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2/05 14:53:46
Name   한성희
Subject   금수저 만능 사회
(아랫글은 2015년 7월, 요즘은 식상해진 '금수저'란 표현이 한창 회자될 무렵 페이스북 게시용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활용한 소재들의 시의성이 많이 떨어졌지만 그냥 심심하게 편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화 베테랑이 개봉 18일 만에 누적 관객 수 8백만을 넘어섰다. 상영관개수와 홍보역량에 얹혀 관객 수만 낚아채는 영화들이 제법 되는 판에 그럴만한 영화가 관객몰이를 하는 건 어쨌거나 반길 일이다. 잘 만들어졌다. 손에 땀을 쥐었다가, 화가 막 났다가는 크레딧이 오르기 직전에 가서 속까지 통쾌해진다. 평면적인 캐릭터가 일차원적 스토리, 단순한 플롯을 이끄는데 몰입도가 떨어지는 지점이 없다. 참신한 대사와 다채로운 장면 구성, 입체적인 배우들의 열연 덕분이다.

"우리한테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판 뒤집혔다”는 극중 서도철의 대사는 특히 압권이다. 앉아 보는 관객들의 아득한 정의감까지 되살려낸다. 그런데도 얼마간의 찜찜함이 남는다. 영화가 깃대를 꽂은 주제의식 탓이다. 영화는 안하무인, 유아독존 재벌 3세의 ‘갑질’을 꼬집는다. 우리는 뭔가 알고 있기에 그저 먼 일, 남 일이라 쳐두고 태평할 수 없다. 맷갑 폭행사건, 땅콩회항이 딱 집혀 떠올라서다. 어딘가에서 횡행하겠지.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다. 매스컴에 단골로 오르는 S사, L사의 자식들 이름이 눈에 밟히기도 한다.

스크린을 향한 관객들의 분노는 조태오의 인간성을 향하지 않는다. 저런 집안에서 저런 분위기에서 저렇게 떠받들려 자랐다면, 그래. 그럴 만도 하다. 앵글을 바꿔보면 조태오 역시 피해자다. 아량에 따라서 동정, 연민도 얼마든지 베풀 수 있다. 문제는 그보다, 부의 대물림이 일상적인 사회구조다. 조태오가 휘두르는 힘이 억지스러운 설정이 아니게 읽히는 그 자체다. 새삼스럽지 않은 게 새삼스럽다.

지난주에 유엔의 무급인턴들이 반기문 사무총장에게 보낸 서신이 화제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시끄러웠던 열정페이 문제가 패션계, 방송계의 울타릴 한참 벗어나 유엔 사무국에까지 닿아있었단 사실은 누가 뭐래도 좀 충격적이다. 세계인의 인권을 수호해야 할 유엔까지 문제라면 문제가 없는 곳이 더 이상할 지경이다. 무급인턴들이 서신에서 내세운 논리는 수긍이 쉽다. 세계인권선언 조항을 근거로 ‘무급인턴제는 재정 지원 없이 일할 수 없는 유능한 젊은이들에게 간접적 제한을 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긴, 무급으로 일을 하려면 부모의 재정 지원이 필수다. 파견 형태로 근무를 하는 유엔의 경우라면 더욱이나. 뉴욕이나 런던 지부로 발령이 나도 묵고 지내는 데 문제가 없으려면 말이다.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게 돈인데 돈을 받지 않으니 누군가는 돈을 대야만 한다. 유엔이라면 똑똑한 청년들만 뽑을 텐데 그냥 ‘똑똑한 청년’이기만 해선 안 되었던 거다. ‘(돈을 대줄 썩은 동아줄이라도 지닌)’ 똑똑한 청년이 애초 구인대상이었던 것.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대표하는 기관에서 말이다.

요 근래 대물림 문제를 따지는데 우리의 법조계를 빼먹으면 섭섭하다. 로스쿨 제도는 진작에 ‘현대판 음서제’라는 별명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1963년 시작된 사법시험 제도는 우리 사회에서 인생역전, 신분상승의 상징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문턱은 높지만 어쨌든 ‘금수저’ 물고 태어난 게 그나마 변수가 덜 되는 성역이 바로 사법고시였다. 로스쿨에 와선, 아무래도 배경이 변수가 될 여지가 높아졌다. 입시 시험을 위한 별도의 준비가 필요한데다 3년 내내 비싼 수업료를 감당해내야 한다. 결정적으로, 변호사시험 성적, 법원 검찰 로펌 채용까지 모든 과정이 비공개로 치러진다. 고만고만한 지원자가 몰려 누군가 뽑히는데, 그에겐 하필 굵직한 ‘빽’이 있다. 로스쿨에 진학한 고위층 자녀가 주요 기관과 로펌에 발탁됐단 뉴스는 더 이상 참신하지 않다. 한때 계층상승의 사다리처럼 여겨졌던 법조인 등용문이 현대판 음서제로 전락한 꼴이다.

한창 방영 중인 한 예능 프로그램도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버지와 딸의 동반 출연 포맷 탓이다. 일찍이 유행을 탔던 육아 예능의 성인판 쯤으로 미뤄둘 수 있지만 다 큰 딸들은 공교롭게도 그다지 귀엽지 않으면서, 모두 연예인 지망생들이다. 딸들은 스타 아버지의 후광을 엎고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면서도 대중들의 눈에 수월하게 도장을 찍는다. 연영과 동료들이 무대나 연습실에서 무던히 땀을 흘리고 있을 때 말이다. 비단 돈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자산까지도 거침없이 대물림 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가진 것 없는 부모를 지닌 대다수 청년들은 여러모로 맥이 빠진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가 자녀의 미래를 당락 짓는 세습사회가 이 땅에서 그리 멀지 않다. 시장 우위의 사회에서 강조되어야 할 기회의 균등, 출발선의 평등은 이미 사회 과목 주관식 답안지에나 적힐 진부한 구호 내지는 식상한 문구로 굳어진 지 모른다. 든든한 부모 ‘빽’이 없는 이들도 꿀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바란다면, 음. 차라리 마블Marvel에 바라보는 게 현실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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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 내용 자체보다는, 이 글로 인해 촉발된 댓글 토론에 추천을 주고자 합니다. 가능하면 댓글별 추천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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