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17/03/04 03:01:47 |
Name | 서흔 |
Subject | 지도자 의식에 관하여 |
최근 일본이라는 대상에 저의 모든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일본사상에 관한 책을 탐독하고 있기도 합니다. 때문에 ‘일본’에 대한 것들이 제게 축적돼 있습니다. 글의 주제도 일본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겠지요. 일본에 관해 쓸 글감을 고민하다가, 마침 좋은 책이 출간돼 그것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 이데올로기』(돌베개, 2017)란 책입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의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불 속에서 밤을 줍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옳지 않다 여겨지는 것을 기각시키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 ‘밤’이라는 성찰을 건져내자는 의미입니다. 『일본 이데올로기』에서도 그의 이러한 사상이 곳곳에 묻어나옵니다. 1952년에 쓰인 책이지만, 저는 그의 사상에 십분 공감했습니다. 또 다케우치 요시미가 바라본 일본을 매개로 한국을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서두는 이쯤에서 줄이기로 하고, 본격적인 글을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첫 글은 『일본 이데올로기』의 첫 꼭지인 「지도자 의식에 관하여」를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일본인에 내재된 ‘지도자 의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인은 지도 받든지, 그게 싫으면 스스로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16쪽)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는 일본 지도자 의식의 지반이 ‘일고(一高)-제대(帝大)-고문(高文)’이라는 입신출세 공식과 그에 따른 교육정신의 관철로 이뤄졌다 보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경기고-서울대, 최근 특목고-서울대 등의 출세 경로는 누구나 알고 있을 겁니다. 일본과 한국의 같은 부분이 또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해방운동조차 인민 사이에서 부정의 운동으로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인민을 질질 끌고 가는 방향으로 … 피라미드의 정점을 넓혀 가는 방식으로 일고-제대 출신들이 주도한다”(17쪽)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지적입니다. 앞서 언급한 경기고-서울대 코스의 황교안-노회찬의 극명한 대비를 간명하게 설명해주는 대목이라 생각했습니다. 한국도 지배세력이나 저항세력 모두 엘리트에 의해 주도돼 왔습니다. 엘리트 주도의 방식은, 엘리트가 엘리트 아닌 자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곳에서 이러한 권위주의가 지배해왔습니다. 많이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지도했고, 옳은 바가 옳음 외의 다양한 생각을 억압하는 형태로 지도해왔습니다.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됐습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런 지도자 의식을 비판합니다. 옳지 않은 것에서도 ‘밤’을 건져낼 수 있다는 믿음이, 이러한 비판을 가능케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옳음-옳지 않음’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경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런 지도자 의식의 뿌리가 민중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신이 일고-제대에 가든지, 그게 아니면 일고-제대에 콤플렉스를 갖든지 둘 중 하나다. … 노예이든지 아니면 노예의 주인이든지다.”(20쪽) 한국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라는 대학서열을 기정사실화하고, ‘지균충(蟲)’, ‘지잡대’라는 비하의 언어가 난무하는 사회이니까요. 이런 계서(繼序)적 사회에서는 자신보다 아래 서열에 있는 자를 ‘지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움트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을 지도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스스로를 지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지적을 곱씹으면서, 저도 알게 모르게 ‘지도자 의식’이 내면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조금 더 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가르치려 했고, 다른 의견을 묵살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옳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의견을 스스로 기각시켜버리기도 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친박집회’를 들 수 있겠네요. 다케우치 요시미도 ‘천장절’ 때 황거에 모인 수만 인파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박근혜 대통령 옹호를 위해 나온 인파나,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나온 인파를 보고 “바보 같은 민중”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바보 같다’며 기각시키고 만다면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 현상을 통해 무언가 성찰적 의미를 건져내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앞서 언급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처럼, “불 속에서 밤을 줍는 모험”을 감행해야만 변화의 계기가 만들어진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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