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9/01 14:43:10
Name   Raute
Subject   덴마크의 작은 거인
축구는 구기종목 치고 키가 작아도 큰 문제가 없는, 혹은 키가 작은 게 유리한 스포츠라는 말까지 있습니다만 그래도 체구가 너무 작으면 성공하기 힘듭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유망주라는 이승우에게 키 논란이 따라붙는 이유이죠. 그런데 운동선수가 아니라 일반인으로도 작은 키에 속하는 165cm로 세계적인 선수가 된 인물이 있으니, 덴마크의 작은 거인(el pequeño gran danés, 직역하면 작은 위대한 덴마크인) 알란 시몬센입니다.

덴마크 축구는 80년대 후반이 되어야 프로화가 이뤄졌고, 그때까지 재능 있는 덴마크 선수들은 이탈리아나 독일 같은 축구강국에서 프로로 뛰었습니다. 시몬센 역시 마찬가지여서 1972년에 만 19세로 고향 바일레를 떠나 서독의 묀헨글랏드바흐(이하 MG)로 이적합니다. 시몬센을 MG로 데려온 건 전설적인 명장 헤네스 바이스바일러인데, 당시 아마추어 선수들이 참가하던 올림픽(72년 올림픽 개최지가 서독 뮌헨)에서 눈여겨봤다는 설과 친선경기로 알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MG의 에이스이자 유럽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였던 귄터 네처는 시몬센의 체격으로는 분데스리가에서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평했고, 실제로 시몬센은 크게 고전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회를 별로 받지도 못했는데 MG는 바이언과 함께 70년대 분데스리가의 양대산맥이자 유럽에서 손꼽히던 강팀이었고, 축구변방에서 갓 넘어온 풋내기 아마추어에게 자리를 내줄 만큼 호락호락한 팀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렇게 시몬센은 2시즌 동안 벤치를 달궈야 했습니다.

독일축구가 추춘제라 2시즌이라고 표현하는 건데 햇수로는 꼬박 2년입니다. 20대 초반의 앞날 창창한 젊은이가 2년 동안 제대로 기회도 얻지 못하고 구경만 하는 건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겠죠. 그래서 중간에 이적을 고려하기도 했다는데 시몬센이 마음을 굳게 먹고 남았다는 얘기도 있고, 반대로 시몬센은 나가려고 하는 걸 바이스바일러 감독이 붙잡아서 남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중요한 건 시몬센이 인내 끝에 빛을 봤다는 거죠. 1974/75시즌, 그러니까 21세에서 22세로 넘어가는 시즌에 드디어 시몬센은 주전을 꿰차고 전성기를 맞습니다. MG는 하인케스-옌센-시몬센이라는 막강 스리톱을 앞세워 4시즌 만에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했고, UEFA컵에서는 네덜란드의 트벤테를 박살내고 2관왕에 오릅니다. 시몬센은 리그에서 18득점, UEFA컵에서는 10득점(2위)를 기록하며 첫 풀타임 시즌을 화려하게 소화했고, 유럽 최고의 선수를 뽑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표 1장을 획득합니다.


아랫줄 오른쪽에서 2번째가 시몬센, 그 뒤에 서있는 남자가 슈틸리케, 그 왼쪽으로 2번째인 센터가 하인케스

시즌이 끝나고 바이스바일러는 바르셀로나로 떠납니다만 신임 감독 우도 라텍의 지휘 아래 MG는 승승장구합니다. 시몬센의 주가도 계속 오르는데 1975/76시즌부터 공격진의 간판 하인케스가 부상으로 출장시간이 줄어들었고, 이 시즌이 끝나고 옌센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버립니다. 덕분에 시몬센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본인의 기량도 오르고 하면서 점점 명성이 높아진 거죠. 1977년은 시몬센 최고의 해라고 할 수 있는데, 1976/77시즌 후반기에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팀을 분데스리가 3연패와 유러피언컵 결승으로 이끕니다. 비록 결승에서 리버풀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무르긴 했지만 시몬센은 강한 인상을 남겼고, 77/78시즌 전반기에 리버풀의 에이스 키건이 새 소속팀 함부르크와 함께 부진하자 반사이익을 봐서 1977년 발롱도르 수상자가 됩니다. 다만 시몬센의 수상은 큰 논란을 불러왔으며, 키건의 수상 실패는 결국 이듬해까지 영향을 줍니다.


