 프로파간다를 띄게 된다는 겁니다. 저희는 지금 \"해석\"을 두고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해석\"이야말로 아이유가 됐든, 동녘 출판사가 됐든 서로의 해석을 가진 주체들을 판단하는 데 선행되어야 하며, 또 이것은 분리되어야 하죠. 저는 아이유를 비판할 생각도, 출판사를 비판할 생각도 없어요.
저도 허지웅의 과거 트윗을 가져와볼까요. 혹은 진중권의 삽질이나 황진미의 술주정스러운 평론은 어떻습니까. 이건 다 정치적입니다. 발화가 아니라 발화자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행위죠.
7. [전 궁극적으로 이것이 상한 떡밥이라고 생각하고, 이 글 역시 그를 역설하기 위해 쓴 것이었죠.] 아니요. 구밀복검님은 떡밥이 아니라, 떡밥을 뿌린다고 여기는 어느 한쪽을 비난하고 계신 겁니다. 이건 본문의 어조나 내용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해명입니다.
[ 애초에 동녘 아니면 이렇게 커질 일도 아닌데, 동녘이 분탕질을 해서 모두 심력 낭비만 했다는.] 그래서 이렇게 마지막까지도 출판사에 대한 가치판단은 계속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바로 앞문장과 뒷문장이 서로 부딪힙니다. 출판사를 까고 싶었다면 까고 싶었다고 하면 되고, 어떤 이슈와 이를 둘러싼 논쟁의 무가치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그것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되죠. [일개 출판사의 우발적인 망동에 모두가 현혹되어 놀아난 셈입니다.] 구밀복검님의 이 마지막 문장은 그 함량이 어떻게 되든 엄연한 지적 주체로서 이 비판에 진지하게 참여하고 논쟁하는 모든 사람을 \"바보\"로 \"평가질\" 하는 글이 되며 \"나는 출판사를 까겠다\"는 정치적 스탠스를 강조하는 글이 됩니다. 그러니 출판사에 대한 가치판단이 다른 분들에게나, 논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감을 살 수 밖에 없죠.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개떡같이 말하면, 그걸 찰떡같이 알아들을 사람은 없습니다. 다 개떡같이 알아듣죠.
이건 공정하지 않은 단어 선택이라는 겁니다. 소위 \"어그로\" 논란과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죠. 어느 키배에서 누가 일 대 다로 싸우는 걸 \"장판파 벌리고 있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순식간에 찌질이가 되고 \"어그로 또 시작이네\" 라고 하면 꼬투리 잡으면서 분쟁을 일으키는 관심종자가 됩니다. 왜 구밀복검님은 이런 식으로 동의할 수 없는 가치판단을 \"매우 공격적인 수사\"로 뒷받침하시는 건가요. 객관적이지도 않은, 본인의 자의적인 가치판단이 들어간 단어로 누군가의 행위를 \"규정\"한 다음 이를 기정사실화 한 다음에 논지를 펼치는 건 올바른 글쓰기가 아니죠. 이것은 기껏해야 \"나는 너에게 몹시 화가 났다\" 는 감정의 표현이죠. 구밀복검님의 본문은 이런 면에서 \"선동\"의 결을 많이 띄고 있습니다.
[제제는 다섯살짜리 아이로 가족에게서도 학대를 받고 상처로 가득한 아이입니다.
\"왜 아이들은 철들어야만 하나요?\"
라는 제제의 말에서 수많은 독자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제제에게 밍기뉴는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는 유일한 친구이구요. 그런데 밍기뉴 관점에서 만든 노래가 제제는 교활하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상처받고 있을 수많은 제제들을 위로하기 위한 책이기도 하구요. 그런 작가의 의도가 있는 작품을 이렇게 평가하다니요.
물론 창작과 해석의 자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대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다섯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표현의 자유도 대중들의 공감하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제제에다가 망사스타킹을 신기고 핀업걸 자세라뇨...
핀업걸은 굉장히 상업적이고 성적인 요소가 다분합니다.
그리고 제제가 순수하면서도 심한 행동을 많이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도 결국은 심각한 학대에 따른 반발심과 애정결핍에 따른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학대라고 하는 후천적 요인에서 나온 것이죠. 이를 두고 제제를 잔인하고 교활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 생각이 듭니다.]
어느 부분에서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 했습니까? \"참칭\"이란 어휘가 나올 정도의 과격하고 독재적인 말을 하고 있나요?
2-1. [그것이 아니라, 그저 동녘이 권위를 담지하게 된 매커니즘을 기술한 거죠.]
