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16/06/14 21:21:07 |
Name | 얼그레이 |
Subject | [30주차] 미끄럼틀 |
[조각글 30주차 주제] '잠', '짝사랑', '홍차' 세가지 단어를 활용하여 글쓰기 - 분량, 장르, 전개 방향 자유입니다. *조건 세가지 단어가 모두 들어가야 합니다. [추가 과제 - 필사하기] 불참하시는 분들 중에서 가급적이면 권장해드립니다.(의무는 아니에요)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를 최소 노트 반장 분량의 글을 써주세요. 필사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문체나 표현등을 익히기에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글쓰기가 어려우신 분은 필사를 통해 천천히 시작하시는 방법도 좋은 방법입니다! 시도 좋고 소설도 좋고 수필도 좋습니다. 혹시 꾸준히 작성하실 분은, 일정한 분량을 잡고 꾸준히 진행해나가시는 것도 좋습니다. 글을 쓰신 분들 중에서 원하신다면 필사 과제를 추가로 더 작성하셔도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생긴 '타임라인 게시판'을 활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합평 받고 싶은 부분 ex) 맞춤법 틀린 것 있는지 신경써주세요, 묘사가 약합니다, 서사의 흐름은 자연스럽나요?, 문체가 너무 늘어지는 편인데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글 구성에 대해 조언을 받고 싶습니다, 맘에 안 드는 것은 전부 다 말씀해주세요, 등등 자신이 글을 쓰면서 유의깊게 봐주었으면 하는 부분 등등을 얘기해주시면 덧글을 달 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말 본문 ================================================= 추억은 선택적이다. 어렸을 때 미끄럼틀 위에서 내려다보며 느꼈던 황홀한 감정들이 이제는 시시한 풍경으로 남는 것처럼. 선택된 기억은 언제나 그 원형을 유지하는 법이 없다. 슬픈 추억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내가 슬프기 위한 선택일 뿐. 나는 누구에게나 불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은우에게만은 그러지 못했다. 내 삶에서 가장 불쾌하게 끼어든 예상치 못한 불청객…. 나는 은우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로 소파에 앉아 그녀의 책을 보았다. 표지의 사진은 생장역 gare saint jean이 분명했다. 아마 그 날 찍은 사진이겠지. 소파에 몸을 묻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저녁에 마셨던 위스키 때문인지 혼곤해져 왔다. 천장의 전구가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전구 속의 필라멘트를 눈물이 고이도록 노려보며, 내 기억은 은우에게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꿈결에, 얼핏 생장역이 보이는 듯 했다. 나는 내가 정말로 그곳으로 간 것인지, 아니면 내 속안의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분간하지 못하며 조용히 가라앉았다. 은우는 그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특유의 빈정거림이나 퉁명스러운 모습에서도 그 애에 대한 호의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톡 쏘아대는 뼈 있는 말에 화가 났다가도, 그 애가 픽 웃으면 같이 웃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은우를 사랑하게 된 그 순간부터, 나는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애에 관련해서는 내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아직도 그 애의 표정들이 선연하다. 긴장했을 때, 얼굴에 설핏 떠오르다 사라지는 불안이나, 내 뱉는 모든 첫마디의 여린 떨림까지도. 오른쪽으로 턱을 괴는 습관과, 자연스럽게 오른쪽 어깨 위로 떨어지던 그 애의 머리카락과 커피를 마시던 습관들. 커피의 모든 맛을 느끼는 방법이라며, 막 나온 뜨거운 커피의 첫 모금과, 차가울 정도로 식은 커피의 마지막 모금까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먹던 습관들. 은우의 사소한 습관들을 떠올릴 때면 웃음이 비죽비죽 흘러나온다. 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먹었다. 몸을 숙일 때마다 어깨 위로 부드럽게 떨어지던 머리카락. 난 아직도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 은우의 가슴 안으로 흘러 들어가던 그 광경을 기억한다. 그 애의 몸을 이루고 있던 그 수많은 곡선들. 은우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온 몸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깨어나서, 자신이 존재를 시위하는 통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세포들이 외쳐대는 것은 은우, 지독하게도 그 이름이었다. -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인상을 쓰고 모니터를 노려봤자 아픈 건 내 눈이다. 