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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03/19 05:23:38 |
Name | 알료사 |
Subject | 가난한 사람 |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소설 제목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이후 쓴 모든 소설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의 제목에 부제로 쓰여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 죄와 벌' '가난한 사람들 - 악령' '가난한 사람들 - 백치' '가난한 사람들 -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이런 식으로요. 죄와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을 한 이유에 대해서 초인사상이니 비범한 사람이니 무슨무슨 복잡한 철학적인 평론을 많이들 하는데, 저는 확신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무슨 생각으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도끼를 들게 했는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해서 하숙집 월세 낼 돈이 밀렸고, 가난해서 여동생이 매춘에 가까운 결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했고, 가난해서 옷도 남루하게 입고 다녔습니다. 그의 모든 망상이 그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너무도 찌질하게, 가난한 사람의 운명에 저항하는 길이 악덕 전당포 주인을 살해하는 것으로 해결될거라고, 그리고 거기에 말도 안되는 명분들을 끌어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 명분들이 얼마나 찌질한지 잘 알기에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고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위악적으로 굴었습니다. 찌질한 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는게 차라리 나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었던 저는 라스콜리니코프에 너무도 절절히 감정이입했고, 동족혐오의 심리로 그를 혐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철저하게 짓밟고 패배시켰습니다. 죄를 지은 이에게 가장 잔인한 형벌 - 사랑 - 라스콜리니코프와 똑같이 가난한 사람이었던 소냐를 등장시켜 그 가혹한 형을 집행시켰던 것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수사관 포르피리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하고 자신의 범행방식과 은폐수법을 완전히 까발리면서 잡을테면 잡아 보라고 도발했습니다. 하지만 소냐를 보았을 때부터 두려움과 불안함에 휩싸였습니다. 자신과 똑같은, 아니 자신보다 훨씬 더 가난한 사람.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신과는 다르게 정정 당당하게 운명에 맞서고 있는 사람. 자신이 쓴 답안지가 틀렸음을 명명 백백하게 증명해내고 있는 사람... 그래서 소냐를 만날 때마다 겁주고 괴롭혔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애써 보아도 모든게 헛수고라고. 당신은 몸을 팔다가 병에 걸려 죽을 것이고 먹고 살 길이 없어진 동생들도 똑같은 처지가 될거라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불쌍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만, 정말로 불쌍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사랑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벌한건 소냐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포르피리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찾아가 우리는 증거가 없어 너를 잡을 길이 없다, 고 솔직하게 백기를 들고, 하지만 너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자수하라. 최대한 정상참작 해주겠다. 고 권합니다. 찌질하기 그지없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문>에 대해서 <청년의 우수가 깃들여 있다>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해주기까지 하면서.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굴복합니다. 자수를 하면서도 오기를 부리던 그의 못난 자존심은 시베리아 유형지까지 찾아온 소냐의 무릎을 끌어않고 펑펑 울면서 무너져 내립니다. 많은 독자들이 라스콜리니코프의 그와 같은 패배를 마음에 들지 않아하고 갑작스럽고 근거 없는 회개라며 비판합니다만, 그런 분들께 저는 죄와벌의 첫 세 페이지만 다시 읽어 보라고 권합니다. 그의 찌질한 망상이 아직은 새싹으로 자라고 있을 때, 그 자신이 얼마나 그 새싹을 제거하고 싶었는지 그의 독백으로 잘 나타나 있다고. '죄와 벌' 은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박하고 야비하게 만드는지 너무도 무섭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청년은 가난한 청년만이 싸울 수 있는 방식으로 그 괴물과 싸우다가 패배하고, 가난한 청년만이 가질 수 있는 오기와 자존심으로 그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발버둥치고, 가난한 사랑만으로만 가능한 구원을 받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모든 과정을 조금도 미화시키지도 않고 동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었던 저는 더 크게 위로받고 더 크게 용기를 얻었습니다. 타임라인에 쓸 잡상이 자꾸 글자수 때문에 티게로 넘어오네요 .. ㅋ 네, 어느 자학적인 의사분 때문에 쓰게 된 글은 맞지만 저격은 아니에요. 원래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마침 가난을 이야기하시길레 속에 불끈 하고 나오는게 있어서 토해 봤어요... ㅎ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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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인간을 가장 밑바닥으로 내몰아요. 하지만 그 안에서도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믿음이 선을 지킬 수 있는 방패가 되고 나를 타락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될거에요. 내가 가난하기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것이 용납되고 그런건 아니거든요. 옆집의 순이도 우리동네에 살지만 가난앞에 묵묵히 저항하며 최선을 다합니다. 그게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가장 큰 가난에 대한 저항인 것 같아요.
가난하지만 패배하지 않을 권리가 우리 각자 개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저는 그런 맘으로 어린시절에 살았던 것 같아요. 옛날 생각하니 먹먹...
가난하지만 패배하지 않을 권리가 우리 각자 개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저는 그런 맘으로 어린시절에 살았던 것 같아요. 옛날 생각하니 먹먹...
라스콜리니코프의 개인적인 원한과 증오에다가 거창한 세계정의를 끌어오는 그 심리가 저는 비겁하게 느껴졌습니다. 두냐의 어머니가 딸을 시집보내면서 챙기게 될 이득을 생각하는 모습이 천박하게 보였구요. 마르멜라도프는 구제 불능의 쓰레기라고 생각하구요.(그래도 저는 마르멜라도프를 좋아하지만..) 소냐의 아파트?에 같이 사는 이웃주민들은 어떻구요.. 저는 그런게 너무 싫습니다.. 소냐의 계모가 소냐를 매춘을 하도록 몰아부치다가 막상 정말로 소냐가 몸을 팔아서 돈을 가져다 주자 보인 태도나.. 당장 집도 없고 먹을것도 없어질 판국에 성대... 더 보기
라스콜리니코프의 개인적인 원한과 증오에다가 거창한 세계정의를 끌어오는 그 심리가 저는 비겁하게 느껴졌습니다. 두냐의 어머니가 딸을 시집보내면서 챙기게 될 이득을 생각하는 모습이 천박하게 보였구요. 마르멜라도프는 구제 불능의 쓰레기라고 생각하구요.(그래도 저는 마르멜라도프를 좋아하지만..) 소냐의 아파트?에 같이 사는 이웃주민들은 어떻구요.. 저는 그런게 너무 싫습니다.. 소냐의 계모가 소냐를 매춘을 하도록 몰아부치다가 막상 정말로 소냐가 몸을 팔아서 돈을 가져다 주자 보인 태도나.. 당장 집도 없고 먹을것도 없어질 판국에 성대한(그들 형편에 비해서) 장례식을을 여는 그 심리... 아.. 쓰면서도 너무 비참하네요...
