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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2/02 02:14:19
Name   맷코발스키
Subject   크림슨 피크 후기



(스포가 있지만 사실상 무의미..)



우리의 연약한 주인공 '이디스(미아 와시코브스카)'는 아메리칸드림에 성공한 건축가 아버지의 딸내미입니다. 그냥 딸도 아니고, 외동딸이라는 군요. 의사 양반이랑 결혼해서 남은 삶을 편하게 보내려는 기대도 찰나, '준 귀족'이라는 타지 출신에 일푼도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리고, 엄마가 그렇게 경고했건만. 사랑에 눈 먼 주인공은 남편과 그의 싸이코 누나와 함께 이들의 고향, '크림슨 피크'로 짐 싸들고 오게 되는데요. 과연 이디스는 크림슨 피크와 남매 사기단의 깊고 어두운 비밀을 알아내고, 이 끔찍한 진탕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요?


1.
참 한결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감독들이 있는데요.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어떻고 간에 해당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고 독특하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취향에 맞는다면 말이지요. 제겐 테리 길리엄과 닐 블룸캠프, 그리고 길예르모가 그런 감독 중 하나입니다. 물론 길예르모를 이들과 나란히 말한다는 것은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요.(테리 길리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써보고 싶네요) 여하튼 그가 꾸준히 보여주는 특유의 고딕 판타지스러운 이미지는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정말 좋았어요.

줄거리에 대해서는 솔직히 별로 할 말이 없는데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어떤 부류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정도입니다. 포스터, 그리고 영화의 첫 30분만 보아도 대강 모든 다음 줄거리가 예상이 됩니다. 그래, 저 싸이코 여자가 문제가 되겠군. 그래서 진짜 문제가 되냐고요? 진짜 그래요. 근데 그게 정말이지 너무 뻔해서 이렇게 대놓고 스포를 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2.
그러므로 이 영화가 감독의 전작인 <판의 미로>나 <악마의 등뼈>만큼 서사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는 못하지요. 또한 무슨 마술적...환상적...어떤... 리얼리즘...스러움...이라기엔 역사적인 맥락이 두 전작만큼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지라.
뭐, 영화의 주제를 생각해보면 역사성이 아주 없다고 단정하진 못하겠지만요. 크림슨 피크. 크림슨 피크는 붉은 진흙 위에 세워져있고, 누군가의 피가 없이는,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이 침묵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곳이지요. 타인의 희생 위에서 겨우 지탱되는 몰락한 귀족의 땅이라! 아하. 그러니 유령들이 비밀을 폭로하고, 크림슨 피크는 끝장나야만 하겠군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전작들보다는 덜 우아하게 드러나지요.

뭐, 그런데다가 시간적 대립 구도가 좀 뻔하기도 합니다. 19세기에 뭔 일이 있었지? 전근대와 근대?

생각해보니 이디스는 훌륭한 '부르조아지 신여성'의 표본이로군요. 이디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여성은 초반부에 상당히 똑부러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뻔하지만 매력적이기는 해요. 그런데 아주 많은 작품에서 이런 신녀성들이 사랑을 쫓는 순간 덜 흥미로운 인물로 변하는데요. 멍청해진달까. 얘도 그 클리셰를 그대로 따르는 것 같아요. 크림슨 피크에 가서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매력이라곤 호기심과 의지입니다. 다른 인물들도 따로 언급해줄만큼 흥미롭지 않고요.


3.
여태까지 이 영화에 대해 주제니 줄거리니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았지만, 애초에 작정하고 서사에 힘을 주려고 한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왠지 감독이 끝내주는 이미지와 장면 몇 개에 팍 꽂힌 것 같단 말이지요. 그리고는 이미지, 이미지들을 적당히 이어 붙여 영화를 만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화를 볼 때 팝콘을 들고 눈호강 하면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제겐 줄거리의 지루함을 덮을 정도로 영상이 마음에 들었어요. 정말 끝내줬죠. 이걸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길예르모 감독은 어떤 물건이 어떤 물건과 같이 놓이면 잘 어울리는지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달까요. 색채도 그렇지요. 영화 내에서 등장하는 색들은 상당히 다채롭고 강렬한데, 전혀 과하게 느껴지지 않거든요. '몰락' 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멋지게 시각화·공간화 할 수 있을까, 감탄이 나옵니다.

또, 이 영화에 살짝 가미된 호러 요소에 대해서도 말해야겠어요. 호러의 미덕은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내 등 뒤의 유령이 날 깜짝 놀래키는 것'이 가장 익숙한 류의 호러겠고, '내 등 뒤의 유령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음. 왠지 뒤를 돌아보면 있을 것 같은데, 도저히 뒤는 못 보겠음' 식의 똥줄타는 심리적 압박감과 불안감의 호러가 있지요. <크림슨 피크>는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네요. 그리고 전 그런 부분이 좋았어요. <크림슨 피크>의 잉크 유령들은 품격이 있습니다. 생전에 고귀하신 분들이라 그럴 수도 있고요. 이들은 대단히 느긋하게 움직이는데, 그게 훨씬 더 무섭게 다가오죠. 다만 좀 절제가 과하긴 했나봐요. 제 옆을 지나가던 숱한 관람객들이 유령이 나오기 전까지 졸았다고 하는 걸 보면요. 뒤로 가면 좀 다른 류의 공포물로 바뀌는데, 그건 이전보단 덜 무섭고 더 아쉬워요.


4.
그래서 결론은 이미지는 멋지고, 줄거리는 거들 뿐입니다. 엥, 이거 완전 [폴아웃3]의 영화 판 아닌가? 그러나 저러나 전 둘 다 재밌게 즐겼네요. 길예르모 감독도 여전히 좋아하고요. 그리고 그의 이미지도 왕창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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