어린 여자 아이와 나이가 있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두 사람의 이름과 나이조차 정할 수 없었다. 단순히 A와 B로 둔 채로, 뿌리 없는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미끼도 없이 안개 속에서 물고기를 낚는 기분이었다. 혹시나 새로운 환경에서 글을 쓰면 괜찮아 질까, 장소를 옮겨 보았지만 소용은 없었다. 여고 근처에 있는 조용한 카페였다. 머릿속으로 막연히 두 주인공을 올려보며 몇 살이면 좋을까, 관자놀이를 눌러댔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열두시가 다 되어갈 때 즈음해서, 편지가 도착했고,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유리창, 단단한 유리창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A에게서 온 편지였다. 나는 편지를 읽으며 천천히 A를 떠올렸다. “모두 다 기억한다는 거, 어떨 것 같아?” “모든 걸 다 기억한다구요?” A는 똑같이 반문했고, 나는 대답 없이 아쌈을 홀짝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기억하는 거야. 하나도 빠짐 없이. 내가 언제 뭘 먹었는지,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 말이야. 지금 여기 어린 물방울이 어떻게 흐르는 것까지도 말이야.” 탄생한 이래, 수많은 살육을 벌여왔던 인류가 지금까지 종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억과 망각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희망은 쉬이 잊어도, 끔찍한 것들은 기억해야만 했으니까. 사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아마도 기억하는 매커니즘이 판이한-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을 상처 입힌 말들. 공효진을 따라한 헤어스타일의, C컵, 물방울 코젤 : ‘전에 내가 그렇게 얘기했었잖아. 기억 안 나?’ 알바하던 카페에서 잠시 만났던, 내가 첫키스 상대라고 말했던 통통녀 : ‘오빠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문창과, 작가 지망생, 집착녀 : ‘오빤, 그렇게 글을 잘 쓰면서. 말은 참 험하게 한다? 어떻게 날 그렇게 상처 주고선 기억을 그렇게 못하는 건데, 오빠한텐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돼?’ 뭐, 했던 모든 말들을 녹음이라도 해뒀다가 매일 잠자기 전에 복습해야 하나? 그녀들의 분노와 눈물이 애석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귀에 못이 박히는 그 판이하면서도 같은 말들. 그 때 일었던 짜증났던 감정만 떠오를 뿐…. 소설 속의 A와 B를 떠올린다.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전지적 시점으로 A와 B의 시선이 번갈아 가며 전개되는 소설인데, B는 인적 드문 산 속에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자 아이인데, 그 애가 일하는 카페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 그 카페에 어느 날 갑자기 A가 찾아온다. 그 날은 눈이 무척 많이 내린 날이었는데, A는 절대 운동을 하러 나온 복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운동을 나왔다가 들렸다고 한다. 그러며 매일 자신의 집 앞을 지나 산책하는 B를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B의 시점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카페 근방을 벗어난 적이 없다. 하지만 B는 이상한 기색도 없이 A에게 커피를 대접한다. 그리고 심지어 A는 B의 카페에서 아예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하며, B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A는 모든 것을 기억 하는 사내이다. 출판사에서 제시한 마감은 두 달 반 가량이 남았다. A를 떠올린지 반년이 되었지만, 난 A의 이름을 정하지도 못했다. 이 기묘한 스토리가 얼마나 나를 애먹이는지, 아무도 이해를 못 할 것이다. 다른 소설가들도 이럴까?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A를 떠올린 이래로 나는 다른 이야기들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기분 전환으로 자신의 손을 휴대폰(핸드폰으로 자주 부르는 언어유희를 이용한)으로 만든 남자 이야기를 단편으로 쓰려고 했는데,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머릿속에 이야기들이 떠오르다가도, 글을 쓰려고만 하면 심각한 무기력증이 찾아올 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노트북으로 써보려고 하고, 종이에 써보려고도 했지만 쓸 수가 없었다. 피시방에도 가봤고, 길거리에서 펜을 들고선, 미친놈마냥 종이를 뚫어져라 노려보기도 했었다. 