'가난의 낙인' 과 '나는 가난하다, 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하는 말'과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제부쉬킨의 마지막 오열이 저한테는 가난 때문에 파멸한 것으로 보였고 나스타샤가 뮈시킨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그래서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온 것도 가난으로 인한 파멸로 보았습니다. 뮈쉬킨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되자 그를 뜯어먹으려고 달라붙는 거지근성 넘치는 떨거지들... 네.. 저는 그들을 그렇게밖에 볼 수 없더라구요.. 가난을 권리라고 고의로 착각하는 놈들... 싫어요.. 정말 싫습니다..
악령에서 스타브로긴에게 들러붙어 구걸하는 거지나 카라마조프에서 '수세미 장교'가 알료사가 준 지폐를 땅에 던지고 발로 밟는 장면 같은 것들도 전부 좋게 볼 수 없었습니다.
가난조차 범할 수 없는 관념의 힘... 관념의 힘이란게 그들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보았어요.. 그들에게 필요한건 관념이 아닌데.. 오히려 거기에서 벗어나야 행복할 수 있을거 같은데..
제가 너무 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편협적으로 소설을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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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간정도 답글 기다리다가 다른 용무 보시는거 같아 댓글을 수정(추가) 했습니다. 기다리면서 모리아님 댓글을 몇번이고 곱씹어 생각해 보았는데... 마지막 한 문장은 어느정도 알것도 같아요.. 그런게 매력인거 같다가도.. 아니 그 매력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찾는 거겠지만서도.. 아..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니 어쩌면 저도 제 자신을 속이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네요.. ㅋ 그렇습니다. 저는 제부쉬킨과 나스타샤의 최후가 어쩌면 승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제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ㅜㅠ
'가난의 낙인' 과 '나는 가난하다, 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하는 말'과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제부쉬킨의 마지막 오열이 저한테는 가난 때문에 파멸한 것으로 보였고 나스타샤가 뮈시킨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그래서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온 것도 가난으로 인한 파멸로 보았습니다. 뮈쉬킨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되자 그를 뜯어먹으려고 달라붙는 거지근성 넘치는 떨거지들... 네.. 저는 그들을 그렇게밖에 볼 수 없더라구요.. 가난을 권리라고 고의로 착각하는 놈들... 싫어요.. 정말 싫습니다..
악령에서 스타브로긴에게 들러붙어 구걸하는 거지나 카라마조프에서 '수세미 장교'가 알료사가 준 지폐를 땅에 던지고 발로 밟는 장면 같은 것들도 전부 좋게 볼 수 없었습니다.
가난조차 범할 수 없는 관념의 힘... 관념의 힘이란게 그들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보았어요.. 그들에게 필요한건 관념이 아닌데.. 오히려 거기에서 벗어나야 행복할 수 있을거 같은데..
제가 너무 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편협적으로 소설을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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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간정도 답글 기다리다가 다른 용무 보시는거 같아 댓글을 수정(추가) 했습니다. 기다리면서 모리아님 댓글을 몇번이고 곱씹어 생각해 보았는데... 마지막 한 문장은 어느정도 알것도 같아요.. 그런게 매력인거 같다가도.. 아니 그 매력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찾는 거겠지만서도.. 아..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니 어쩌면 저도 제 자신을 속이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네요.. ㅋ 그렇습니다. 저는 제부쉬킨과 나스타샤의 최후가 어쩌면 승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제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ㅜㅠ
알료사님의 글은 참 따뜻합니다. 모든 혐오자는 그에 적합한 이유가 있습니다. 개인적 경험의 중첩을 주로 이유로 들고, 이유가 없더라도 자신의 감정에 근거가 필요해 결국에는 만들어 내거든요. 고백하자면 저는 그런 혐오자를 혐오했습니다. 성별,지역,장애,학벌,나이,가난,성적 지향 등에 대한 편견을 무의식 대화 중에 드러내거나 오히려 근거가 이러하거나 자기같은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당당한 사람들이 혐오스러웠습니다. 아이러니하게 그런 자들에게 혐오감이 드는 자신이 너무 괴로웠고, 계속 싸웠습니다. 제게 답은 이해와 연민이었습니다. 오해마시기 바랍니다 연민은 인간이 환경을 벗어나거나 자신의 좁은 경험을 벗어나 생각할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한 인정,안타까움입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중요한 것은 합리화하려는 자신(그럼 편하거든요)과 계속 싸우는 거 그 자체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 타임라인에서 줄리엣님과 烏鳳님의 서로 반대되는 입장의 글이 올라오고, 두분 모두에게 공감과 위로의 댓글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이래서 홍차넷을 벗어날 수 없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거 같은 사람들과도 함께 어울리고 간혹 논쟁을 벌이더라도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나와 다른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고, 끝내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을 때에는 침묵이라는 관용을 보여주는 곳.. 보통 다른 사이트에서 논쟁 끝에 내가 마지막 댓글을 달았으면 이겼다고 정신승리 할텐데, 홍차넷에서는 상대가 나에게... 더 보기
오늘 타임라인에서 줄리엣님과 烏鳳님의 서로 반대되는 입장의 글이 올라오고, 두분 모두에게 공감과 위로의 댓글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이래서 홍차넷을 벗어날 수 없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거 같은 사람들과도 함께 어울리고 간혹 논쟁을 벌이더라도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나와 다른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고, 끝내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을 때에는 침묵이라는 관용을 보여주는 곳.. 보통 다른 사이트에서 논쟁 끝에 내가 마지막 댓글을 달았으면 이겼다고 정신승리 할텐데, 홍차넷에서는 상대가 나에게 아량을 베풀었구나 하고 감사하게 느끼게 되더라구요.
