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5/01 12:03:41
Name   얼그레이
Link #1   http://bgmstore.net/view/kLFUQ
Subject   [24주차] 구차한 사과
[조각글 24주차 주제]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이해하기 힘든 것'에 대해서 써주세요.
시나 수필로 작성하되 소설로 전개하면 안 됩니다.

*주제 선정자의 말
이해하기 힘들다는 감정에 대해서 쓸 필요는 없고, 대상이 뭐든 상관없어요.
'신이 존재하는 걸 믿는 사람들' 이런 추상적이고 딱딱한 걸 수도 있고, 엄마가 나를 왜 사랑하는지, 
서울 사람들은 왜 순대를 소금에 찍어먹는지, 등등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분량, 장르, 전개 방향 자유입니다.


합평 받고 싶은 부분
읽고 있는 당신의 솔직한 생각

하고 싶은 말
제목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들어오셨나요?

본문
1.
밤은 상대를 더 이해하는 것처럼 만든다. 같은 얘길 해도 낮보다는 밤이 더 울림이 있는 것 같다. 서로에게 더 집중하게 만드는 느낌. 그래서 그 많던 시간을 두고 늦은 새벽에 글을 쓰고 있겠지.

2.
호랑나비를 본지 아주 오래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호랑나비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인 걸로 기억한다. 2003년이니까 10년도 더 전이다. 졸업사진을 찍기 위해 근방 어딘가의 호수공원인가 월드컵 공원에 간 것 같다. 그땐 봄이어서 나비들이 무척 많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우리는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옆에는 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옆으론 각종 풀들이 고인물의 악취와 함께 자라고 있었다. 그곳엔 흰나비며 호랑나비들이 날다가 꽃 위에서 쉬다 하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에 걷고있던건 소희였다. 김소희인가 윤소희인가 하는 아이로 키가 무척 컸고, (170대로 기억한다) 순한 눈매에 GOD의 열렬한 팬이었다. 애들이 자주 놀리자 GOD 팬을 5학년 때부턴 그만두었다곤 종종 말했지만. 

나는 길을 가다 멈춰서 나비를 구경하며 예쁘다고 말했는데 소희는 단박에 징그럽다고 말했다. 나는 순간 무척 당황했다. 소희는 성격상으로도 무엇으로도 일부러 징그럽다고 말하는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소희는 나비가 징그럽고 싫다고 연신 말했다. 나는 점점 더 말문이 막혀왔는데, 그도 그럴것이 나는 나비를 싫어하는 사람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나비가 징그럽다구? 어떤면에서? 자세히 가까이서 보면 징그러워. 나는 어렸을 때 봤던 비디오 속의 클로즈업된 나비를 떠올리며 어느정도 수긍했다. 징그러울수도 있지만 이 화려하고 예쁜 날개가 징그럽다니. 옆에 있던 다른 아이도 동의하며 징그러워했다. 

나는 그날 김밥을 먹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빈 도시락 통을 건내주며 말했다. 엄마 우리반 소희는 나비가 징그럽대. 엄마도 동의했다. 맞아, 나비는 징그럽지. 벌레잖아. 

벌레라니! 맞는 말이지만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비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의 단절감. 나와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낯설고 단절감을 느끼게 했다.

3.
거절은 언제나 무섭다. 거절은 상대와 나를 구분지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 음식은 어때? 맛 없어. 그 사람의 감정 표현이나 가치 표현에 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내가 거절이라도 당한양, 나는 가슴이 섬뜻한다. 다른 사람이 싫어해도, 내가 좋으면 그만이고. 다른 사람이 좋아해도 내가 싫으면 그만인 것을. 적어도 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좋고 싫음을 분명히 하려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4.
모든 사람들이 나 처럼 생각하지는 않을거다. 나는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두렵다. 어렵다. 말해주지 않는 당신들을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이건 당신들도 마찬가지일까.

5.
그러나 이런 나를 이해한다고 한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를 것 같다. 화를 내야 할까. 웃어야 할까.

6.
사과.
당신이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는지 궁금하다. 누군가는 아이폰이 생각날수도 있고, 방금 마시고 내려놓은 사과 쥬스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과'라고 하면 부사가 떠오른다. 홍옥이나 아오리같은 사과의 한 품종 말이다. 아빠는 사과 중에 부사를 가장 좋아했고, 우리집에서 익히 볼 수 있었던 사과는 부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과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진 모르더라도, 그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다. 그 기억들은 각자를 이루는 일종의 매커니즘이 된다. 구구절절하게 내가 사과에 대해 어떤 생각과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 이상에야 자신의 경험대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과에 대한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 지면을 모두 할애한다 하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과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자신이 내게는 없다. 사과 하나만 자기도고 남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힘듦이나 상처, 고통 등에 있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엄청난 노력을 통해 99%를 이해했다 하더라도, 나머지 1%를 모른다면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말하고 있는 '이해'의 폭이라는 것은 굉장히 광범한 것인지, 아주 협소한 것인지, 또 그 정도라는 것은 모두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를텐데. 