분필로 칠판에라도 써질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가 경비에게 끌려 나온적도 있었고, 기차를 타고 바닷가에 가서 모래사장에라도 글을 써보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안됐다. 출판사에 들이닥쳐 글 못쓰겠다고 깽판 놓으러 갔다가 컴퓨터가 눈에 띄어 저기서라도 써보겠다고 –나중에 사장이 전화로 얘기해서 알았지만- 인턴직원을 밀쳐내고 그 컴퓨터 앞에도 앉아봤지만 아무 것도 쓸 수가 없었다. 시시한 삼류소설도 흉내내 보려했고, 하다 못해 필사(筆寫)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이름도 없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빌어먹을 A가 무슨 요행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한 달 반간 가량의 방황에, 결국 굴복하고 A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이야기를 쓰면 잘 써지는 것도 아니다. 오죽하면 이태껏 동안 죽어라 앉아서 쓴 글이 18장밖에 되지 않을까. 내가 쓰는 글이고, A도 내가 만든 캐릭터이지만 이 보이지도 않는 놈의 멱살을 붙잡을 수 있다면 붙잡고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A에 대한 증오만 커져 갈 뿐이었다. 카페에선, 어떤 여가수의 데뷔곡이 흘러 나왔다. 그 데뷔곡의 인상이 너무 강해, 그 다음 후속곡들은 족족 망해버려 지금은 보이지 않는 여가수. 흘러나오는 노래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나는 초조해졌다. 내 나이 서른 둘. 스물 다섯, 생각지도 못한 이른 등단에, 첫술에 배가 터져버릴 정도로 대박이 나 버렸다. 떠오르는 문학계의 혜성이니, 20대를 대표하는 청년 작가니, 언론이고 출판사고 자기들 좋을 대로 떠들어댔다. 흘러나오는 이 노래가 이렇게 무거운 노래였나. 글을 쓸 때는 알코올을 금하지만, 오늘 만큼은 마시고 싶다. 대낮부터 술을 파는 곳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배가 출출하고, 날이 쌀쌀하니 국물이 먹고 싶어졌다. 순대국밥에 소주라도 한잔 마실까. 일 없는 한량처럼 보일까. 그보다도 소설이 전혀 풀리지 않는다. 빌어먹을 A의 능력을 지워버려야 할텐데. 뭘로 지워 버리지?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하릴없이 생각하다가 카페 메뉴판이 눈에 들어왔다. 라즈베리 모히또? 무슨 조합이려나. 허밍웨이가 모히또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편의점 계산대, 보헴시가 모히또의 카피문구 중 하나에서 읽은 적이 있다. 허밍웨이의 글빨이나 받았음 좋겠다. 지갑을 꺼내는 동안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자가 테이크아웃으로 커피를 주문하는 동안에 나는 그녀의 뒤에서 잠시 기다렸다. 건너편에 김밥집이 보여,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글씨를 바라 보았다. 신메뉴가 게시되어 있었는데, 차슈나 벤또 같은 것이었다. 저쯤 되면 김밥집인지, 세계음식 전문점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김밥집에서 맛있어봐야 얼마나 맛있겠다고. 김밥집을 비꼬아 대는 동안 주인이 내게 묻는다. 모히또를 달라 했더니, 라즈베리인지 오렌지인지를 묻는다. 맛을 묻는 순간부터 여자애들 입맛일거란 생각에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취소하기는 조금 민망하고. 원래 먹으려고 했던 라즈베리를 시켰다. 고개를 들어 메뉴를 다시 확인하니 오렌지 모히또가 정말 있다. 그러고 보니 카페가 한적하다. 카운터 옆에 작은 방이 있어 주인에게 물었다. “저기 흡연실이에요?” “아뇨, 소규모로 오는 분들이 공부하거나 놀다 가는 곳입니다. 근처에 여고가 있다보니 가끔가다 공부하러 와서 시끄럽게 떠드는 경우가 있거든요.” 주인이 계산을 치루며 넉살 좋게 수다를 떤다. “그럼 저쪽으로 유도하는 편입니다. 담배 피실려면 죄송하지만 나가서 피고 오시면 됩니다. 담배는 뭐 피세요?” “안 합니다.” 궁금함에 문을 열고 가니 화장실이 있어, 손을 씻고 나왔다. 다시 자리에 앉으니 내가 흘린 땀 때문에 조금 축축하다. 옆자리로 몸을 옮기고, 몇 분인가, 주인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깜빡 졸았나, 주인이 가져다 준 모히또를 보니 기가 막혔다. 모히또면 잎이라도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잘게 간 얼음에 보라색의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바에서 마셨던 모히또를 떠올리던 나는 크게 실망했다. 하긴 카페에서 그것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인가. 설탕물에 돈을 썼다고 생각하니 일순 짜증이 치밀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고 노트북을 정리하는 순간 화면에 낯선 글씨가 쓰여 있었다. Mnemosyne Latt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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