좁은 경험으로 누군가를 혐오하게 된 이들은 부디 그 혐오가 잘못되었다는걸 깨닫게 해줄 <좁은 경험>을 언젠가 하길 바랍니다. 네, 저 말예요 저. ㅋㅋ
진솔한 댓글 감사드려요~ ㅎ
좁은 경험으로 누군가를 혐오하게 된 이들은 부디 그 혐오가 잘못되었다는걸 깨닫게 해줄 <좁은 경험>을 언젠가 하길 바랍니다. 네, 저 말예요 저. ㅋㅋ
진솔한 댓글 감사드려요~ ㅎ
평소에 생각하던 것 중 하나가 '어릴때 체험한 경험이나 기억은 평생간다, 그렇기에 어릴때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가 정말 중요하다'라는 것 이거든요.
가난도 그 중 하나인데.. 저희 아버지가 정말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었거든요.
지금은 그나마도 형편이 나아진 편에 속하는데 지금(은 없어서가 아니라 바빠서)에 와서도 밥 때를 놓칠것 같으면 굉장히 두려워하십니다.
주무실때도 항상 tv를 켜놓고 주무시고, 고독한 것과 배고픈 것, 추운것을 못 견뎌하십니다.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거죠. 자영업이다보니 일주일에 하루정도는 자신... 더 보기
가난도 그 중 하나인데.. 저희 아버지가 정말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었거든요.
지금은 그나마도 형편이 나아진 편에 속하는데 지금(은 없어서가 아니라 바빠서)에 와서도 밥 때를 놓칠것 같으면 굉장히 두려워하십니다.
주무실때도 항상 tv를 켜놓고 주무시고, 고독한 것과 배고픈 것, 추운것을 못 견뎌하십니다.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거죠. 자영업이다보니 일주일에 하루정도는 자신... 더 보기
평소에 생각하던 것 중 하나가 '어릴때 체험한 경험이나 기억은 평생간다, 그렇기에 어릴때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가 정말 중요하다'라는 것 이거든요.
가난도 그 중 하나인데.. 저희 아버지가 정말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었거든요.
지금은 그나마도 형편이 나아진 편에 속하는데 지금(은 없어서가 아니라 바빠서)에 와서도 밥 때를 놓칠것 같으면 굉장히 두려워하십니다.
주무실때도 항상 tv를 켜놓고 주무시고, 고독한 것과 배고픈 것, 추운것을 못 견뎌하십니다.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거죠. 자영업이다보니 일주일에 하루정도는 자신의 의지대로 쉴 수도 있지만, 가난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하루도 쉬지 않고 나가십니다.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라지만 이런 건 제대로 된 복지국가라면 겪지 않아도 될, 국가라는게 있다면 최소한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느끼지 않게 해줬어야 했던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가난도 그 중 하나인데.. 저희 아버지가 정말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었거든요.
지금은 그나마도 형편이 나아진 편에 속하는데 지금(은 없어서가 아니라 바빠서)에 와서도 밥 때를 놓칠것 같으면 굉장히 두려워하십니다.
주무실때도 항상 tv를 켜놓고 주무시고, 고독한 것과 배고픈 것, 추운것을 못 견뎌하십니다.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거죠. 자영업이다보니 일주일에 하루정도는 자신의 의지대로 쉴 수도 있지만, 가난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하루도 쉬지 않고 나가십니다.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라지만 이런 건 제대로 된 복지국가라면 겪지 않아도 될, 국가라는게 있다면 최소한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느끼지 않게 해줬어야 했던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알료사 님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방식이, 뭐랄까 이런 느낌이에요.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불륜에 빠진 이유는 그녀가 부잣집 마나님이라서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런 거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떤 너무 느슨한 통념에 기대어 작품 속에서 그 통념을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방식으로 독서하고 있다는 느낌. 본문에 쓰신 정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을 가져올 필요조차 없지요. 그런 통념을 기꺼이 확인해주는 2류 3류 작품들이 얼마나 많나요? 도스토예프스키를 정말로 좋아하신다고 여러 차례 밝히셨기 때문... 더 보기
알료사 님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방식이, 뭐랄까 이런 느낌이에요.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불륜에 빠진 이유는 그녀가 부잣집 마나님이라서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런 거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떤 너무 느슨한 통념에 기대어 작품 속에서 그 통념을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방식으로 독서하고 있다는 느낌. 본문에 쓰신 정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을 가져올 필요조차 없지요. 그런 통념을 기꺼이 확인해주는 2류 3류 작품들이 얼마나 많나요? 도스토예프스키를 정말로 좋아하신다고 여러 차례 밝히셨기 때문에 좀 이상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가난의 낙인'은 타인들이 찍고 타인들이 관찰하는 거, 당사자는 수동적으로 짊어지고 다니는 거지요. 그것은 내면이 아니고 외부에 찍히는 거예요. 졸라가 묘사한 가난한 사람들, 목로주점의 제르베즈가 직장을 잃고 이웃집 남자와 관계를 맺어 돈을 받고 남편이 그것을 묵인하고 부부가 돈을 세고 그 과정에서 일말의 수치심도 느끼지 않는 모습들을 [가난을 조금도 미화시키지도 않고 동정하지도 않는] 예로 든다면 적절할 거 같아요. 아니 가난을 미화하지 않는 - 오히려 징그러울 정도로 해부하는 - 자연주의적 작품들은 정말로 많아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자신의 불행과 좌절된 희망을 장광설로 웅변하거나(라스콜리니코프), 스스로 광대짓을 하면서 아이러니를 부여하거나(마르멜라도프), 적당히 계산된 품위로 덮으려 하거나(라스 모친)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가난에 대응하죠. 그 과정에서 비겁함과 속물근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들은 끝내 자존심을 절대로 버리지 않고 사회의 낙인에 저항해요. 죄와 벌에서 천박하고 야비한 인물이 있다면 그건 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부자인 스비드리가일로프지요.
가난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중요한 주제이긴 하지만, 가난을 부의 반대에 해당하는 일종의 잣대로 삼고 '난 가난하지만 여기까지 왔다' '난 가난하기에 이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인물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쓰지 않아요. 만일 그랬다면 그는 -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 사회파 소설가가 되었겠지요. 그에게 가난은 타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조건에 가까워요. (톨스토이가 가난을 상상할 수 없듯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부를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죠.)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출발점이지만 이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난을 전시하는 소설이 아니에요. 그가 가난한 이들의 기행과 웅변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가, 그건 '나는 가난 때문에 이렇게 불행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난 가난해, 내 가난을 봐, 그리고 보잘것없는 내가 어떻게 그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지 잘 지켜봐' 하는 것에 가까운 거예요.
