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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9/30 14:09:53
Name   OshiN
Subject   롤드컵을 맞이하여, 팬심에 대해서 주절주절
삐딱이 기질이 있어서인지 예전부터 현시대의 강자보다는 잠재력있는 선수들을 좋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스타크래프트에서 정명훈과 허영무를 좋아했습니다. 김민철과 이신형, 김성현도 아꼈지만 스타리그가 끝나버린 지금 와서야 무의미한 얘기이겠지요. 


일단 정명훈. 리그흥행 테러리스트라는 다소 불명예스런 별명이 붙음과 함께 굉장히 화제가 되었던 송병구의 스타리그 우승의 산 제물이 된 나머지 신인 정명훈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바막(바이오닉 막장)이니 최연성의 마리오네트(꼭두각시)니 각종 별명을 들먹이며 그를 폄하하는 세간의 평가들을 오로지 실력과 노력으로 극복했습니다. 비록 커리어면에서 넘어서지 못했지만 스타판 최강자이자 넘버원 테란 이영호를 계속 위협하더니 끝끝내 쓰러뜨리는 기염을 토하며 많은 팬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겨주었지요.


그리고 허영무. 연인이 아닌 이상 타인에게 그만큼 애정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롱기누스에서 하드코어 질럿러쉬로 조용호를 쓰러뜨리며 데뷔한 허영무를 은퇴할 때까지 쭈욱 응원하면서 팬심의 쓴맛 단맛을 다 본 것 같아요. 가장 안타까웠던 건 MSL 결승전에서 박찬수에게 무릎꿇었을 때. 가장 행복했던 건 08-09 프로리그 플레이오프 최종에이스결정전에서 콜로세움을 무대로 마치 데뷔전처럼 공발업 질럿러쉬로 김윤환을 끝장냈을 때. 우승이야 물론 감격스러웠지만 공부 열심히 한 딸이 명문대에 합격한 기쁨이라면 전자는 초등학교 1학년 딸이 '부모님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사랑해요'라고 쓰여진, 난생 처음으로 손으로 쓴 편지를 건내며 품에 포옥 안기는 느낌? 형편없는 경기력과 종잇장 멘탈에 화가 날 때도 많았지만 체념하지 않고 끈덕지게 응원한 보람을 톡톡히 느꼈더랬지요.


롤도 마찬가지입니다. 12년도 말, 아주부 형제팀과 나진 소드가 국내 롤 프로씬을 짱먹는 상황에서 샛별처럼 떠오른 SKT T1는 정말 매력적인 팀이었습니다. 신입답지 않게 처음부터 뛰어난 역량을 뽐내는 페이커를 필두로 다소 미숙하지만 자기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갖춘 나머지 팀원들이 합을 맞춰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 즐거웠지요. CJ 프로스트의 팬이었던 저는 이즘의 클라우드템플러의 은퇴 이후 이 팀에서 마음이 떠나 SKT를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포츠의 영원한 제국국 SKT T1의 힘일까요? 데뷔시즌부터 대회 3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더니 급기야 다음 시즌엔 MVP 오존과 KT B라는 초강력팀들을 연달아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롤드컵과 롤챔스 윈터시즌까지 압도적인 기량으로 정복하고야 맙니다. 앞서 언급한 정명훈과 허영무가 꽃을 피우기까지 선수본인이나 팬이나 굉장한 인고의 시간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날 때부터 호랑이였던 것처럼 펄펄 날아다니니 참 신기하더군요. 쎈 놈을 좋아하면 이렇게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다는 걸 이때 처음 느꼈습니다.


그러나 좋았던 시절도 가고, 14년도는 SKT에게 아주 가혹한 시간이었습니다. 스프링시즌에 전력상 압도적 열세였던 KT A에게 일격을 맞기 시작하더니 삼성 화이트와 블루에게 몇차례나 탈탈탈탈 털리며 작년의 무적포스를 내뿜은 그 팀이 더 이상 아님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윈터시즌을 전승우승했음에도 롤드컵 선발전에서 나진 실드에게도 태클을 맞아 롤드컵 진출이 좌절되는, 굉장히 굴욕적인 일들을 연속적으로 맞이했습니다. 선수단, 팬덤 모두에게 시련이었습니다. 탄탄탐의 극에 올랐다가 기복의 극으로 수직낙하한 임팩트. 무장점 정글러의 대명사가 돼버린 벵기. 승부욕과 실력을 겸비해서 보는 맛이 있어지만 어느새 악밖에 남지 않은 피글렛. 되돌아왔으나 실력은 복귀하지 못한 푸만두.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팀컬러의 형제팀. 그리고 팀의 희망이자 최후의 보루인 페이커마저 라이벌 미드라이너들에게 무릎꿇으며 팬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었지요.