이것이 정말 현상에 관한 해석이 본문의 의도였다면, 어조를 이렇게 쓰시면 안되죠.
[한 마디로 [동녘 측 주장은 동녘 측 주장으로 반박 가능]이 되겠습니다. 자신들이 출판물에서 공개적으로 개진한 입장을 \'우리의 완역본을 봤다면 할 수 없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몰아붙였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네요. 동녘 측이 이러한 자신들의 모순을 인지한 것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일단 기존의 입장은 철회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이 건은 한 바퀴 돌아 해프닝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었지요.
애초에 작가도 아닌 출판사가 창작자의 권위를 참칭한 것부터가 명명백백히 오만하고 그릇된 일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신들이 이전에 뱉은 말은 기억도 못한 상태로 나온 것이니, 그 격이 질박하다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동녘의 삽질이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판매부수 증가에는 기여할 테니, 의도야 그럴 리가 없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노이즈 마케팅이나 다름 없는 것이 된 셈이라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그저 아이유의 해석이 후지다 vs 안 후지다로 가십거리로 끝날 일을, 동녘이 자신들의 언행은 망각한채 성급하게 경거망동해서 일을 키우는 사고를 치고, 이제와 수습을 해보려 하는 모양새가 한심하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싶네요. 일개 출판사의 우발적인 망동에 모두가 현혹되어 놀아난 셈입니다.]
그렇다면 메커니즘만 기술하고, 거기에 대한 가치판단은 부로 붙이시면 됐을 일입니다. 본문의 어디를 \"매커니즘에 대한 기술\"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까.
2-2. 해당 본문에는 [ 이 논란에 참여한 사람들의 평균적인 원작의 내용 숙지 정도가 충분치 못했다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바고, 그런 상황에서는 몇몇 지적권위를 참칭하는 이가 출현하기 쉬운 조건이 형성되며, 이번 건에서는 동녘이 이를 담당했다는 것이죠.] 라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밀복검님은 본문에서 매커니즘을 기술한 적이 없어요. 현상에 대한 짤막한 제시 - 사진 - 가치판단, 이렇게만 구성되어있는 글에서 구밀복검님이 댓글에 단 것 같은 \"설명\"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내용과 어조가 완전히 다른 해명을 보고 아, 작가의 의도는 사실 그러한 것이었구나 라고 글의 독자들이 판단해야 하나요. 이거야말로 아이유의 제제 사과문과 비슷한 형태의 억지죠.
2-3. 언제부터 동녘 출판사가 그렇게 거대한 권위를 가졌었나요. 문학 해석이나 소아 성애 논란에서 무슨 전가의 보도로 쓰인 적이라도 있던가요. 그 영향력이라고는 듀나나 미녀 정신과의사 같은 일개 트위터리안보다도 하찮았던 상황입니다. 듣보잡에게 대중들이 \"권위\"를 부여한 것이고 그 \"권위\"를 자기들이 마음껏 이용한 것이지 이걸 마치 거대 권력의 횡포처럼 묘사하는 건 부당한 해석입니다. 그 비판은 \"대중들\'에게 향해야죠. 마치 충무로는 한마디도 안했는데 이송희일이 심형래의 디워를 깠다는 이유로 \"충무로의 선민 의식\" 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밀복검님은 정치적 해석을 기반으로 사실에 관한 해석까지도 겸하려고 하는 겁니다. \"너가 그러면 안되지\" 라고 하는 건데, 그러면 \"내가 틀린 말 했어?\" 라고 엄연히 되물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지금 떠드는 건 그게 틀린 말인지 맞는 말인지 \"말\" 자체의 정합성에 관한 거에요. 잔혹동시 논란이 떠올랐을 때 시인 본인이나 시인의 어머니인 또 다른 시인이 해명을 했을 때 대중들이 아 그렇구나....라며 들었습니까. 안 들었어요. 깔 사람은 계속 까고 \"전 그래도 이해할 수가 없네요\" 같은 논리로 불호의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심지어 창작자의 발언이라는 것도 이렇게 들쑥날쑥 권위가 오고가는데, 왜 자꾸 일개 출판사 따위의, 이 전까지는 동녘인지 서녘인지 아무도 몰랐던 출판사의 항의를 \"거대한 권력의 집행\"으로 받아들이시나요.
2-4. 구밀복검님의 논리를 따르면 소위 논객, 유명세가 있는 사람들, 전문가들은 죄다 조용히 하고 있어야죠. 그 매커니즘에 따르면 일반 대중은 해당 \"권위자\"들보다 이해나 파급력이 떨어질 테고, 이들이 지적 권위를 휘두르는 것에 휩쓸릴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세상의 모든 비평과 해석에 관한 또 다른 폭력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듀나나 이동진을 \"영화 해석에 대한 권위자\"로 바라봅니다. 그럼 이들은 블로그를 멈추고, 칼럼을 중지해야 할까요.
