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16/03/30 00:18:54 |
Name | 얼그레이 |
File #1 | voynich_manuscript.jpg (90.5 KB), Download : 3 |
Subject | [조각글 20주차] 보이니치 |
[조각글 20주차 주제]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글을 쓰세요. - 분량, 장르, 전개 방향 자유입니다. 합평 받고 싶은 부분 두루치기 2인분 부탁드립니다. 하고 싶은 말 늘 처음 구상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글이 나오는 것 같아요. 매 주 쓰려 하지만 더 어렵네요. =====================================================================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죠. 누군가 태어나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 사람은 '살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사람도 그 어떤 흔적을 남긴 적이 없어요. 죽은 그 사람으로서는 억울할지 모르더라도 그 사람이 살았다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죠. 그런 사람의 삶은 얼마나 외로울지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에게 외로움이란 감정이 있는지, 기쁨이라는 감정이 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한 마리 짐승처럼 살다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세상에 600년간 해독되지 않은 책이 있었죠. 그림 말고는 유추할 수 있는 텍스트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책은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그 책을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읽을 수 없는 책. 그 책의 효용 가치가 과연 있을 거냐는 말이죠. 먼 후대에 그 책을 해독할 수 있게 된다 한들, 말입니다. 우리야 어휴, 600년이나 된 책이려니 하지만 아주 긴 시간이라는 우주적인 맥락에선 결국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이 모든 과정은 '수고'스럽습니다. 산다는 것도 수고스럽고, 책을 해독하는 과정이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과정이나 모두 수고스럽죠. 제가 책을 훔쳐서 태우는 과정까지도 사실 모두 수고스러웠던 부분입니다. 의외로 책은 잘 타지 않고 처리하기도 번거롭죠. 저는 그저 이 책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수고스러움을 봉쇄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절도죄와 방화죄를 제게 적용하신다 하신들,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책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도 가치 판단이 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 책을 연구하던 사람이나, 기부했던 사람들로서는 화가 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 책이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현재로써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연구하고 가치가 있겠거니 했던 것이 나중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누군가가 가짜로 만든 책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아주 한심한 일을 막은 것뿐입니다. 굳이 그것을 죄라고 하신다면, 값을 치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제 잘못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든이 말하는 데에는 나름에 일리가 있었다. 비록 그것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고든은 말 할 것도 없이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고든은 책을 태워버린 것이 아니라, 분명히 어딘가로 빼돌렸을 것이다. 고든은 이쪽에서 꽤 이름을 날리는 '업자'다. 불법으로 골동품 등을 밀매하며, 수익을 얻는 장물아비. 단순히 미친놈이었다면 내가 그의 말을 믿었을지도 모르지. 고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논리이며 시간을 끌기 위한 일종의 궁여지책이라는 것을. 허술한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며 치밀하게 작업하던 고든이 순순히 증거를 남겼다? 그는 분명 약점을 잡힌 셈이다. 그가 거짓으로 증언하며 징역을 살아야 한 대가는 이미 치렀을 것이다. 그것이 고든이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킨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금전적인 이익을 받았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봐야 할 일이다. 재키를 비롯해 다른 형사들이 벌써 고든에 대한 주변 조사를 시작했다. 내가 할 일은 고든을 추궁해 단서를 확보하는 것이다. 0
이 게시판에 등록된 얼그레이님의 최근 게시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