'가난의 낙인'은 타인들이 찍고 타인들이 관찰하는 거, 당사자는 수동적으로 짊어지고 다니는 거지요. 그것은 내면이 아니고 외부에 찍히는 거예요. 졸라가 묘사한 가난한 사람들, 목로주점의 제르베즈가 직장을 잃고 이웃집 남자와 관계를 맺어 돈을 받고 남편이 그것을 묵인하고 부부가 돈을 세고 그 과정에서 일말의 수치심도 느끼지 않는 모습들을 [가난을 조금도 미화시키지도 않고 동정하지도 않는] 예로 든다면 적절할 거 같아요. 아니 가난을 미화하지 않는 - 오히려 징그러울 정도로 해부하는 - 자연주의적 작품들은 정말로 많아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자신의 불행과 좌절된 희망을 장광설로 웅변하거나(라스콜리니코프), 스스로 광대짓을 하면서 아이러니를 부여하거나(마르멜라도프), 적당히 계산된 품위로 덮으려 하거나(라스 모친)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가난에 대응하죠. 그 과정에서 비겁함과 속물근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들은 끝내 자존심을 절대로 버리지 않고 사회의 낙인에 저항해요. 죄와 벌에서 천박하고 야비한 인물이 있다면 그건 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부자인 스비드리가일로프지요.
가난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중요한 주제이긴 하지만, 가난을 부의 반대에 해당하는 일종의 잣대로 삼고 '난 가난하지만 여기까지 왔다' '난 가난하기에 이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인물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쓰지 않아요. 만일 그랬다면 그는 -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 사회파 소설가가 되었겠지요. 그에게 가난은 타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조건에 가까워요. (톨스토이가 가난을 상상할 수 없듯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부를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죠.)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출발점이지만 이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난을 전시하는 소설이 아니에요. 그가 가난한 이들의 기행과 웅변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가, 그건 '나는 가난 때문에 이렇게 불행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난 가난해, 내 가난을 봐, 그리고 보잘것없는 내가 어떻게 그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지 잘 지켜봐' 하는 것에 가까운 거예요.
어라.. 전부 수긍가는 말씀이신데.. 모리아님 생각이랑 제 생각이랑 다른 건가요? 완전 바보 된 기분... ㅜㅠ [자신의 불행과 좌절된 희망을 장광설로 웅변하거나(라스콜리니코프), 스스로 광대짓을 하면서 아이러니를 부여하거나(마르멜라도프), 적당히 계산된 품위로 덮으려 하거나(라스 모친)] 말씀하신 이 부분... 이거 가난을 미화했다고 보시는 건가요? 그 부분 때문에 더 비참한거 아닌가 싶은데.. ㅠㅜ [ '난 가난해, 내 가난을 봐, 그리고 보잘것없는 내가 어떻게 그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지 잘 지켜봐'] 이것도 그렇구요... ㅜㅠ
쓸데없는 말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가난에 관한 이야기 중에 아주 인상 깊었던 드라마 대사가 있습니다. 박경수 작가의 <추적자>라는 유명한 드라마가 있는데 거기서 악당으로 나오는 김상중이 하는 대사입니다.
http://m.blog.naver.com/joux/100162847356
"
이발소 주인아저씨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어. 장애인이었지.
하지만 아버지 앞에선 늘 당당했어.
아버지하고 얘기를 나눌 때면 아버진 늘 무릎을 꿇으셨지... 더 보기
http://m.blog.naver.com/joux/100162847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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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주인아저씨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어. 장애인이었지.
하지만 아버지 앞에선 늘 당당했어.
아버지하고 얘기를 나눌 때면 아버진 늘 무릎을 꿇으셨지... 더 보기
쓸데없는 말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가난에 관한 이야기 중에 아주 인상 깊었던 드라마 대사가 있습니다. 박경수 작가의 <추적자>라는 유명한 드라마가 있는데 거기서 악당으로 나오는 김상중이 하는 대사입니다.
http://m.blog.naver.com/joux/100162847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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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주인아저씨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어. 장애인이었지.
하지만 아버지 앞에선 늘 당당했어.
아버지하고 얘기를 나눌 때면 아버진 늘 무릎을 꿇으셨지.
눈을 맞춰야 하니까. 위에서 내려다 볼 순 없잖아. 건물 주인을.
그땐 난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장애는 가난이란 것을.
원하는 걸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장애라면, 가난은 그 무엇도 할 수 없게 만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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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blog.naver.com/joux/100162847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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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주인아저씨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어. 장애인이었지.
하지만 아버지 앞에선 늘 당당했어.
아버지하고 얘기를 나눌 때면 아버진 늘 무릎을 꿇으셨지.
눈을 맞춰야 하니까. 위에서 내려다 볼 순 없잖아. 건물 주인을.
그땐 난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장애는 가난이란 것을.
원하는 걸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장애라면, 가난은 그 무엇도 할 수 없게 만드니까.
"
제가 맞게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가난(보다 정확히는 무력함이라고 생각합니다만)에 대한 피해의식을 전시하고 그것을 관념의 수사로 초극하면서 스스로의 권력욕/지배욕/출세욕을 자기기만적으로(표현을 빌리자면 돈키호테적으로) 드러내는 내적 태도 자체(스노브적 비열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특히 라스꼴리키꼬프)를 '비참함''천박함''야비함''찌질함'이라고 묘사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와 작품이야 가난은 영혼을 침범할 수 없는 외피에 불과하다고 보지만, 그들의 장기말인 라스꼴리니꼬프는 일단 가난(무력함)은 자신의 역량과 불일... 더 보기
제가 맞게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가난(보다 정확히는 무력함이라고 생각합니다만)에 대한 피해의식을 전시하고 그것을 관념의 수사로 초극하면서 스스로의 권력욕/지배욕/출세욕을 자기기만적으로(표현을 빌리자면 돈키호테적으로) 드러내는 내적 태도 자체(스노브적 비열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특히 라스꼴리키꼬프)를 '비참함''천박함''야비함''찌질함'이라고 묘사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와 작품이야 가난은 영혼을 침범할 수 없는 외피에 불과하다고 보지만, 그들의 장기말인 라스꼴리니꼬프는 일단 가난(무력함)은 자신의 역량과 불일치하는 부조리라는 시작점에서 출발하니까요. 도스토옙스키는 말씀대로 선존 선재하는 물리세계 자체에 대한 자연주의적 묘사를 목표로 하는 작가는 아니고, 그에 대한 각 인물들의 관념윤리적 대응을 주목하지만, 그 과정에서 세계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중2병자들의 오타쿠스러운 절박함이나 철저함을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그와 정확하게 비례하는 그네들의 관념 투쟁의 조야함과 피상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도스도예프스키 관점에서는 서구주의의 병폐겠죠.), 이는 꽤나 특유한 부분이다 싶습니다. 그리고 알료사님이 좋아하시는 포인트는 그 부분이 아닌가...뭐 그런 생각이 드네요.
