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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12/02 02:14:19 |
Name | 맷코발스키 |
Subject | 크림슨 피크 후기 |
(스포가 있지만 사실상 무의미..) 1. 참 한결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감독들이 있는데요.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어떻고 간에 해당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고 독특하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취향에 맞는다면 말이지요. 제겐 테리 길리엄과 닐 블룸캠프, 그리고 길예르모가 그런 감독 중 하나입니다. 물론 길예르모를 이들과 나란히 말한다는 것은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요.(테리 길리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써보고 싶네요) 여하튼 그가 꾸준히 보여주는 특유의 고딕 판타지스러운 이미지는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정말 좋았어요. 줄거리에 대해서는 솔직히 별로 할 말이 없는데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어떤 부류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정도입니다. 포스터, 그리고 영화의 첫 30분만 보아도 대강 모든 다음 줄거리가 예상이 됩니다. 그래, 저 싸이코 여자가 문제가 되겠군. 그래서 진짜 문제가 되냐고요? 진짜 그래요. 근데 그게 정말이지 너무 뻔해서 이렇게 대놓고 스포를 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2. 그러므로 이 영화가 감독의 전작인 <판의 미로>나 <악마의 등뼈>만큼 서사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는 못하지요. 또한 무슨 마술적...환상적...어떤... 리얼리즘...스러움...이라기엔 역사적인 맥락이 두 전작만큼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지라. 뭐, 영화의 주제를 생각해보면 역사성이 아주 없다고 단정하진 못하겠지만요. 크림슨 피크. 크림슨 피크는 붉은 진흙 위에 세워져있고, 누군가의 피가 없이는,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이 침묵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곳이지요. 타인의 희생 위에서 겨우 지탱되는 몰락한 귀족의 땅이라! 아하. 그러니 유령들이 비밀을 폭로하고, 크림슨 피크는 끝장나야만 하겠군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전작들보다는 덜 우아하게 드러나지요. 뭐, 그런데다가 시간적 대립 구도가 좀 뻔하기도 합니다. 19세기에 뭔 일이 있었지? 전근대와 근대? 생각해보니 이디스는 훌륭한 '부르조아지 신여성'의 표본이로군요. 이디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여성은 초반부에 상당히 똑부러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뻔하지만 매력적이기는 해요. 그런데 아주 많은 작품에서 이런 신녀성들이 사랑을 쫓는 순간 덜 흥미로운 인물로 변하는데요. 멍청해진달까. 얘도 그 클리셰를 그대로 따르는 것 같아요. 크림슨 피크에 가서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매력이라곤 호기심과 의지입니다. 다른 인물들도 따로 언급해줄만큼 흥미롭지 않고요. 3. 여태까지 이 영화에 대해 주제니 줄거리니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았지만, 애초에 작정하고 서사에 힘을 주려고 한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왠지 감독이 끝내주는 이미지와 장면 몇 개에 팍 꽂힌 것 같단 말이지요. 그리고는 이미지, 이미지들을 적당히 이어 붙여 영화를 만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화를 볼 때 팝콘을 들고 눈호강 하면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제겐 줄거리의 지루함을 덮을 정도로 영상이 마음에 들었어요. 정말 끝내줬죠. 이걸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길예르모 감독은 어떤 물건이 어떤 물건과 같이 놓이면 잘 어울리는지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달까요. 색채도 그렇지요. 영화 내에서 등장하는 색들은 상당히 다채롭고 강렬한데, 전혀 과하게 느껴지지 않거든요. '몰락' 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멋지게 시각화·공간화 할 수 있을까, 감탄이 나옵니다. 또, 이 영화에 살짝 가미된 호러 요소에 대해서도 말해야겠어요. 호러의 미덕은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내 등 뒤의 유령이 날 깜짝 놀래키는 것'이 가장 익숙한 류의 호러겠고, '내 등 뒤의 유령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음. 왠지 뒤를 돌아보면 있을 것 같은데, 도저히 뒤는 못 보겠음' 식의 똥줄타는 심리적 압박감과 불안감의 호러가 있지요. <크림슨 피크>는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네요. 그리고 전 그런 부분이 좋았어요. <크림슨 피크>의 잉크 유령들은 품격이 있습니다. 생전에 고귀하신 분들이라 그럴 수도 있고요. 이들은 대단히 느긋하게 움직이는데, 그게 훨씬 더 무섭게 다가오죠. 다만 좀 절제가 과하긴 했나봐요. 제 옆을 지나가던 숱한 관람객들이 유령이 나오기 전까지 졸았다고 하는 걸 보면요. 뒤로 가면 좀 다른 류의 공포물로 바뀌는데, 그건 이전보단 덜 무섭고 더 아쉬워요. 4. 그래서 결론은 이미지는 멋지고, 줄거리는 거들 뿐입니다. 엥, 이거 완전 [폴아웃3]의 영화 판 아닌가? 그러나 저러나 전 둘 다 재밌게 즐겼네요. 길예르모 감독도 여전히 좋아하고요. 그리고 그의 이미지도 왕창 사랑합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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