사실 프로스포츠에서 전력의 부침은 인지상정입니다. 잘할 때가 있으면 못할 때도 있는 거죠. 그러나 이때 소위 팬들이라 불리는 자들의 행태는 상당히 볼만했습니다. 형제팀과의 경기에서 불거진 말도 안 되는 승부조작의혹, 푸만두를 대신해 주전서포터가 된 레이스선수에게 쏟아지는 근거없는 비난, 페이커를 훼손시킨 폰선수를 향한 저주와 무시, 솔랭에서 폭언을 일삼는 피글렛을 두둔하는 둥. 특히 조작과 레이스선수 건에 대해서, 레이스선수가 실력과 멘탈이 구려서 스스로 못 버티고 나간거지 우리가 언제 괴롭히고 몰아붙였냐고 반문하시던 SKT 팬분들이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과중한 부담감을 버텨내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근거없는 추측과 악의적인 인격모독은 용서될 리 없죠. 하마터면 한 선수의 생명을 작살낼 뻔 했습니다. 혹자는 이스포츠 최악의 팬문화라고 꼽기도 하는 사건입니다. 모든 일의 원인은 예년같은 우릴 실망시킬 리 없는, 강력한 SKT의 모습을 기대하는 팬덤의 인지부조화가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한 사람의 팬이지만 사람들이 참 왜 이럴까 이해가 안 가고 부끄러웠습니다.


시간이 흘러 형제팀이 통합되어 로스터에 변화를 주고 전력을 끌어올린 결과 롤 역사상 유례없이 막강한 팀이 탄생하여 롤챔스, 롤드컵을 싸그리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작년에 한국롤판을 지배했던 선수들의 해외진출과 더불어 EDG의 MSI 우승, 정확히 말하면 SKT의 패배로 인하여 LCK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해외리그를 추켜세우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타팀팬이어도 더욱 통쾌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따라서 SKT는 찬양받아 마땅한 팀이 되었죠. 그야말로 몰락한 명가의 재건, 왕의 귀환. 팬들은 당연히 크게 기뻐했습니다. 저 또한 부진의 늪을 하늘이 내려준 재능과 피나는 노력으로 빠져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마치 정명훈, 허영무의 신화를 다시 한 번 목격한 것 같아서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분명 SKT의 부활은 대단하고 즐거운 일이나 스타크래프트 때만큼의 기쁨과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비단 SKT가 정명훈 허영무보다는 이영호에 비교하는 게 더 적절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보다 일찍이 SKT를 응원하고 언젠가 제 폼을 반드시 되찾으리란 믿음을 가졌던 제가 왜 그럴까요.

올해 MSI에서 그런 느낌은 더더욱 강해졌습니다. 조별예선에서 부진했지만 강력한 상대들을 극복하고 끝끝내 우승을 차지했으나 팀과 초반패배의 큰 원인이었던 정글러 블랭크에게 비난이 쏟아졌죠. 메타에 적응하지 못한 벵기의 빈자리를 잘 메꿔 LCK 스프링 우승에 기여한 정글러에서 순식간에 팀원빨로 업혀가는 민폐정글러로 변한 순간이었습니다. 섬머시즌엔 더욱이 심했지요. 이해할 수 없는 플레이를 연발하며 중하위권 팀들에게 몇 번 덜미를 접히고나선 팬들에게 퇴출대상 1순위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분명 못하는 게 맞고 프로가 못하면 비판받는 것도 당연하지만 팀성적이 그렇게 떨어진 것도 아니고 팀케미를 망치는 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 다소 가혹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압권은 SKT의 가장 충실한 팬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나름 진지하다는 사이트 게시판에 블랭크의 플레이를 조롱하고 성토하는 글을 올려서 하루빨리 퇴출시키거나 새로운 정글러를 영입해야 한다고 했을 때였죠. 블랭크가 제 폼을 회복하길 바란다는 메시지도 개미 눈꼽만큼 있었습니다만 쟤 왤케 못하냐, 너같은 건 막강 SKT 전설에 방해만 될 뿐이니 보기 싫고 좀 꺼졌으면 좋겠다는 둥의 징징거림이 대부분이었죠. 소위 팬들은 거기에 다수 동감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선수들을 믿고 기다려야 할 팬들이 왜?


