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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3/17 01:55:32
Name   알료사
Subject   종장
타임라인에 찌끄리는 잡글인데 단순히 글자수 때문에 티타임에 씁니다.. 영양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그분과 그만 만나게 되었습니다. 연락도 안하게 되었어요.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건강도 좋지 않은데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제가 보기에는 거의 혹사에 가까운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그에 대해 제가 계속 무리하지 말고 좀 쉬라고 반복해서 말했었어요. 반대로 저는 상대적으로 개인시간이 많이 남는 일을 하고 있고 그 남는시간을 관점에 따라서는 생산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스타를 한다든가 홍차넷을 한다든가.. 따로 자기계발에 투자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제가 그분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주제넘은 충고를 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요.. 어느날 저에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를 보고 나아가라는 식의 말을 카톡으로 좀 길게 하더라구요. 약간 뜬금없게 느껴지면서도 아무튼 저를 위해 해주는 말이니까 고맙다고 하고 말았는데, 다음날 바로 어제 자기가 한 말 명심하라고 한번 더 상기시켰어요.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저에 대해 너무 모른다면서, 어렸을때부터의 성장 과정과 어떻게 살아왔는지 꿈은 무었인지 상세히 써서 달라고 했어요. 자기만 혼자 레포트 쓰느라 바쁜게 억울하다면서 반은 농담식으로. 제가 물었습니다. 지금 진지하게 얘기하는거냐고. 진지하대요. 그래서 제가 그런 식으로 숙제하듯 보고하는것은 싫다. 시간을 가지고 대화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알아가면 되잖겠느냐고 했어요. 그러고는 몇시간 지나서 그분이 숙제 다 했냐고 받으러 가면 되겠냐고 하더군요..  안했다고, 그런거 싫다고 한번 더 말했습니다. 그 후로 그에 관련한 카톡은 모두 대답 안했어요. 한 세시간정도... 그러다가 다른 화제 꺼내니까 그때 대답했더니, 아까처럼 자기 카톡 씹으면 자기도 잠수탈거라고 하네요... 그 말에 발끈한 저는 이후 48시간 동안 모든 연락 쌩깠습니다. 처음에는 자는가 보다 싶었는지 몇시간 이따가 다시  연락하고 하던게 점점 이상하다고 느낀다는 톡이 오고, 결국에는 제 의도를 알아채고는 너무 심한거 아니냐는 톡이 왔습니다. 그걸 읽고도 저는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답장을 했어요. 나는 그쪽이 원하는 사람 못된다, 미안하다, 고. 그분은 뭔가 잘못 알아들은거 같은데 너를 알고 싶었을 뿐이다, 너를 내 뜻대로 조정할 생각은 없었다, 라고 했어요. 저는 마지막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동안 나에게 너무 잘해줬는데 더이상 이야기하면 좋은 감정 못가질거 같다, 그만 하자, 고. 답장은 자기도 싫다는데 질질 끌 생각은 없다고 왔고 저는 대답하지 않고 대화방을 나왔습니다. 차단은 안했어요.

정말 미스테리할 정도로 저에게 잘해줬습니다. 냉담하다가 마음을 열게 된 이후에 세번 정도 물었어요. 왜 나한테 잘해주냐고. 처음 두번은 명확한 대답을 피하고 얼버무리다가 세번째에야 답해주더라구요. 항상 볼때마다 슬퍼 보였는데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 한번 웃는게 너무 보기 좋았다. 자기가 자주 웃게 해주고 싶었다. 자기는 직업적인 이유로 가식적인 웃음만 달고 사는데 너는 정말 기뻐서 웃게 해주고 싶었다. 라고 했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했으면 수작부리는거라 생각했을겁니다. 그런데 저의 오랜 냉담을 견디며 변치 않는 태도를 보여 준 이후에, 또 두번씩이나 대답을 회피한 이후에 말해준 그 이유는 저를 크게 감동시키고 흔들었어요. 다른 끌리는 감정 없이 고맙다는 이유만으로 이성을 만나도 되는걸까, 라는 고민을 많이 했지만 미리 벽을 쌓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조심스레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좋은 날들이 몇날 며칠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발전하는 관계도 있구나, 하고 속으로 신기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불길한 싹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다 좋은데 딱 한가지, 저를 시험하는듯한 기분이 들게 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예를들면 이런겁니다. '지금 수업 끝나고 집에 간다'하고 톡이 옵니다. 그럼 저는 '그래 잘 들어가'하고 답합니다. 그러면 '뭐야, 나 안보고싶어?'라고 오고, 제가 '아니 보고싶지'라고 해서 만납니다. 한번은 장례식장 갔다가 피곤해서 일찍 들어간다기에 잘 쉬라고 했더니 '괜히 일찍 나왔네'라고 해서 '피곤할까봐 그랬지. 만날거면 만나고'라고 만난 적도 있어요. 이걸 제가 나쁘게 생각하고 있었다고는 전혀 의식도 되지 않았어요. 귀여운 애정 확인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식으로 끝나고 나니까... 아마도 반복되는 그런 패턴의 대화에 저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거 같아요. 저는 항상 일하느라 공부하느라 잠도 몇시간 못자는 그분을 걱정하고 배려해서 말했던건데 그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없냐는 식으로 몰아부치니.. 그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누적되었던 장작에... 앞서 말한 <카톡 씹으면 잠수할거다>라는 말이 불을 질러버린거 같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습니다. 그때만 잠시 울컥했을 뿐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마음만 먹으면 이제라도 사과하고 원하는 <레포트>도 써주고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지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역시 처음부터 제가 보답해야 한다는 부채감으로 그분을 대했던 것이 결국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 지금 글을 쓰면서 실시간으로 느끼는 건데... 아마도 저를 시험하는듯한 그런 대화는 그분께서 이런 제 본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 나 좋아해서 만나는거 아니지, 나한테 고마워서 만나는거지, 라는... 그래서 처음부터 그런 의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 대답이 명확해지자 미련 없이 끝내는 데에 동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뭔가 그분을 탓하고 원망하는 뉘앙스가 글에 섞이지 않았나 걱정되는데 제가 그분에게 서운한 감정이 1이라면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99입니다. 제가 정말 못된 놈인게, 이렇게 단물만 쏙 빼먹고 상처주고는 후회도 안돼요.. 뭔가..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거같아요..  처음에 제가 타임라인에 고민 얘기를 했을때 쪽지로 조언해준 클러분이 계셨는데 결국 이런 결과를 전하게 되어 송구스럽네요..


나름 열심히 자가진단 한건데 제가 저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는지도 확신이 안듭니다.. 아는 동생이 며칠전에 책을 선물해주고는 감상을 물어왔는데 대답을 못하다가 요새 책 읽을 정신이 아니라고 했더니 술 사준다네요..  술마시며 토로좀 하고 나면 정리가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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