알료사님이 라스콜리니코프 이외에 마르멜라도프, 자신의 모친, 소냐의 계모, 제부시킨 같은 인물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셔서 혼동이 있었군요.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 스타브로긴 일파(악령) - 이반(카라마조프) 계열의 지식인 등장인물들의 코메디에 관해서는 구밀복검님의 설명이 맞는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의 성격이 찌질하다거나 관념이 조악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도저히 천박하거나 야비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가난(무력함)이 인간을 천박하게 만든다'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전 작품을 통해서 매우 강경하게 부정하고 있는 통념이... 더 보기
알료사님이 라스콜리니코프 이외에 마르멜라도프, 자신의 모친, 소냐의 계모, 제부시킨 같은 인물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셔서 혼동이 있었군요.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 스타브로긴 일파(악령) - 이반(카라마조프) 계열의 지식인 등장인물들의 코메디에 관해서는 구밀복검님의 설명이 맞는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의 성격이 찌질하다거나 관념이 조악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도저히 천박하거나 야비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가난(무력함)이 인간을 천박하게 만든다'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전 작품을 통해서 매우 강경하게 부정하고 있는 통념이지요. 오히려 그가 천박하고 야비한 캐리커처로 묘사했던 것은 중간계급(폭군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같은) 내지 상류층이었고 하층계급의 인물에겐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 독자들의 연민을 자아낼 수 있는 엄청난 분량의 대사를 주곤 했죠.
라스콜리니코프의 출세욕과 그 걸림돌을 쥘리앵 소렐의 출세욕 및 걸림돌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좀더 명확해지는데, 소렐이 아무런 내적 양심의 제어장치 없이 출세길을 걸어가며 자신에게 부정적인 증언을 한 옛 연인을 총으로 쏘기까지 하는 등 파국이 올 때까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던 경박스러움을 - 또는 어떤 면에서는 활기를 - 지녔던 반면에, 라스콜리니코프의 출세욕은 그것이 애초부터 좌절되었기 때문에 초라하고 궁색해 보이고 노파 살해의 범죄로 나타났기 때문에 과도하고 정신병적일지언정 천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가질 뻔하다가 좌절된 것에 대한 신경질은 천박한 것이지만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자에 대해 우리는 좀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지요...
라스콜리니코프의 출세욕과 그 걸림돌을 쥘리앵 소렐의 출세욕 및 걸림돌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좀더 명확해지는데, 소렐이 아무런 내적 양심의 제어장치 없이 출세길을 걸어가며 자신에게 부정적인 증언을 한 옛 연인을 총으로 쏘기까지 하는 등 파국이 올 때까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던 경박스러움을 - 또는 어떤 면에서는 활기를 - 지녔던 반면에, 라스콜리니코프의 출세욕은 그것이 애초부터 좌절되었기 때문에 초라하고 궁색해 보이고 노파 살해의 범죄로 나타났기 때문에 과도하고 정신병적일지언정 천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가질 뻔하다가 좌절된 것에 대한 신경질은 천박한 것이지만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을 갈구하는 자에 대해 우리는 좀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지요...
복싱 보고 오느라 늦었어요 ㅎㅎ
음 그런 거 보단...사실은 이미 실재를 눈치채고 있는 이가 무의식/의식적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관념적 상상을 궁구하고, 그를 통해서 재차 자신의 눈을 가리우는 이중의 기만을 행하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나르시시즘 속에서 자신의 왜소함을 외면하기 위해서고. 그건 말하자면 목도해야할 것을 목도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지적 나태함을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역설적인 지적 열정인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 열정이 지향하는 관념적 상상이란 천박하기 이를 데가 없는 노예도덕이란 점에서 그에 동기화 ... 더 보기
음 그런 거 보단...사실은 이미 실재를 눈치채고 있는 이가 무의식/의식적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관념적 상상을 궁구하고, 그를 통해서 재차 자신의 눈을 가리우는 이중의 기만을 행하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나르시시즘 속에서 자신의 왜소함을 외면하기 위해서고. 그건 말하자면 목도해야할 것을 목도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지적 나태함을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역설적인 지적 열정인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 열정이 지향하는 관념적 상상이란 천박하기 이를 데가 없는 노예도덕이란 점에서 그에 동기화 ... 더 보기
복싱 보고 오느라 늦었어요 ㅎㅎ
음 그런 거 보단...사실은 이미 실재를 눈치채고 있는 이가 무의식/의식적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관념적 상상을 궁구하고, 그를 통해서 재차 자신의 눈을 가리우는 이중의 기만을 행하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나르시시즘 속에서 자신의 왜소함을 외면하기 위해서고. 그건 말하자면 목도해야할 것을 목도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지적 나태함을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역설적인 지적 열정인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 열정이 지향하는 관념적 상상이란 천박하기 이를 데가 없는 노예도덕이란 점에서 그에 동기화 되는 이에게서 천박함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반대로 연민을 느낄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는 상징주의적(라고 쓰고 자의식과잉적이라고 읽는)독해를 자극하고자 하는 미끼들을 군데군데 배치한 기만적인 서브컬쳐물에 온갖 자의적인 의미부여를 하고 '작가의 의도'와 '본인의 상상'을 일치시키기 위해 갖은 공을 들이면서 그 작품 및 그에 통합되는 자신 스스로에 도취되는 '게으른' 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싶어요.