결국 그 \"권위\"라는 것도 대중이 부여한 거고 대중들이 \"취사선택\"하는 겁니다. 그 비판을 왜 자꾸 \"권위의 유무\"에 따라서 판단하시나요. 다이버젼트 2를 듀나가 아주 탈탈 털었고, 그에 대한 해석이 엇갈린다면 저는 \"이들이 실질적으로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이들 역시 그것을 파악하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라고 공격하는 것이 온당할까요? 대중들이 휩쓸리건 말건, 자기한테 어떤 영향력이 있건 없건, 누구에게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로이 표출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중권이 여전히 키보드워리어 짓을 하는 거고 허지웅이 트위터리안 힙스터 노릇을 하는거죠. 결국 구밀복검님의 논리는 \"하지 말아야 할 당위\"를 설명하지 못해요. \"하지 않는 게 바람직한\" 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하면 안된다는\" 내용의 결론을 내리시는 겁니다. 바람직하면 바람직하지만,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도 충분히 할 수 있고 그것을 대중들은 이용할 수 있죠.
2-5. [말하자면 원전에 대해 [확신]을 갖고 견해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논쟁이 반복되는 와중에 원작에 서술된 제제의 다층적인 모습 - 누나에게 쌍욕을 한다든가, 뽀르뚜가를 소아성애자로 착각한 것이라든가, 그 외 막나가는 행동들 - 에 대해 생경함을 느낀 사람이 적잖았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고 봅니다.
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완역본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비판을 했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어렴풋이 이질감을 가지고 있거나, 긴가민가한 상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동녘이 출판사로서 비판을 하고, 동녘이 온갖 고생을 거쳐 완역본을 냈다는 사실이 전파되고, 동녘이 저렇게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소중한 작품을 아이유가 파괴한 것처럼 보이는 양상이 되고, 그러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아 역시 내가 느낀 이질감은 아이유가 원작과 전혀 상관 없는 말도 안 되는 파괴적 해석을 해서 일어난 것이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었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테고요. 그런데 막상 동녘의 비판이 충실한 원작 이해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논란의 여지가 많지요. ]
여기서 구밀복검님이 출판사를 비판하는 요지는 \" 충실한 원작 이해가 없다 \" 는 것 아닌가요. 복붙한 문단의 첫 부분부터 구밀복검님은 \"올바른 비판\"의 조건으로 \"원전에 대한 확신\", 즉 원전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내세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출판사에 대해서는 \"충실한 원작 이해가 있는지 논란이 있다\" 라면서 이들의 비판 자격이 그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계시죠.그러니까 [작품 해석의 권리를 가진 이는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이로 제한] 하자는 것까지 가지 않더라도, \"출판사는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해당 비판을 할 수 있었다\" 는 논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지적하는 \"참칭\"이라는 단어를 구밀복검님은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3. [그나마 이것이 정말 작품의 해석에 대한 것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런 것도 아니지요. 아이유라는 인물의 캐릭터 재창작에 대한 것입니다. 말이 재해석이라 쓰이므로 작품 해석에 대한 것이라고 도맷금으로 넘어가는 것이지, 실제로는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원작의 해석과 원작을 소재로 한 2차 창작은 같은 궤에 있지 않지요.] 아니요. 이 부분에서는 구밀복검님이 의도적으로 논점을 흐리는 기분마저 듭니다. \"작품의 해석\"과 \"캐릭터 재창작\"은 어떻게 서로 구분될 수 있습니까? \"캐릭터 재창작\"은 \"작품의 해석\"과 무관하게 이루어집니까? 아이유의 제제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속의 제제를 \"해석\"한 다음에 나온 가사죠. 출판사는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 겁니다.
