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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1/06 11:50:01
Name   매일이수수께끼상자
Subject   냉장고에 지도 그린 날
아내가 지도를 그렸다. 이부자리에 실례를 했다는 게 아니다. 냉동고와 냉장고를 정리하고, 내용물의 배치도를 A4에 그려 냉장고 문에 붙였다는 것이다. 이른 바 냉장고 파먹기 프로젝트. 지도를 그리기 위해 먼 옛날 누군가 발품을 팔았듯, 아내는 큰 마음먹고 냉장고의 가장 아래 칸부터 맨 위까지 몇 번을 오르내렸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지금 내 기억 속에서 아내는 그 지도를 보여주며 등정이라도 마친 듯 이마를 슬쩍 훔친 듯도 하다.

분명 물리적인 공간들을 칸칸이 오르내렸는데 아내는 시간 여행을 마치고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맨 아래 칸에서 화석처럼 변한 삼겹살 두 줄이 나왔는데, 그건 신혼 초 – 그러니까, 적어도 3년 전 - 한창 삼겹살에 꽂혔을 때 아내랑 둘이 온 집안이 미세 기름방울로 자욱하도록 고기를 굽고 굽고 굽다가 지겨워져서 일단 다음에 먹자고 남겨 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우린 정말 삼겹살을 많이도 먹었다. 처음 아내가 자기 동네까지 바래다주도록 허락해준 날도 우린 삼겹살집에서 밥을 먹었고, 장모님께 아내를 달라고 하던 그 식당에서도 삼겹살이 구워지고 있었다. 장모님은 그날 몇 조각 드시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가 앓아 누우셨다.

그런 장모님이 결혼 후 가장 중요한 삼겹살 공급원이 되셨다. 딸에게 바리바리 싸주시는 음식들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될 만큼 꼭 얼린 삼겹살이 들어있었다. 그것도 구울 때 떼기 좋으라고 한 겹 한 겹 비닐 포장을 해서였다. 장모님이 주신 삼겹살만큼은 날 거절하셨을 때의 마음처럼 해동시킬 필요가 없었다.

달 그림자처럼 얼어붙은 호떡 한 팩도 나왔다. 언제 우리 냉동고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출처는 장모님일 수밖에 없었다. 대형 마트 식품 코너에서 호떡을 구우시는 장모님은, 가끔 남는 것들을 싸가지고 집으로 오셨다. 고 달콤하고 기름진 맛을 본 우리 아이들이 할머니에게 참새처럼 입 벌리고 달려드는 걸 큰 낙으로 여기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 식습관들이기에 사활을 걸고 있는 아내에게 이는 별로 달갑지 않은 행사였다.

기어이는 단 거 주지 말라는 아내와, 뭐 어떠냐 어쩌다 한 번인데, 라고 하는 장모님은 크게 부딪혔고 장모님은 한 동안 집에 오질 않으셨다. 아내도 마음이 편했을 리 없지만, 냉동고의 호떡이 아내 손에서 자발적으로 덥혀지는 일은 없었다. 물론 결혼 후 20kg째 찌고 있는 나도 호떡 접근 금지였다. 지도가 그려진 날, 우리 집에서는 더 이상 있을 곳 한 뼘 없는 호떡이 싱크대에 올라와 있는데도 아이들이 달라고 보채지 않는 것을 보니, 이제 호떡은 하루를 마친 장모님의 옷 속 기름 냄새로만 남아있는 게 다일 모양이다. 부모의 흔적이란 게 다 그렇지만.

냉장고 한쪽 구석엔 ‘아빠님표 마늘장아찌’라는 라벨지가 붙어 있는 김치통이 나왔다. 영어가 미래 자산이라며 식구들 무리해서 외국으로 보내놓고 근 십년 한국서 혼자 지냈지만 요리를 도저히 익히지 못했던 아빠가 직접 담근 빨간 마늘장아찌가 반쯤 들어 있었다. 얼마나 요리를 못했으면 10년 동안 오로지 김치찌개 하나로 끼니를 해결하고, 제대한 아들에게 특별 메뉴라며 식빵에 계란 프라이와 치즈 한 장과 단맛 나는 이상한 잼과 땅콩 잼을 다 넣은 이상한 음식을 자랑스럽게 내민 아빠였다.

아내는 결혼하기 전부터 아빠를 아버님이 아니라 아빠님이라고 불렀다. 전화번호도 그렇게 저장되어 있다. 혼자 산 세월이 너무 길었던지 끝내 가족과 합치지 못하고 홀아비가 된 아빠에게 ‘님’까지 붙여가며 가장 통화를 많이 하는 것도 아내였다. 어느 날은 한창 취재 중인데 아빠한테 전화가 왔었다. “왜?”라고 받자 “어?”라고 하던 아빠는, “야야 끊어라 며느리한테 한다는 걸 너한테 잘못 걸었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 마늘장아찌는 싱크대에 나와 음식 쓰레기 봉투를 기다리는 신세가 아니라 여전히 냉장고 안에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심지어 지도에도 등재되어 있었다.

“이거 도대체 언제 적 건데.. 버려 그냥.” 김치통을 꺼내 라벨지를 떼고 싱크대에 올려놓자 아내가 다시 원상 복귀시킨다. 상하지도 않았고, 가끔 느끼한 거 먹을 때 하나씩 먹으면 맛있단다. 아니, 당신은 느끼할 때 스파클링 먹잖아. 아무도 못 먹게 하고 당신 혼자, 라고 해봤자 뚱뚱한 내 옆구리만 꽉 잡힐 뿐이었다. 시아버지의 김치통에 며느리의 이름표가 잘 어울리는 듯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한기 어린 시간을 뚫고 드디어 아내에게 포착된 음식의 주검들이 싱크대에 쌓여 있었다. 음식 쓰레기는 내가 담당이다. 난 노란색 봉투를 가져와 하나하나 담았다. 아내의 라벨지는 꼼꼼히 떼서 재활용 봉투에 담았다. 뒷일을 나에게 맡기고 아이들과 놀고 있던 아내는 뭔가가 이상했다. 라벨지까지 붙여 놓을 정도로 냉장고 정리를 자주 하는데, 그 많은 음식들이 도대체 왜 매번 나오냐는 것이다. 뭐, 장모님이 그만큼 채워주셔서 그렇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아빠님도 한 번 오실 때마다 뭘 그렇게 왕창 사오셔서, 라고 아내도 대답했다.

아이들의 장난감 방은 부엌 뒤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세 사람이 놀고 있는 곳도 거기였다. 노란 봉지에 음식을 담고 있던 나는, 겹겹이 비닐로 포장된 삼겹살 조각들과, 아이들 먹기 좋으라고 촘촘하게 채썰기 된 오징어와, 달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호떡과, 찰 지게 뭉쳐 있어 노인이 들고 다니기 여간 무거운 게 아닌 각종 떡들을 따로 떼어냈다. 그리고 냉장고 청소 날마다 그랬듯이 아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곳에 다시 넣어뒀다. 이번엔 지도가 있어서 사각지대 찾는 게 더 수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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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 괴수님의 글은 추천!
  • 글 잘 쓰는 아재는 이렇게나 멋있음 ㅊㅊ
  • 찡 하니까 추천
  • 오랜만입니다 수필 굇수님!
  • 찬 하나의 이야기 하나 그리고 감동 둘
  • ㅊㅊ
  • 춫천춫천춫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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