내게 남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일종의 정직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위로에 서툴어지고 만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나는 내 경험에 빗대어 이해할 뿐이고, 결국 내가 받아들였던 방식으로 남을 이해하고 있는 것 밖에 되지 않으니까. 결국 남을 위한다는 말이 내 스스로에게나 해줄 수 있는 말이라면 그 말이 상대에게 의미가 있을까.

7.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도서관엔 늘 자주 들르는 초등학생이 있었다. 보통 아이들은 또래들과 놀거나 학원에 가 있을 시간인데. 이 아이들은 어찌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을까. 나는 잘못된 것임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자주 그 아이들을 연민했다. 저 아이들은 어떤 상처를 받았고, 어떤 외로움으로 책을 찾게 된 것일까. 나는 내 방식대로밖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 돌아올 때면 내가 혐오스럽고, 이런 내 생각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8.
누군가를 이해할 수도 없고, 내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는 내가. 말은 왜 하고 글은 왜 쓰는 것일까.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할수록,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할 수록 우리는 진실에서 더 멀어질 뿐인데.

9.
살면서 누구라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다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하는 생각대로 내 모든 것을 이해해 줄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영원히 없다는데서, 모든 외로움이 기인한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외롭지 않기 위해 대화를 하겠지.

10.
서로를 이해하려는 그 말조차, 서로 다른 방식의 훼손된 이해를 주고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훼손된 말로 위로를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자 글을 남긴다. 쓴다는 건 이 모든 피로함 속에서 구차해지는 일이다.



2
  • 이해에 관한 감도깊은 글 잘 읽었어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355 창작[17주차] 치킨 11 얼그레이 16/03/08 4689 1
2365 창작[18주차 조각글 주제] '대화로만 이어지는 글' 1 얼그레이 16/03/09 3513 0
5488 음악[19금] 필 받아서 써보는 힙합/트랩/레게/댄스홀/edm 플레이리스트 10 Paft Dunk 17/04/21 5775 3
2421 창작[19주차 조각글 주제] '무생물의 사랑' 3 얼그레이 16/03/17 3941 0
2430 창작[19주차] 무엇이 우리의 밤을 가르게 될까. 1 틸트 16/03/19 3623 1
2460 창작[19주차] 종이학 2 제주감귤 16/03/24 3797 0
15050 게임[1부 : 황제를 도발하다] 님 임요환 긁어봄?? ㅋㅋ 6 Groot 24/11/18 458 0
10112 오프모임[1월 17일] 종로 느린마을 양조장(인원 모집 종료) 30 호라타래 19/12/24 5014 3
10289 오프모임[2/16]툴루즈 로트렉 전시회 - 저녁식사 벙 49 무더니 20/02/14 5002 9
1415 도서/문학[2015년 노벨문학상]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여성은 전쟁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14 다람쥐 15/11/01 10417 9
9880 기타[2019아시아미래포럼] 제레미 리프킨 "칼날처럼 짧은 시간 10년, 인류문명 전환해야" 2 다군 19/10/23 4829 2
2469 창작[20주차 주제]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 1 얼그레이 16/03/25 3502 0
2515 창작[20주차] 처음 함께 만났던 언젠가의 어느날처럼. 1 틸트 16/04/01 3531 2
2500 창작[21주차 주제 공지] 일기쓰기 1 얼그레이 16/03/30 3312 0
2554 창작[21주차] 4월 1일~ 4월 5일 일기 14 얼그레이 16/04/05 3625 1
2551 창작[21주차] 想念의 片鱗 4 레이드 16/04/05 3000 0
2546 창작[21주차] 생각들 2 제주감귤 16/04/05 3390 0
2579 창작[21주차] 일기 1 까페레인 16/04/08 3053 0
2572 창작[22주차 주제] '봄날 풍경'으로 동화나 동시 짓기 2 얼그레이 16/04/07 3342 0
2639 창작[22주차] 빵곰 삼촌, 봄이 뭐에요? 7 얼그레이 16/04/19 3964 5
2655 창작[23주차] 인류 멸망 시나리오 7 얼그레이 16/04/20 3187 0
2708 창작[23주차] 인류의 황혼 2 김보노 16/04/28 3290 2
2704 창작[23주차]- 복사본 2 제주감귤 16/04/28 3797 2
2744 창작[24주차 조각글]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3 묘해 16/05/04 3303 1
2720 창작[24주차] 구차한 사과 2 얼그레이 16/05/01 3909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