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06/21 04:08:25
Name   혜리
Subject   군대 웅변대회 이야기

저는 해군이었습니다.
6주간의 혹독한 훈련과 천국 같은 4주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지옥선을 타게 되었죠.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약 250에서 300명 가량의 승조원이 있는 구축함이었습니다.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들고 있다가 선임이 부르면 ‘악!’소리와 함께 뛰어가야 했습니다. 선임은 양동이에 스나프(대걸레)를 쑤셔 넣고, 휘휘 돌려 들어 올렸고 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물기를 제거했습니다. 양손을 이용해 한 번, 검지 중지를 이용해 여러 번.
바로 위 고참이 다시 한 번 스나프를 짰고, 거기서 물이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는 경우엔 가차 없는 응징이 이루어졌습니다.
아귀힘이 약했던 저는 손바닥이 몇 번이나 벗겨진 후에야 이 기술을 마스터 할 수 있었습니다.
큰 배는 한 달에 한 번씩 후임이 들어오고 그래서 빨리 선임이 될 수 있다고 들었지만, 겨울 기수였던 탓인지 두 달이 지나도 후임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저는 양동이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어가며 멀리 월미도 공원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불빛이 어찌나 찬란하던지요.
멍하니 바라보던 제 마음 속에 하나의 문장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내려야 한다.

때마침 함내 웅변대회가 열린다는 공지가 돌았습니다. 3등까지는 외박 및 외출 포상이 있다고 하더군요. 어차피 막내인 제가 나가야 할 터였습니다. 하지만 하필, 왜, 웅변이란 말입니까.
사람들 앞에 서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던 저에겐 정말 최악의 선택지였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독후감으로 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앞에 나와 그 독후감을 읽어보라고 했지만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뺨을 두드려 맞고 교실 밖으로 쫓겨났었죠. 그 정도로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던 저에게 웅변이라니요.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짬을 내 원고를 쓰고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크게 소리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작은 목소리로, 머릿속으로는 피를 토하는 열변으로 심상화하며 결전의 그날을 대비했습니다.
모두 아실겁니다. 지금도 웅변대회를 하는진 모르겠지만 당시의 웅변이란 건, ~ 라고 이 연사 강력히!(왼손 주먹) 강력히!(오른손 주먹) 주장합니다! (양손 들고). 이런 식이었습니다.
아... 내가 이런 걸...

대회 당일. 병사들이 하나 둘 함내 식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인원수가 가장 많았던 갑판부의 막내였던 제가 1번으로 발표를 하게 됐죠. 심호흡을 하며 병사들 앞에 섰습니다. 승조원 중 가장 깨끗한 셈브레이 당가리를 빼입은 자판병이 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더군요. (자판병 - 함내 하나 뿐인 커피 자판기를 담당하는 수병. 커피와 물 채워 넣기, 동전 바꿔주기가 전부인 그야말로 땡보직. 하지만 함내에서 가장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 어차피 이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거다. 군대 일이 다 그렇지 뭐.

저는 머릿속으로 원고를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순간 저도 놀랄 만큼의 사자후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뭐랄까요. 순수한 반공 청년 그 자체였습니다. 오직 괴뢰군을 박살내고 조국통일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참된 군인의 화신 말입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동작을 취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끝마쳤을 때 병사들의 눈빛만은 기억나네요. 제 성격을 알고 있던 그들의 놀란 두 눈. 찬탄과 함께 벌어진 입. 그리고 쏟아지는 박수.

필승!
경례를 붙이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후에야 모든 걸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함께 제 자신을 넘었다는 뜨거운 성취감이 몰려왔습니다. 이대로라면 최소한 3등 안에는 들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자판병이 커피 한 잔을 뽑아주며 엄지를 치켜세우더군요.

하지만 다음 참가자의 웅변이 시작되면서 저의 모든 성취감과 확신은 서서히 사라져갔습니다.
그는 마치 박진영 심사위원의 충고를 들은 것처럼 말하듯이 발표를 하는 거였습니다...
다음 참가자도, 그 다음 참가자도, 마지막 참가자까지.

저건 웅변이 아니야...
저건 웅변이 아니야...

그렇게 대회는 끝났고, 저는 4등을 했습니다.





0
    이 게시판에 등록된 혜리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92 기타군대 웅변대회 이야기 13 혜리 15/06/21 7133 0
    391 기타한국 정부덕에 애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6 Leeka 15/06/21 8703 0
    389 기타최근 재밌었던 일-TV조선의 한 기사 9 드레이크 15/06/21 7725 0
    388 기타[서평] 과연 이십대가 문제일까 3 일각여삼추 15/06/21 7265 0
    387 기타축구계와 약물 17 Raute 15/06/21 12477 0
    386 기타[지니어스]콩픈패스 16 의리있는배신자 15/06/20 11848 0
    385 기타제가 좋아하는 목소리 - 어쿠스틱콜라보 안다은 양이에요. 7 의리있는배신자 15/06/20 7498 0
    383 기타(잡문) 문학에서의 '부사' 사용 63 Eneloop 15/06/20 9247 0
    382 기타[소설] My funny teens 3 Last of Us 15/06/20 6032 0
    381 기타[스압,데이터 주의]텍스트 정리 #2 13 ohmylove 15/06/20 8595 0
    380 기타[스압,데이터 주의]텍스트 정리 #1 ohmylove 15/06/20 8145 0
    379 기타[스압,데이터 주의]텍스트 읽기 #2 ohmylove 15/06/20 7735 0
    378 기타[스압,데이터 주의]텍스트 읽기 #1 ohmylove 15/06/20 9563 0
    377 기타쥬라기 월드흥행에 적어보는 공룡이야기(3)-모든걸 새로쓰게한 공룡 9 개평3냥 15/06/20 9747 0
    376 기타비가 오네요! 잠시 음악 듣고 가실까요? 11 Forwardstars 15/06/20 7286 0
    375 기타울어라! 늑대여! 11 neandertal 15/06/20 8528 0
    374 기타타(?) 커뮤니티에 관해서.... 17 이사무 15/06/20 8088 0
    373 기타이럴거면 그러지 말지. 10 영혼 15/06/20 8756 0
    372 기타북미에서 애플워치가 279만대 팔렸습니다 14 Leeka 15/06/20 8534 0
    371 기타PGR21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115 삼공파일 15/06/20 21049 0
    369 기타(사진 다수 포함) 수원화성 돌아보기 27 NightBAya 15/06/20 9970 0
    368 기타이것이 애플의 매력인가.. 32 마카 15/06/19 9961 0
    366 기타번개모임 한번 해볼까 합니다. 29 동동 15/06/19 7904 0
    365 기타낼 아침 후회할 것 같은 글 17 15/06/19 8617 1
    364 기타저에게 주는 숙제 20 지니 15/06/19 7235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