뿐만 아니라 이들은 SKT의 위광을 가리는 자들을 용서치 않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습성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15 SKT는 역대최강의 팀인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나 14 삼성화이트를 조금이라도 찬양하거나 SKT와 관련지으려 하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만약 삼성왕조가 붕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SKT의 좋은 라이벌이 됐을지도', '14년 롤드컵에서 보여준 삼성화이트의 포스와 경기력은 정말 경이로웠다' 등의 사소한 의견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 눈엔 모든 게 SKT에 대한 모독이자 말도 안 되는 흠집내기로 보일 뿐이죠. 레전드가 된 자기팀에 대한 타팀, 그것도 자기 팀에게 큰 상처를 안긴 팀의 접근 자체를 밀어내고 신경질내는 고약한 심보로밖에 평할 길이 없습니다. 작년에 LCK 팬분들이 당한 수모와 맘고생을 조금은 이해하나 14 SKK가 당시 삼성에게 털린 게 어지간히도 민감한 역린이란 생각이 듭니다. 분명 15 SKT는 더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대단한 팀이지만 왕조시절 피휘하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민감하고 배려심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만화제목을 빌어 이 상황을 표현하자면... 내 눈은 피해자의 눈, 내 손은 가해자의 손.


제가 보기엔 팀에 대한 비뚤어지 애정 또는 강함 그 자체에 경도된 팬문화 정도로밖에 안 보이더군요. 우리팀이 잘했으면 좋겠다를 넘어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강해야 한다, 남들을 압도해야 한다는 강박감. 그게 또 다수의 생각이다보니 그들과 함께 응원한 사이 저는 어느새 지쳐버린 모양입니다. 이번 롤드컵에서 해외팀에게 2패라도 한다면 난리가 나겠구나 싶더군요. 이렇게 조금의 실수도 기복도 용납하지 못하고 선수들을 몰아붙이며 타팀 혹은 타의견에 대한 배려가 없는 분위기가 싫습니다.  뭐 제가 영향력있는 사람도 아니고 저같은 게 없어도 알아서 잘할 팀이겠지만 이제는 마음에서 SKT를 놓아줄 떄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팬들 분위기, 그딴 거 신경끄고 너 좋은대로 응원하면 되는 거 아니야? 라고 스스로 반문하기도 하지만 이 판 규모와 특성상 완전히 떼놓고 볼 수가 없걸랑요. 여전히 선수들은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예전만큼 가슴속에 뜨거운 사랑을 품고 다니진 않겠죠.


어느새 롤드컵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훌륭하게 꾸며진 경기장의 무대와 객석, 진짜 프로스포츠같은 긴장감있는 중계를 보면 임요환이 장을 연 프로게이머란 세계가 어느덧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괜시리 뿌듯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눈부신 조명과 환호 속에 다시 태어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여전히 막 벅차오르고 다들 노력의 결실을 맺었음 좋겠고요. 특히 15시즌 꼴찌할 때부터 가능성을 눈여겨봐왔는데 드디어 팀재건과 동시에 롤드컵 진출이라는 엄청나게 기특한 일을 해낸, 내가 응원하는 삼성 갤럭시 파이팅! 어느 팀이든 부디 팬이란 가면을 뒤집어쓰고 별 이유없이 선수들에게 과한 비난과 개인적인 감정을 쏟아붓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상 목적없고 기승전결없는 공허한 주절거림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는 우리 울보 크라운. 다시 한 번 기뻐서 우는 모습 보여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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