음 그런 거 보단...사실은 이미 실재를 눈치채고 있는 이가 무의식/의식적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관념적 상상을 궁구하고, 그를 통해서 재차 자신의 눈을 가리우는 이중의 기만을 행하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나르시시즘 속에서 자신의 왜소함을 외면하기 위해서고. 그건 말하자면 목도해야할 것을 목도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지적 나태함을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역설적인 지적 열정인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 열정이 지향하는 관념적 상상이란 천박하기 이를 데가 없는 노예도덕이란 점에서 그에 동기화 되는 이에게서 천박함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반대로 연민을 느낄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는 상징주의적(라고 쓰고 자의식과잉적이라고 읽는)독해를 자극하고자 하는 미끼들을 군데군데 배치한 기만적인 서브컬쳐물에 온갖 자의적인 의미부여를 하고 '작가의 의도'와 '본인의 상상'을 일치시키기 위해 갖은 공을 들이면서 그 작품 및 그에 통합되는 자신 스스로에 도취되는 '게으른' 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싶어요.
읭 뭔가 문체가 구밀복검님 문체가 아닌데... 이상하당. 다른 사람 같아요 @@ 왤케 포근포근해졌지...
라스콜리니코프의 관념이 노예도덕의 그것이라는 생각은 잘 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이 인물에게서 온갖 과잉된 감정과 행동들의 더께를 걷어내고 뼈대만 본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아... 그런데 그렇게 하면 라스콜리니코프나 소렐이나 라스티냑을 독해하는 데 아무런 차이가 있지 않을 거 같아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제가 보았던 독특한 점은 말씀하신 그 실재 - 목도해야 하는 것 - 에 대해 작... 더 보기
라스콜리니코프의 관념이 노예도덕의 그것이라는 생각은 잘 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이 인물에게서 온갖 과잉된 감정과 행동들의 더께를 걷어내고 뼈대만 본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아... 그런데 그렇게 하면 라스콜리니코프나 소렐이나 라스티냑을 독해하는 데 아무런 차이가 있지 않을 거 같아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제가 보았던 독특한 점은 말씀하신 그 실재 - 목도해야 하는 것 - 에 대해 작... 더 보기
읭 뭔가 문체가 구밀복검님 문체가 아닌데... 이상하당. 다른 사람 같아요 @@ 왤케 포근포근해졌지...
라스콜리니코프의 관념이 노예도덕의 그것이라는 생각은 잘 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이 인물에게서 온갖 과잉된 감정과 행동들의 더께를 걷어내고 뼈대만 본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아... 그런데 그렇게 하면 라스콜리니코프나 소렐이나 라스티냑을 독해하는 데 아무런 차이가 있지 않을 거 같아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제가 보았던 독특한 점은 말씀하신 그 실재 - 목도해야 하는 것 - 에 대해 작가 자신이 (분명히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거예요. 인물들을 작품 내에서 단죄하고 처분할 때 톨스토이처럼 인물의 죄상(이랄지 인과율)을 플롯 속에 선명하게 밝히고 응보의 칼을 휘두르지 않지요. 라스콜리니코프에게서 죄의 임팩트가 큰가, 벌의 임팩트가 큰가 하면 과도하게 벌의 임팩트가 커요. 그가 자신의 속물성과 노예도덕을 보여주는 오글오글한 장면들보다는 물리적 정신적으로 위기에 처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병을 앓고 천국과 지옥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의식의 스펙터클이 더 인상적이지요. 마치 카이지가 에스푸아르 호에서 생사를 건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을 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의 인간적 약점들은 그 장면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라스콜리니코프의 관념이 노예도덕의 그것이라는 생각은 잘 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이 인물에게서 온갖 과잉된 감정과 행동들의 더께를 걷어내고 뼈대만 본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아... 그런데 그렇게 하면 라스콜리니코프나 소렐이나 라스티냑을 독해하는 데 아무런 차이가 있지 않을 거 같아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제가 보았던 독특한 점은 말씀하신 그 실재 - 목도해야 하는 것 - 에 대해 작가 자신이 (분명히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거예요. 인물들을 작품 내에서 단죄하고 처분할 때 톨스토이처럼 인물의 죄상(이랄지 인과율)을 플롯 속에 선명하게 밝히고 응보의 칼을 휘두르지 않지요. 라스콜리니코프에게서 죄의 임팩트가 큰가, 벌의 임팩트가 큰가 하면 과도하게 벌의 임팩트가 커요. 그가 자신의 속물성과 노예도덕을 보여주는 오글오글한 장면들보다는 물리적 정신적으로 위기에 처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병을 앓고 천국과 지옥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의식의 스펙터클이 더 인상적이지요. 마치 카이지가 에스푸아르 호에서 생사를 건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을 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의 인간적 약점들은 그 장면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moira 님//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 좋아서 졸음이 계속 몰려오고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지라 머릿속에 잘 정리가 안 되긴 하는데 대충 끼적여보면 이래요.
물론 노예도덕이라는 점에서는 소렐이나 라스티냑 같은 인물 유형과 라스꼴리니꼬프가 다를 게 없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다를 게 없지 않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양자 자체의 차이를 전제하는 이야기니까요. 말씀대로 라스꼴리니꼬프는 반성적 사유가 있기에 즉물적인 대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궁구한다는 점에서 소렐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소렐의 허영이 세태와 교양... 더 보기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 좋아서 졸음이 계속 몰려오고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지라 머릿속에 잘 정리가 안 되긴 하는데 대충 끼적여보면 이래요.
물론 노예도덕이라는 점에서는 소렐이나 라스티냑 같은 인물 유형과 라스꼴리니꼬프가 다를 게 없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다를 게 없지 않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양자 자체의 차이를 전제하는 이야기니까요. 말씀대로 라스꼴리니꼬프는 반성적 사유가 있기에 즉물적인 대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궁구한다는 점에서 소렐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소렐의 허영이 세태와 교양... 더 보기
moira 님//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 좋아서 졸음이 계속 몰려오고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지라 머릿속에 잘 정리가 안 되긴 하는데 대충 끼적여보면 이래요.
