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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3/22 15:38:12
Name   CO11313
File #1   IMG_9628.jpeg (92.1 KB), Download : 3
Subject   말주머니 봉인 해제, 둘째


둘째의 아래 앞니가 아무래도 말주머니 억제기였던 것 같습니다. 살살 흔들리던 녀석이 며칠 전 유치원에서 간식 먹다가 빠진 뒤로, 말주머니 봉인이 풀려서 아주 그냥 난리가 났습니다. 조잘조잘, 수다수다. “이건 뭐예요? 그건 왜 그래요?”

말주머니 사이로 단어들이 무자비하게 풀려 나오며 조금씩 삐끗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는 욕심이야” 라길래 자세히 들어보니 “예순은 육십(60)이야”라든지 하는 것들인데, 어른들이 보기엔 너무 귀여운 언어유희가 누나에게는 심기를 거스르는 일인 듯합니다.

물론 누나도 “엄마, 햄버거는 배스트 푸드지요?” 하면 “응? 아니 패스트 푸드“ 라고 정정해주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두 살 위 꼬꼬마 형님일 뿐이지만, 요즘 들어 부쩍 자신의 말실수에는 관대하고 동생에게는 엄격한 모습입니다.

원래 둘째가 누나랑 말싸움을 하면 누나한테 늘 깨갱 지고 물러나는 엔딩이었는데 이젠 말싸움이 한 시간은 갑니다.

“아니 난 그렇게 말한 게 아니야. 누나는 왜 내 말을 안 들어?” 부터 시작해서 “내가 누나한테 이렇게 하면 누나는 기분이 좋겠어? 아니잖아.” 하면 누나는 “누난 그런 적 없거든?” 하며 시동을 걸고 무언가 반박하려는 둘째에게 다다다 쏘아붙입니다.

원래는 여기서 말주변이 부족한 둘째가 뿌앵- 하고 울면서 구석으로 들어가서 삐져 있으면 저희 부부가 둘을 중재하고 서로 화해하고 그런 흔한 엔딩인데, 이제는 울면서도 자기가 서럽고 속상한 부분을 계속 어필합니다.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누나는 나빠! 난 이제 누나랑 안 놀 거야! 누나랑 말도 안 할 거야! 누나한테 좋아하는 장난감도 주지 않을 거야!” 그러자 누나는 “흥! 그래라! 나도 너랑 안 놀아!” 라고 받아칩니다.

둘째는 다시 뿌애앵!
예상과 달리 협박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상심해, 눈물이 더 터집니다.  

처음에는 몇 번 이 개싸움에 끼어들어서 중재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둘째가 아직 말을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걸 대신해서 좀 더 어필해주고 첫째에게 좀 더 배려를 요청하고. 흔한 부모의 중재 루틴이었지요.

이제는 대응을 좀 달리해 봅니다. 둘째가 말주머니가 풀렸다면, 첫째는 눈치주머니(라고 쓰고 생각주머니라고 순화해 봄)가 열린 것 같더라고요. 둘이 싸우는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몇 분 바라봐 준 뒤 일이 커지기(?) 전에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툭 던지듯 말합니다.

“너희 이렇게 싸우고 서로를 배려하지 않으면 둘 모두에게 이러저러한 패널티가 있다. 원래 A를 하고 B도 하려던 계획이 있었는데,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는 남매와 엄마 아빠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그냥 없던 일로 하자. 어쩔 수 없지.”

그럼 눈치가 빠삭한 첫째가 얼른 둘째와 협상을 시작합니다. 둘째는 구석에서 훌쩍이다가 태도가 급 사근사근해진 누나에게 홀랑 넘어가버립니다. 그리고 요 귀여운 두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다시 단짝처럼 붙어 놀기 시작합니다.

서로 부딪히고, 서운해하고, 다시 말을 건네는 이 모든 과정이 어쩌면 둘만의 아주 작은 사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안에서 둘째는 자기 마음을 말로 꺼내는 법을 배우고, 첫째는 한 발 물러서거나 설득하는 방법을 익혀 가고 있는 중이겠지요. 그렇게 둘은 매일같이, 작지만 꽤나 치열한 하루를 살아냅니다.

이 귀요미들의 또 다른 하루는, 다음 글 ‘협상의 대가, 첫째’에서 이어서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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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만 읽어도 귀엽읍니다. 셋째편도 매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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