1977년 발롱도르 수상자가 시몬센임을 알리는 프랑스 풋볼 표지

1977/78 MG는 분데스리가 최초의 4연패에 도전하지만 분데스리가로 컴백한 바이스바일러가 지휘하는 쾰른에게 골득실 차이로 가로막혀 준우승에 그칩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도르트문트를 12:0으로 박살내는 괴력을 선보이긴 했습니다만 MG는 이때부터 쇠락의 길을 걷습니다. 하인케스와 비머 등 MG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노장들이 축구계를 떠났고, 팀의 재정 문제 때문에 매년 스타플레이어들이 이적하면서(76 옌센, 77 슈틸리케, 78 본호프) 전력이 계속 약화되었거든요. 1978/79시즌에 베스트11의 절반 가량이 물갈이된 MG는 결국 강등권까지 추락했고, 부상으로 이탈했던 주장 포크츠가 돌아와 최후의 불꽃을 보여준 덕에 간신히 중위권으로 시즌을 마감합니다. 그래도 UEFA컵에서는 한 번 더 결승에 올랐고, 시몬센이 넣은 페널티킥이 결승골이 되면서 우승을 거머쥡니다. 이 UEFA컵 우승을 뒤로 하고 시몬센은 새 팀으로 떠납니다.

새 행선지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였는데 분데스리가의 새로운 챔피언 함부르크와 이탈리아의 패자 유벤투스도 시몬센을 노렸다고 합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바르사 대신 저 두 팀으로 갔으면 우승을 더 많이 했을 겁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바르셀로나는 라리가 우승을 위해 애쓰는 상위권팀 중 하나였고, 1979년에 위너스컵에서 우승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저 두팀만큼 강력하진 않았거든요. 여하튼 시몬센은 바르셀로나로 건너가 라리가의 폭격기 키니와 호흡을 맞춥니다. 이 시기 바르사는 우승 못하는 저주가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는데 80/81시즌에는 우승 경쟁 하던 도중에 키니가 한 달 동안 납치당하면서 선수단이 패닉에 빠졌고, 결국 2위에서 5위로 추락합니다. 81/82시즌에는 5경기 남겨놓고 2승 1무만 하면 우승이었는데 그걸 못 지켜서 역전당했고요. 결국 시몬센은 라리가에선 우승하지 못합니다만 대신 위너스컵에서 우승했고, UEFA가 주관하는 3개의 메이저대회 결승에서 모두 골을 넣은 선수가 됩니다. 바르셀로나에서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위의 별명을 얻기도 합니다만 1982년 여름에 바르셀로나가 아르헨티나의 괴물 디에고 마라도나를 영입하면서 용병 제한 때문에 팀을 떠납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외국인 제한이 매우 빡빡해서 슈스터, 마라도나, 시몬센 이 세 명이 두 자리를 놓고 싸워야 했거든요.


마라도나-시몬센-슈스터

레알 마드리드와 토트넘이 시몬센을 영입하려 했습니다만 시몬센이 택한 팀은 뜬금없게도 잉글랜드 2부리그인 찰턴이었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데다 치열한 경쟁보다는 편안한 말년을 보내고 싶었던 건데 정작 찰턴에서는 시몬센의 급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해 반 년만에 고향팀 바일레로 돌아갑니다. 당연하지만 아마추어리그였던 덴마크에서 시몬센은 압도적인 존재였고, 말년을 즐기다가 은퇴합니다. 한편 덴마크는 80년대 초중반에 황금세대를 맞이하는데, 흔히 '대니쉬 다이너마이트'라고 부릅니다. 시몬센 외에도 모르텐 올센, 예스퍼 올센, 프레벤 엘케어, 레어비, 아르네센, 미카엘 라우드룹 등 재능 있는 선수들이 대거 출현했고, 유로1984에서 4강 돌풍을 일으킵니다. 시몬센은 유로 예선에서 크게 활약했고, 특히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결과적으로 잉글랜드를 탈락으로 이끈 웸블리에서의 경기가 유명합니다. 덕분에 아마추어리그에서 뛰는 데도 불구하고 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줘서 1983년에 발롱도르 3위에 오르기도 했죠. 하지만 유로1984는 후배들이 활약하는 걸 구경만 해야 했는데, 개막전에서 다리가 부러졌거든요. 결국 유로는 이걸로 마감했고, 2년 뒤에 있었던 월드컵도 교체 출장 1경기에 그쳤고요. 조금만 늦게 태어났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아르네센-레어비-시몬센-엘케어