물론 노예도덕이라는 점에서는 소렐이나 라스티냑 같은 인물 유형과 라스꼴리니꼬프가 다를 게 없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다를 게 없지 않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양자 자체의 차이를 전제하는 이야기니까요. 말씀대로 라스꼴리니꼬프는 반성적 사유가 있기에 즉물적인 대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궁구한다는 점에서 소렐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소렐의 허영이 세태와 교양이라면 라스꼴리니꼬프의 허영은 세계 그 자체라는 점에서 라스꼴리니꼬프가 상식적인 의미로는 더 고상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죠. 바로 그 점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라스꼴리니꼬프 쪽에 보다 조소(이것은 인력引力과 동전의 양면이겠죠.)를 짓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애초에 소렐은 지적 검토 없이 축생의 차원에서 살아가는 이고, 그러하기에 말씀대로 여과 없는 활기를 띠므로 독자 역시도 그에게 축생에게서 느끼는 수준의 천박함을 느낄 뿐이죠.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는 존재 근거를 이성에 의해 찾고, 사상이라는 사상누각을 축조하며 지적/인간적인 허영을 드러내는 식으로 보다 그럴듯한 우회로를 어떻게든 강구하여 세련된 기만을 행하려 하죠. 이 기만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허위의 밀도는 높아지고, 이는 독자에게 혐멸감을 유발시킬 수 있을 거에요. 물론 말씀대로 작품에서 라스꼴리니꼬프 같은 인물들을 묘사할 때에는 그네들의 허위와 자기기만이라는 범죄보다는 양심의 고문이라는 형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후자는 전자에 의해 스스로 부과되었다는 점에서 자업자득이고 자승자박이겠죠. 자신이 만든 관념체계, 곧 거대한 자기기만이 자신에게 멍에를 지우게 되니까요. 자신이 지탱할 수 없는, 내심의 내심으로는 자신 역시도 신뢰하지 않는 - 말씀을 빌리자면 애초부터 좌절된 - 허황된 이념에 도취될 때에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부과할 수밖에 없는 자괴감과 수치심은 미미르의 샘물을 한 모금이라도 마셔본 이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예리하기 지적하는 것이자 라스꼴리니꼬프와 동류라 할 수 있는 독자들이 기민하게 감지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 점은 카이지의 경솔함이나 자제심 부족이 연재를 이어나가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겠지요.
다만 도스토옙스키가 독자들과는 달리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이유라면... 도스토옙스키가 독자 및 작중의 인물들에게 목도시키고 싶은 것이 자연이 아니라 내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독자들이 일감으로 인지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죄목은 지적 허영이겠지만, 도스토옙스키의 관점에서는 세계에 대한 지적 접근 자체가 원죄겠지요. 독자들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물리적 왜소함을 관념 놀음 속에서 위장하고 스스로도 그것을 망각한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도스토옙스키에게 왜소함은 둘째 문제일 뿐이고 - 말씀대로 항구적인 삶의 조건이니까 - 진짜 문제는 그가 자신의 양심과 영혼을 대면하지 못하여 가치와 윤리에 맹목이 된 것이라 보았겠지요. 현대의 독자들이야 라스꼴리니꼬프가 현대적 가치관에 익숙해지면 혼자 이불킥 몇 번 하며 해결될 문제라고 5만원 상당의 즉심을 내리면 충분하겠지만, 라스꼴리니꼬프와 독자들을 구도시켜야 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입장에서는 양심이 행하는 고문의 형벌을 정교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겠죠. 이렇게 놓고 보면 슬라브주의자이자 정교회신자인 도스토예프스키와 유물론이 패시브로 내장되어 있는 현대 독자들의 관점의 차이가 근본적이다 싶네요.
그리고 제 문체가 왜영 ㅎㅎ 항상 포근하지 않았나 싶은데...솔까말 홍차넷에서 이런 소재 갖고 이야기할 때 저보다 나긋나긋한 유저 없지 않나연..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 좋아서 졸음이 계속 몰려오고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지라 머릿속에 잘 정리가 안 되긴 하는데 대충 끼적여보면 이래요.
물론 노예도덕이라는 점에서는 소렐이나 라스티냑 같은 인물 유형과 라스꼴리니꼬프가 다를 게 없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다를 게 없지 않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양자 자체의 차이를 전제하는 이야기니까요. 말씀대로 라스꼴리니꼬프는 반성적 사유가 있기에 즉물적인 대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궁구한다는 점에서 소렐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소렐의 허영이 세태와 교양이라면 라스꼴리니꼬프의 허영은 세계 그 자체라는 점에서 라스꼴리니꼬프가 상식적인 의미로는 더 고상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죠. 바로 그 점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라스꼴리니꼬프 쪽에 보다 조소(이것은 인력引力과 동전의 양면이겠죠.)를 짓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애초에 소렐은 지적 검토 없이 축생의 차원에서 살아가는 이고, 그러하기에 말씀대로 여과 없는 활기를 띠므로 독자 역시도 그에게 축생에게서 느끼는 수준의 천박함을 느낄 뿐이죠.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는 존재 근거를 이성에 의해 찾고, 사상이라는 사상누각을 축조하며 지적/인간적인 허영을 드러내는 식으로 보다 그럴듯한 우회로를 어떻게든 강구하여 세련된 기만을 행하려 하죠. 이 기만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허위의 밀도는 높아지고, 이는 독자에게 혐멸감을 유발시킬 수 있을 거에요. 물론 말씀대로 작품에서 라스꼴리니꼬프 같은 인물들을 묘사할 때에는 그네들의 허위와 자기기만이라는 범죄보다는 양심의 고문이라는 형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후자는 전자에 의해 스스로 부과되었다는 점에서 자업자득이고 자승자박이겠죠. 자신이 만든 관념체계, 곧 거대한 자기기만이 자신에게 멍에를 지우게 되니까요. 자신이 지탱할 수 없는, 내심의 내심으로는 자신 역시도 신뢰하지 않는 - 말씀을 빌리자면 애초부터 좌절된 - 허황된 이념에 도취될 때에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부과할 수밖에 없는 자괴감과 수치심은 미미르의 샘물을 한 모금이라도 마셔본 이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예리하기 지적하는 것이자 라스꼴리니꼬프와 동류라 할 수 있는 독자들이 기민하게 감지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 점은 카이지의 경솔함이나 자제심 부족이 연재를 이어나가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겠지요.
