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06/18 12:15:14
Name   Raute
Subject   마루야마 겐지가 쓴 소설의 문장들
신경숙의 표절 논란에 미시마 유키오만 있는 게 아니라 마루야마 겐지도 있더군요. 마루야마 겐지라면 저도 한 권 갖고 있어서 오랜만에 꺼내봐서 다시 읽었습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와는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더군요. 처음 읽었을 때는 시와 같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름에 빨려서 정신 못 차리고 탐닉했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호흡은 고를 수 있더라고요. 각설하고 인상적인 구절 몇 개만 적어볼까 합니다. 아래 문장들은 한성례가 번역하고 이룸에서 출판한 '달에 울다'에서 가져왔습니다.


[야에코 위로 폭염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그 위에는 타서 눌은 하늘이 있고, 조금 더 위에는 타다 문드러진 태양이 눌어붙어 있다. 이 산 저 산에서 요란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폭풍우 같은 매미 소리는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괴성을 지르던 야에코가 벌채된 나무처럼 무너지며 내 위를 덮쳤다.]


'달에 울다'의 히로인 야에코의 매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은 따로 있다고 봅니다만 그건 너무 에로틱해서 생략. 이것도 제법 야한 문장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래도 외설적이라는 느낌은 안 드니까요. 처음 읽을 때는 전원적인 배경을 두고 저렇게 난폭한 문장이 나올 수 있다는 게 꽤 충격이었죠. 덧붙여 그야말로 '치명적인' 유혹이구나 라는 생각도 같이요.


[병풍 속에서 거친 바람이 불어치고 있다.
그 바람은 때로는 아기 울음소리 같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는 병풍에 대고 물어본다. 그러나 야에코는 대답하지 않고, 굽이치는 초원을 가르면서 어둠의 소용돌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녀가 등에 지고 있는 것은 비파가 아니고 통통하게 살진 젖먹이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어쩌면 야에코 자신도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평범한 문장 가운데 애잔함이 묻어나오더군요. 야에코를 '나쁜년'이나 '이상한년'이 아니라 그 역시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글이라고나 할까요. 식견이 짧아서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저는 저 젖먹이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많은 이들 등에 업히던 젖먹이라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가마우지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달아나지 않았다. 손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서 뚫어지게 쳐다봐도 날개를 넓게 펼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낫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뱀을 연상시키는 가마우지의 기다란 목을 탁 내리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찾아봐도 내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꼼꼼히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이건 '조롱을 높이 매달고'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불쾌감, 분노, 공허함, 외로움, 두려움  등 굉장히 다양한 감정이 느껴지는 부분이라 좋더군요. 쉽게 공감이 가는 편이었고요. 피리새도 피리새지만 가마우지야말로 이 소설을 완성시키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겠죠. 


생각해보니 '물의 가족'을 읽는다 읽는다 해놓고 계속 까먹고 있네요. 조만간 서점 한 번 들려야겠어요.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590 게임마스터 오브 오리온 리부트 리뷰 2 저퀴 16/08/27 7493 0
    10769 꿀팁/강좌마스크, 손소독제 식약처 허가현황 검색방법 3 이그나티우스 20/07/12 4186 4
    10254 의료/건강마스크 착용에 관한 가이드 별빛사랑 20/02/02 4395 1
    10348 의료/건강마스크 수급 안정화 대책(1인 2매/일주일, 5부제 시행) 22 다군 20/03/05 5060 0
    10327 의료/건강마스크 사는곳 정보 공유 !! 3 Groot 20/02/27 8399 9
    2408 일상/생각마사루, 오랜만에 말이야... 10 커피최고 16/03/16 3537 2
    13261 게임마블스냅 리뷰 7 저퀴 22/10/23 2785 8
    8190 게임마블스 스파이더맨 리뷰 7 저퀴 18/09/09 4755 7
    12362 방송/연예마블 왓 이프...? 솔직한 후기 (스포) 7 Cascade 21/12/19 4512 2
    552 영화마블 영화 '앤트맨'의 국내 개봉이 9월로 연기됐습니다. 23 kpark 15/07/09 10555 0
    6207 문화/예술마법진 구루구루 리메이크 추억돋아서 한번봤는데 8 콩자반콩자반 17/08/31 6685 0
    14109 문화/예술마법을 쓰면 다 마법소녀? 국내 방영 마법소녀물 하편 15 서포트벡터 23/08/16 2899 10
    14095 문화/예술마법을 쓰면 다 마법소녀? 국내 방영 마법소녀물 상편 19 서포트벡터 23/08/07 2970 12
    14942 일상/생각마무리를 통해 남기는 내 삶의 흔적 kaestro 24/09/25 872 3
    11690 게임마메 9 헬리제의우울 21/05/19 4091 5
    9019 방송/연예마리텔2 1-1 8 헬리제의우울 19/04/01 4231 14
    1336 일상/생각마리텔, AMA 게시판, 소통 5 王天君 15/10/25 7968 4
    1666 방송/연예마리텔 출연자 평가질 19 헬리제의우울 15/11/30 8439 0
    13135 과학/기술마름모는 왜 마름모일까? 30 몸맘 22/09/05 4987 21
    352 기타마루야마 겐지가 쓴 소설의 문장들 16 Raute 15/06/18 9521 0
    11344 일상/생각마늘 4 私律 21/01/16 3864 3
    7147 문화/예술마그리트 '빛의 제국' 4 하얀 18/02/23 4854 11
    7470 철학/종교마구잡이로 쓰는 종교이야기 - 이단과 사이비 3 기쁨평안 18/05/02 5191 1
    10343 과학/기술마구잡이로 써보는 수비학(數秘學) 29 소원의항구 20/03/03 5597 7
    4102 정치마구 흘려쓰는 기득권의 세력구도(?) 4 기쁨평안 16/11/07 3517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