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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1/06 00:53:38 |
Name | Moira |
Subject | 오이디푸스와 페르스발 |
레비-스트로스가 좋아했던 신화 모티프 중에 페르스발(Perceval, 퍼시벌) 이야기가 있습니다. 100살 넘게 살다 돌아간 이 정력 왕성한 구조주의 신화학자는 종종 중세 민담인 페르스발 이야기를 오이디푸스 신화와 병치시켜 재미있는 분석을 하곤 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다들 아시다시피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입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으로 조명된 덕분에 문학사상 가장 강력한 캐릭터 중 한 명이 되었죠. 테베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상간하리라는 신탁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고, 양부모의 슬하에서 장성한 후 운명에 이끌린 듯 고향으로 돌아가 불길한 예언을 몸소 실현하게 됩니다. 당시 테베 시의 입구에는 스핑크스라는 몬스터가 버티고 앉아 여행자들에게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고 맞추지 못하면 재깍 잡아먹곤 했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정답을 맞히자 스핑크스는 부끄러워하며 자살합니다(오이디푸스의 손에 죽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이미 길에서 아버지를 때려죽인 터라 혼잣몸이 되어 있었던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스핑크스를 퇴치한 영웅과 혼인하여 테베 왕좌를 내어줍니다. 이 패륜과 근친상간이 원인이 되어 테베에는 끔찍한 역병이 돌고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됩니다. 그 뒤는 다들 아시는 대로... 페르스발은 아서 왕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입니다. 페르스발은 촌구석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던 중 지나가는 기사들을 목격하고는 중2병이 돋아 저도 기사가 되겠다고 길을 나섭니다. 물정 모르는 이 소년은 여행 도중 다행히 한 점잖은 기사를 만나 그에게서 기사도의 범절을 교육받는데, 그 중에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뒷담화를 하지 마라'는 가르침도 있었지요. 페르스발이 다시 길을 떠나 어느 강가에 도착하자 고기잡이배를 타고 있던 어부왕(Fisher King)이 그를 보고 자기 성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만찬 석상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식탁 앞으로 한 청년이 피가 흘러내리는 창을 든 채 지나가고, 한 시녀는 술잔(성배)을 들고, 또 다른 시녀는 은쟁반을 들고 갑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궁금해서 좀이 쑤시면서도 페르스발은 기사도 범절을 떠올리며 참습니다. 남의 일을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까요. 만찬 후 잠자리에 들었다 깨어나니 놀랍게도 하룻밤 묵었던 성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페르스발은 여행을 또 계속하다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는 여자를 발견합니다. 여자는 페르스발이 어부왕의 성에 묵었다는 말을 듣고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부왕은 예전에 전쟁터에서 창상을 입어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낚시질을 하는 것은 그 고통을 달래기 위한 레저였지요. 여자는 꾸짖길, 만일 페르스발이 그 창과 술잔 퍼포먼스가 무슨 뜻이냐고 질문했다면 어부왕의 상처가 나아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리라(마치 <개구리 왕자님>에서 공주님이 개구리를 집어던져야 마법이 풀리는 것처럼), 그리고 그가 지배하는 땅에 사는 생명체들은 저주에서 풀려나 생식력을 회복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뒷이야기는 각자 알아서...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오이디푸스는 '대답이 없는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비극을 초래하였고, 페르스발은 '물어야 할 질문'을 하지 않아 고통을 남겼습니다. 스핑크스가 던진 질문, 즉 운명적으로 대답하지 말았어야 하는 질문에 대답한 것은 과잉 커뮤니케이션(accelerated communication)입니다. 그 결과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하게 되었고 테베에 역병을 불러왔으니까요. 어부왕이 애타게 기다렸던 질문을 끝내 제기하지 않아 그를 고통 속에 버려두었던 페르스발의 경우는 단절된 커뮤니케이션(interrupted communication)으로 명명합니다. 근친상간은 과잉 대답이고, 순결함, 무지함, 성불능은 질문 없는 답입니다. 정상적인 자연의 순환을 가속화시키고 급격히 변화시키는 역병, 부패, 악취는 과잉 커뮤니케이션에 해당하고, 자연의 순환이 정지되고 땅의 생식력이 고갈되어 아무런 움직임도 변화도 없는 세계는 단절된 커뮤니케이션에 해당합니다. 거울쌍처럼 대립되는 오이디푸스-페르스발 이야기는 분석하기에 따라 수없이 재미있는 요소들을 길어낼 수 있는 신화소입니다. 페르스발 이야기는 사실 아주 오래 전 불핀치의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그때는 별로 인상 깊지 않은 캐릭터로 넘기고 지나갔습니다. 역시 대가들은 인용과 배치의 예술가들입니다. '제때 해야 할 질문을 하지 않은 죄'에서 잠시 주춤했더랬습니다. 나는 던져야 할 질문을 제때 던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요. 수많은 부조리와 불합리를 보면서도 '예의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 경우들, 사회와 나를 단절시키고 말았던 경우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또 '지금 대답해서는 안 된다고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리는 질문들'도 떠오릅니다. '자발적으로 모집에 응한 위안부들이 있지 않았는가?' '유가족들이 대입특례를 받은 것은 불공정하지 않은가?' '여자들은/남자들은...이기적이지 않은가?' 곳곳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노이즈들이 정작 던져야 할 질문들을 뒤덮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는 이미 그 자체의 엄청난 수효와 또 거기에서 비롯되어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문제에 싫증이 나 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커뮤니케이션의 밀도가 높아짐에 따라 증대되는 물적, 지적 교류에서 생기는 마찰 때문에 인류의 피부가 염증을 일으킨 것만 같았다... 사회집단들 상호간에 거리가 좁혀졌을 때 그들이 고름처럼 분비해내는 이러한 모든 어리석고 증오스럽고 경망스러운 현상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겪은 것이 아니었다. (<슬픈 열대> 한길사, 127쪽) p.s. 예전에 <하룻밤의 지식여행 레비스트로스>(보리스 와이즈먼 글, 주디 그로브스 그림. 김영사 2008)을 읽다가 메모해 두었던 이야기를 써보았습니다. 얄팍하고 재미있고 편집이 잘 된 책입니다. 30분만에 읽을 수 있어요. p.s. 2. 레비-스트로스가 저본으로 삼았던 페르스발 전설은 12세기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판본입니다. 국내에는 최애리 선생의 번역으로 <그라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De Chrétien de Troyes à Richard Wagner]라는 논문에서 오이디푸스, 페르스발,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치팔을 분석한 것이 유명합니다. p.s. 3. 마이 게시판 기능을 시험할 겸 써봤습니다. imgur 노가다가 좀더 편해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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