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8/15 03:10:46
Name   Moira
Subject   벌과 나날
오늘도 길 잃은 벌 한 마리가 방안을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날씬하고 길쭉한 게 말벌은 아니고 나나니벌 종류 같았어요. 저희 집은 산 바로 아래 낡은 단독이라 여름이면 벌레가 많은데 특히 위험종은 말벌이죠.

녀석은 한참 자유롭게 날아다니다가 이윽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머그컵 안으로 들어가서 탄산음료 찌꺼기를 먹으려고 하더군요. 책상에 앉아 있던 집친구에게 벌을 가리켜 보이며 신속한 처리를 부탁했더니 글쎄 컵을 들고 나가서 화장실 바닥에 놓여 있던 물 담긴 대야에 컵을 거꾸로 세우더군요. 그러고는 기발한 방식으로 벌을 물에 빠뜨려 죽였노라고 자랑질을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는 벌이 금방 죽지 않을 듯하며 컵도 더러워져 쓰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스럽게 의견을 표명했더니 집친구는 투덜거리면서 물째 벌을 변기에 던졌어요. 그리고는 변기물을 내렸는데 벌은 구멍으로 빨려들어가지 않았어요. 집친구는 한번 더 물을 내리면 사라질 거라고 장담하고 잠시 후 두어 번 더 물을 내려 보았지만 혼란한 소용돌이 속에서 벌은 여전히 물에 동동 떠 있었죠.

그렇게 벌은 한 시간 정도 변기물 속에 빠져 있었어요. 보아하니 아무래도 집친구는 벌의 시체를 변기 안에 보유한 채로도 우리 식구가 일상을 영위하는 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어요. 저는 그 판단에 또다시 제동을 걸었죠. 상당히 주술적인 제동이지만... '혹시 벌이 살아나서 엉덩이를 쏘면 어떻게 할 것이오?'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부인!' '만에 하나 저것이 죽지 않았는데 죽은 척하고 있을 수도 있소!'

집친구는 또 투덜거리면서 부시럭부시럭 뭔가를 했는데, 식사준비를 하느라 그 과정은 지켜보지 못했어요. 잠시 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보고하기를 '부인을 위해서 벌을 건져내어 버리고 왔습니다' 하더군요. 약간 과도하게 칭찬을 해주고는 어디다 버렸느냐고 물었더니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화장실 휴지통에 버렸죠.'라고 대답하더군요. 약간의 위화감이 머리를 스쳤지만 뭐 큰일은 없겠지 하는 생각에 그냥 넘어갔어요.

오후에 집친구가 외출을 한 사이에 화장실을 쓰다가 깜짝 놀랐어요. 휴지통 뚜껑을 열었더니 글쎄 나나니벌이 휴지통 안을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물을 많이 먹어서 비틀거리는 건지 공기가 부족해서 그러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건 살아 있었어요. 휴지를 두텁게 말아서 벌을 조심스럽게 집어 주먹밥처럼 뭉쳤어요. 그동안 녀석은 상당히 얌전하게 굴었어요. 두터운 휴지 아래로 녀석의 작은 몸뚱이가 살아 있는 게 미약하게 느껴졌죠.

지금도 녀석은 휴지통 안에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암모니아 속에서 벌은 고통스러울까요?  
집친구가 돌아오자 저는 벌이 살아 있다고 말해 주었어요. 응 진짜? 하고 잠깐 놀라더니 곧바로 패시브 상태로 들어가더군요. 화장실 휴지통 속에 산 벌을 포로로 데리고 있는 것 정도는 우리의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평온과 무위의 패시브.





3
  • ㅋㅋㅋㅋㅋㅋㅋ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48 정치버니 샌더스는 민주당의 후보가 될 수 있을까? 17 santacroce 15/11/13 7891 6
8939 의료/건강버닝썬 사건에서 언급된 물뽕, 그리고 마약 이야기 9 모모스 19/03/06 8818 11
12421 영화버드맨 이야기 5 매뉴물있뉴 22/01/09 3805 6
1867 영화버드맨과 보르헤스 11 뤼야 15/12/25 6849 2
1989 영화버드맨의 죽음 16 Moira 16/01/10 5666 4
8202 일상/생각버릇 - 예전 여자친구에게 지적 받던. 15 인간실격 18/09/11 4537 1
9848 기타버스 앞자리에 정액 뿌린 사건 다른기사 29 Cogito 19/10/17 6239 0
2396 도서/문학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10 리틀미 16/03/13 4808 0
983 일상/생각버킷 리스트는 최대한 어릴 때 작성하는 거랬습니다. 27 헤칼트 15/09/13 4393 0
9710 오프모임버티고개 Brera 9/29 일욜 점심 벙개(펑) 9 간로 19/09/26 3909 7
14983 일상/생각버티다 나가기.. 셀레네 24/10/16 746 6
104 기타번개 후기 6 Toby 15/05/31 10451 4
6318 오프모임번개. 퇴근 후 문래동. 아재아재. 20 한달살이 17/09/22 4756 5
8746 오프모임번개) 금요일 강남에서 고기 구워드실...? 43 Fate(Profit) 19/01/10 4809 10
6473 오프모임번개/신촌/10시반 찾아봐요! 33 나단 17/10/28 4471 4
404 기타번개모임 추가 공지입니다. 3 동동 15/06/22 6278 0
366 기타번개모임 한번 해볼까 합니다. 29 동동 15/06/19 7914 0
13707 꿀팁/강좌번역가가 ChatGPT를 활용하는 방법 15 은머리 23/04/03 2682 4
8913 도서/문학번역본에는 문체라는 개념을 쓰면 안되는가 13 알료사 19/03/01 5759 6
3515 일상/생각벌과 나날 10 Moira 16/08/15 4133 3
6773 일상/생각벌교댁과 말똥이. 7 tannenbaum 17/12/17 3355 3
785 기타벌써 일주일이 흘러, 장기 묘수풀이 (댓글에 해답있음) 24 위솝 15/08/12 4880 0
9618 오프모임벌써부터 흥벙 예감인 9/7(토) 5시 북촌 삼해소주벙 모집합니다. 57 naru 19/09/03 4841 5
1165 일상/생각벌은 무서워야 한다.. 8 눈부심 15/10/04 7560 0
109 기타범인은 잡았는데 정의는 과연 이루어졌는가? - 실종느와르 M 2 시아 15/05/31 9136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