다만 도스토옙스키가 독자들과는 달리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이유라면... 도스토옙스키가 독자 및 작중의 인물들에게 목도시키고 싶은 것이 자연이 아니라 내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독자들이 일감으로 인지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죄목은 지적 허영이겠지만, 도스토옙스키의 관점에서는 세계에 대한 지적 접근 자체가 원죄겠지요. 독자들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물리적 왜소함을 관념 놀음 속에서 위장하고 스스로도 그것을 망각한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도스토옙스키에게 왜소함은 둘째 문제일 뿐이고 - 말씀대로 항구적인 삶의 조건이니까 - 진짜 문제는 그가 자신의 양심과 영혼을 대면하지 못하여 가치와 윤리에 맹목이 된 것이라 보았겠지요. 현대의 독자들이야 라스꼴리니꼬프가 현대적 가치관에 익숙해지면 혼자 이불킥 몇 번 하며 해결될 문제라고 5만원 상당의 즉심을 내리면 충분하겠지만, 라스꼴리니꼬프와 독자들을 구도시켜야 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입장에서는 양심이 행하는 고문의 형벌을 정교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겠죠. 이렇게 놓고 보면 슬라브주의자이자 정교회신자인 도스토예프스키와 유물론이 패시브로 내장되어 있는 현대 독자들의 관점의 차이가 근본적이다 싶네요.
그리고 제 문체가 왜영 ㅎㅎ 항상 포근하지 않았나 싶은데...솔까말 홍차넷에서 이런 소재 갖고 이야기할 때 저보다 나긋나긋한 유저 없지 않나연..
노노 나긋나긋은 아주 최근의 변화예요. 난 첨에 겁나서 말도 못 걸겠던데. 하지만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하지요 ㅋㅋ 홍차넷이 용자였군요.
오 카이지는 제가 처음 읽었을 때 정말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라는 생각을 했던 작품이에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사실 소설 작법을 배우기에 좋은 선생은 아니지요. 문체는 단순한데 지리멸렬하고, 몇 개의 선과 획을 사용해서 대상의 뚜렷한 윤곽과 명암을 드러내는 방식도 몰라요. 배경을 경제적으로 세팅하거나 플롯을 짜는 방법도 모르고, 오로지 거친 얼개로 구성된 무대 위에서 등장... 더 보기
오 카이지는 제가 처음 읽었을 때 정말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라는 생각을 했던 작품이에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사실 소설 작법을 배우기에 좋은 선생은 아니지요. 문체는 단순한데 지리멸렬하고, 몇 개의 선과 획을 사용해서 대상의 뚜렷한 윤곽과 명암을 드러내는 방식도 몰라요. 배경을 경제적으로 세팅하거나 플롯을 짜는 방법도 모르고, 오로지 거친 얼개로 구성된 무대 위에서 등장... 더 보기
노노 나긋나긋은 아주 최근의 변화예요. 난 첨에 겁나서 말도 못 걸겠던데. 하지만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하지요 ㅋㅋ 홍차넷이 용자였군요.
오 카이지는 제가 처음 읽었을 때 정말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라는 생각을 했던 작품이에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사실 소설 작법을 배우기에 좋은 선생은 아니지요. 문체는 단순한데 지리멸렬하고, 몇 개의 선과 획을 사용해서 대상의 뚜렷한 윤곽과 명암을 드러내는 방식도 몰라요. 배경을 경제적으로 세팅하거나 플롯을 짜는 방법도 모르고, 오로지 거친 얼개로 구성된 무대 위에서 등장인물들의 독백과 방백과 웅변만이 반복해서 울리고 있지요. 그의 소설은 정말로 연극에 가깝고 그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도 과잉된 인물들의 과잉된 열정이 서로 어긋나며 빚어내는 짧은 단막극 코메디를 보여줄 때지요. 죄와 벌에서도 그런 장면들을 여러 군데서 보았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남... 카이지에겐 도스토예프스키가 인물에게 부여했던 자기기만과 허위의 단층이 좀더 일상적이고 좀 덜 관념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곤 하고, 그 반복적이고 처절한 독백을 낳은 사유는 절박한 환경에서 급조되었고 아무런 출구도 비전도 없어 보이지만 오로지 바로 여기서 생각, 생각하는 것만이 자신의 살 길인 것처럼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어요. 그리고 뭐... 도스토예프스키도 작품 분량을 늘리기 위해 무리수를 많이 썼지요.
사실 어렸을 때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을 때는 라스콜-이반-키릴로프 라인이 너무 충격적으로 멋있어 보였고 반복적인 독서에서 그걸 재확인하곤 했지요. 인간에게서 모멸감과 열등감을 읽는 방식, 어떤 순간에 어떤 자의식을 갖도록 훈련하는 방식 같은 것을 많이 배웠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선 역시 드미트리 카라마조프가 좋더군요. 그렇다고 해도 그 작은 악마 같은 인물들이 독자들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잘 하지 못했어요. 아... 세대차이인가?
오 카이지는 제가 처음 읽었을 때 정말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라는 생각을 했던 작품이에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사실 소설 작법을 배우기에 좋은 선생은 아니지요. 문체는 단순한데 지리멸렬하고, 몇 개의 선과 획을 사용해서 대상의 뚜렷한 윤곽과 명암을 드러내는 방식도 몰라요. 배경을 경제적으로 세팅하거나 플롯을 짜는 방법도 모르고, 오로지 거친 얼개로 구성된 무대 위에서 등장인물들의 독백과 방백과 웅변만이 반복해서 울리고 있지요. 그의 소설은 정말로 연극에 가깝고 그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도 과잉된 인물들의 과잉된 열정이 서로 어긋나며 빚어내는 짧은 단막극 코메디를 보여줄 때지요. 죄와 벌에서도 그런 장면들을 여러 군데서 보았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남... 카이지에겐 도스토예프스키가 인물에게 부여했던 자기기만과 허위의 단층이 좀더 일상적이고 좀 덜 관념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곤 하고, 그 반복적이고 처절한 독백을 낳은 사유는 절박한 환경에서 급조되었고 아무런 출구도 비전도 없어 보이지만 오로지 바로 여기서 생각, 생각하는 것만이 자신의 살 길인 것처럼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어요. 그리고 뭐... 도스토예프스키도 작품 분량을 늘리기 위해 무리수를 많이 썼지요.
사실 어렸을 때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을 때는 라스콜-이반-키릴로프 라인이 너무 충격적으로 멋있어 보였고 반복적인 독서에서 그걸 재확인하곤 했지요. 인간에게서 모멸감과 열등감을 읽는 방식, 어떤 순간에 어떤 자의식을 갖도록 훈련하는 방식 같은 것을 많이 배웠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선 역시 드미트리 카라마조프가 좋더군요. 그렇다고 해도 그 작은 악마 같은 인물들이 독자들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잘 하지 못했어요. 아... 세대차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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