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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6/23 19:51:18 |
Name | 와라버님 |
Subject | 조모상 이야기. |
10여 년 전 아직 고등학생이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너 같은 놈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아가는 일은 절대 없을거라 말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던 아버지의 눈을 보며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는 이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였고 둘째는 모시지 않아도 되니 편하겠다였다. 아버지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사교모임을 좋아하지도 않고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교우관계도 좁았으며 사소한 여자 문제 하나 없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외벌이로 가족의 생계를 지탱했고 돈 관리는 어머니에게 맡기고 거의 손대지 않았다. 다만 예민하고 깔끔하며 불같은 성격은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어머니와 잘 맞지 않았고 그 싸움의 불똥은 어머니의 외모와 성격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나에게 튀곤 했다.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의 어머니는 점점 침울해져 갔으며 결국 우울증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분은 별거를 선언하고 따로 살게 되었다. 어머니가 별거를 선언하고 나간 후 나는 막 군대에서 제대했었고 쓸데없는 의욕에 불타서 가족을 다시 화목하게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기에 나는 아버지를 찾아가서 어머니와 다시 한 번 잘 해보자고 당신께서도 조금은 양보를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욕만 실컷 듣고 왔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본 기억이었다. 집안에 신물이 난 나는 따로 나와 살게 되었고 아버지는 몰론 어머니와도 자주 연락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독립해서 생활한지 몇 년이 흘렀을 무렵 어머니에게서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급하게 전화를 한 나에게 어머니는 어머니 본인은 실질적으로 이혼한 거나 다름없지만 나에게는 혈육이니까 찾아가 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였다. 나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마침 그날은 15년 지기 친구들과 술을 한잔 마시기로 한 날이었고 나는 그 술자리로 향했다. 웃으며 술을 마시다가 조금 거나해졌던 무렵 나는 친구들에게 할머니가 위독하시고 친가 식구들과 관계가 좋지 않아서 가지 않을거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자리에 나온 둘 중 한명은 그래도 가봐야 되지 않겠냐고 하였고 다른 한명은 가정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 내 마음이 가는데로 하라고 하였다. 그날 나는 주량에 맞지않게 소주 대여섯 병을 마시고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기어들어가서 몇 번의 구토를 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날 한낮이 되어 겨우 일어난 나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문자가 와있었다. 나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서 물을 한잔 마시고 담배를 한 개피 피웠다. 한 개피를 다 피운 무렵 무언가 씁쓸한 생각이 들어서 연거푸 한 개피를 더 피웠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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