[ 예컨대 아이유의 독후감이 올라왔고 이에 대해 동녘에서 반박을 했다면, 여전히 권위 참칭이라는 껄끄러운 문제는 남지만, 그것을 논리, [내가 생각하는 일관성 있고 작품에 들어맞는 독해]를 통해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독해에 대해서는 옳은 독해와 그른 독해가 논해지며 흑백이 가려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해괴한 문장입니다. 저는 그렇게밖에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정말로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그리고 출판사가 권위적인 기관이라면, 그것은 아이유가 \"재창작\"을 했건 \"독후감\"을 썼건 누군가의 감상에 토를 달 수 없는 것이죠. 본문에서 구밀복검님은 어떻게 출판사의 행위를 바라보셨나요. [ 자신들이 출판물에서 공개적으로 개진한 입장을 \'우리의 완역본을 봤다면 할 수 없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몰아붙였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네요. ] 구밀복검님 본인도 출판사의 행위를 \"잘못된 해석\"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갑자기 \"재창작물에 대한 반발\" 로 나누어질 수 없는 행위가 갑자기 나눠져서 독후감은 평가해도 되고, 재창작은 하면 안되는, 이분법으로 똑같은 행위가 다른 가치판단이 이루어지게 됩니까. 독후감은 재창작이 아닌가요? 그것은 목적이 다를 뿐이지 \"원전을 기반으로 한 누군가의 개인적 해석을 글로 표현해 재생산\" 했다는 부분에서는 똑같이 재창작이 됩니다. 원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노래 가사를 쓰는 건 해석이 아닙니까? 백현진은 장률 감독의 <경주>에 어울리는 엔딩곡을 만들었고 그 부분에서 직접 본인이 연기를 뛰었던 영화를 \"해석\"했을 겁니다. 해석과 재창작이 이분될 수 있다는 주장은 전혀 동의할 수 없어요. 재창작은 해석의 결과물이고, 해석은 그 자체로 재창작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평도 문학의 한 장르라는 담론이 나올 이유가 없죠) 아이유의 제제를 향한 출판사의 비판은 아이유가 재창작하기까지의 과정이었던 \"해석\"을 비판한 겁니다. 그렇다면, 서태지의 사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창작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원작자로서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습니까? 원작자가 아니면 그러한 재창작을 다 아무 비판도 할 수 없게 되나요?
원작을 잘못 해석했다는 비판은 전문적 비평 여러군데에서 아주 쉽게 발견됩니다. 듀나가 강우석 감독의 이끼를 비판했던 것도 그런 논리지 않습니까. 바즈 루어먼의 위대한 개츠비를 영화 평론가들은 원작 해석의 잘못이라고 깠어요. 출판사 측의 해석 역시도 본인의 원작 해석에 기반한 \"나는 싫은데?\" 에 불과합니다.
4-1. 저는 지금 \"논증의 형식\"에서 오는 설득력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위의 사례와 연결해보죠. 이동진이 바즈 루어먼의 위대한 개츠비를 \"원작 해석을 잘 했는지 알 수 없다\" 라고 깠다 칩시다. 그렇다면 그 주장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동진 본인이 자신의 정합적인 원작 해석이 있을 거라 전제합니다. 그런데 이 다음 이동진이 \"저는 원작의 내용이 가물가물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짚어준 부분에 따르면 이러이러하다더군요.\" 라고 했다 칩시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설득되는 논거는 \"이동진 본인의 근거\" 가 아니라 \"이동진이 인용한 다른 사람의 근거\" 가 되요. 여기서 원 주장을 제시한 화자의 설득력이란 매우 떨어집니다. \"남들이 그랬다더라\" 는 해석을 주장의 실질적 근거로 쓰는 글을 읽고 어느 누가 고개를 끄덕이나요. (이 역시도 권위에 기댄 오류로 충분히 볼 여지가 있습니다)
구밀복검님은 말씀하신 대로 [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하에서 반례를 제시하면 되죠.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특성들을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작품의 일부에서도 그 정도로 나오는데 전체에서는 오죽할까요. ] 구밀복검님 자신의 반례를 제시하셨나요. 기존에 알고 있던 구밀복검님의 해석을 첨부하셨습니까. 이것은 매우 게으른 논증입니다. 나는 잘못되었다고 읽었지만, 내 해석을 붙이진 않겠다, 내가 몰랐던 다른 사람의 해석은 첨부하겠다, 그러니 여기에서 내가 말하지 않은 나의 해석까지도 유추해서 읽어야 한다 라고 하면 어떤 독자도 이런 식의 논증에 신뢰를 보내지 않을 겁니다. 이러한 해명은 이 바로 전 댓글에 쓰신 내용이 본문이나 이 전까지의 댓글에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거죠.