북유럽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거머쥐긴 했지만 최상위 레벨에서 활약한 기간이 좀 짧기도 하고 국가대표 경력도 아쉬워서 후배들에게 평가가 밀리긴 합니다. 스칸디나비아 쪽에서 뽑는 거 보면 대체로 미카엘 라우드룹이 1위, 그 다음이 슈마이켈이고 시몬센은 3-5위 사이에 오더라고요. 그래도 시몬센 위에 있는 저 두 명도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는 걸물들이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축구사에 자기 이름을 새겨넣은 정도는 됩니다. 무엇보다 팀 선배 네처가 평한 것처럼 너무 작은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 경지에 오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죠.


우승 경력
분데스리가 : 1974/75, 1975/76, 1976/77
위너스컵 : 1981/82
UEFA컵 : 1974/75, 1978/79
DFB-포칼 : 1972/73
코파 델 레이 : 1980/81
덴마크리그 : 1971, 1972, 1984
덴마크컵 : 1972

개인 수상
발롱도르 : 1977(1위), 1983(3위)
유러피언컵 득점왕 : 1977/78
UEFA컵 득점왕 : 1978/79
덴마크 축구 명예의 전당
옹즈 유럽 베스트11 : 1977
키커 분데스리가 베스트11 : 1974/75, 1975/76, 1976/77,



4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축구 글은 언제나 추천입니다.
  • 축구글은 일단 추천드립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805 요리/음식덴뿌라와 튀김의 기원 27 마르코폴로 16/05/14 15077 10
6826 일상/생각덴마크의 크리스마스 8 감나무 17/12/25 3825 15
3626 스포츠덴마크의 작은 거인 5 Raute 16/09/01 5598 4
4239 게임데차 다들 현타오셨나요? 13 헬리제의우울 16/11/27 5407 0
6072 일상/생각데자와가 쏘아올린 작은 글 11 제피 17/08/08 3535 10
3378 정치데자뷰.. 한국군 위안부 27 눈부심 16/07/28 4887 0
14251 일상/생각데이터가 넘치는 세계(로 부터의 잠시 도피?) 1 냥냥이 23/11/04 1632 3
4105 게임데스티니차일드 8일차 13 헬리제의우울 16/11/07 4151 0
4029 게임데스티니 차일드에 대한 짧은 소감 10 Leeka 16/10/29 6684 0
4125 게임데스티니 차일드!!! 15 Liquid 16/11/10 4775 0
4080 게임데스티니 차일드 1주일 후기 3 Leeka 16/11/04 4733 0
8401 게임데스티니 가디언즈 -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목소리 1 키스도사 18/10/21 7131 0
2451 IT/컴퓨터데스크톱에서 여자친구 사진을 개선하는 신경망 5 April_fool 16/03/22 6690 1
12098 게임데스루프 리뷰 2 저퀴 21/09/19 3678 2
9977 게임데스 스트랜딩 리뷰 8 저퀴 19/11/11 5180 8
6662 기타데스 스타 만들어 주세요! 6 키스도사 17/11/27 4666 3
6107 영화덩케르크(Dunkirk)를 보고 (스포O) 6 집정관 17/08/14 5025 3
11923 철학/종교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좋은 일 하며 살겠습니다. 7 right 21/07/26 4219 6
7422 일상/생각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26 탐닉 18/04/22 5092 24
12025 게임던지면 어떠냐 19 호타루 21/08/28 3872 9
10383 영화던 월(Dawn Wall) - 결정적 순간의 선택 (스포가득) 하얀 20/03/15 6463 6
10829 과학/기술더하기와 플러스 26 아침커피 20/07/30 5010 8
769 요리/음식더운 여름에 마셔볼만한 값싸고 시원한 화이트와인 11 마르코폴로 15/08/11 9340 0
3045 기타더운 여름날 더치커피를 즐기기 8 커피최고 16/06/16 3382 1
2844 영화더스틴 호프먼 할배 이야기 21 구밀복검 16/05/20 7467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