4-2. [제제는 뽀르뚜가를 처음 보고 쇼타콘 변태 소아 성욕자로 오인하기도 하고, 누나에게 갈보라고 욕하는 것을 밥 먹듯 하고, 밍기뉴와 부비적거리기도 하고(물론 이는 전혀 성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 외에도 일탈적인 행동을 보이는, 우리네의 악의어린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마냥 불쌍하고 순수한 아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캐릭터로서, 흔히 어른들이 특정한 유형의 아이들을 두고 말할 때 쓰는 표현인 \'맹랑하다, 앙큼하다, 잔망스럽다\'가 어울리는 캐릭터죠. 이렇게 비틀린 일면들이 성장해가며 완숙해지고 치유되는 것 자체가 소재이고 주제이지요. 동녘측의 해석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이런 양상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일관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 성적으로 볼 수 있느냐는 자유겠죠. 그런데, [제제를 [일면적]으로 해석하고 [정답을 도출]하는 것]이고 출판사의 주장을 해석하는 것은 곡해에 가깝습니다. 출판사가 언제 일면적으로 해석을 하고 정답을 도출했나요. (정답을 도출했다, 이런 표현 역시도 가치판단이 포함된 주장입니다. 그렇게 치면 저 역시도 진중권이나 허지웅의 동녘 출판사 관련 발언들은 \"비판의 자유를 압살하고 대중적 인기에 영합한 기회주의적 선언\" 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의 표현은 선동전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제제가 순수하면서도 심한 행동을 많이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도 결국은 심각한 학대에 따른 반발심과 애정결핍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판사 역시도 구밀복검님이 제시하시는 맹랑하고 앙큼한 부분들을 인지하고 그 이중적인 면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구밀복검님의 비판은 출판사가 제제를 \"맹랑하고, 앙큼하고, 잔망스럽지 않다\" 라고 주장했을 때나 성립할 수 있는 거죠.
5. [오로지 동녘의 태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최소한]을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제 관심사는 동녘에 의해 촉발된 이 우리네의 혼돈의 개탄스러움이지, 그 외의 심화적인 논의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어조와 내용에 배치되는 해명은 무의미합니다. (정당화 라는 단어 역시 누군가가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 창작자라면 또 모르겠는데 출판사고, 순수히 작품 해석의 정합성에 대한 것이면 또 모르겠는데 2차 창작에 대한 것이고, 그나마 작품을 전문성 있게 이해하고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가물가물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개 독자인 나조차도 헛점이 드러나 보여서 정말 제대로 읽어본 사람 눈에는 얼마나 추가적으로 약점이 보일지 모르겠고, 해서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가 안 된다는 이야기이지요. ] 이 부분들은 제가 다 위에서 반박드렸으니 더 할말은 없습니다.
6. 그 의혹이란 게 매우 정치적이고, 그래서 \"선동\" 수준의 프로파간다를 띄게 된다는 겁니다. 저희는 지금 \"해석\"을 두고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해석\"이야말로 아이유가 됐든, 동녘 출판사가 됐든 서로의 해석을 가진 주체들을 판단하는 데 선행되어야 하며, 또 이것은 분리되어야 하죠. 저는 아이유를 비판할 생각도, 출판사를 비판할 생각도 없어요.
저도 허지웅의 과거 트윗을 가져와볼까요. 혹은 진중권의 삽질이나 황진미의 술주정스러운 평론은 어떻습니까. 이건 다 정치적입니다. 발화가 아니라 발화자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행위죠.
7. [전 궁극적으로 이것이 상한 떡밥이라고 생각하고, 이 글 역시 그를 역설하기 위해 쓴 것이었죠.] 아니요. 구밀복검님은 떡밥이 아니라, 떡밥을 뿌린다고 여기는 어느 한쪽을 비난하고 계신 겁니다. 이건 본문의 어조나 내용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해명입니다.
[ 애초에 동녘 아니면 이렇게 커질 일도 아닌데, 동녘이 분탕질을 해서 모두 심력 낭비만 했다는.] 그래서 이렇게 마지막까지도 출판사에 대한 가치판단은 계속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바로 앞문장과 뒷문장이 서로 부딪힙니다. 출판사를 까고 싶었다면 까고 싶었다고 하면 되고, 어떤 이슈와 이를 둘러싼 논쟁의 무가치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그것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되죠. [일개 출판사의 우발적인 망동에 모두가 현혹되어 놀아난 셈입니다.] 구밀복검님의 이 마지막 문장은 그 함량이 어떻게 되든 엄연한 지적 주체로서 이 비판에 진지하게 참여하고 논쟁하는 모든 사람을 \"바보\"로 \"평가질\" 하는 글이 되며 \"나는 출판사를 까겠다\"는 정치적 스탠스를 강조하는 글이 됩니다. 그러니 출판사에 대한 가치판단이 다른 분들에게나, 논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감을 살 수 밖에 없죠.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개떡같이 말하면, 그걸 찰떡같이 알아들을 사람은 없습니다. 다 개떡같이 알아듣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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