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3/27 07:20:48
Name   틸트
Subject   옆집에는 목련이며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옆집에는 목련이며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나무와 덤불의 부피에 밀려 골목으로 기울어진 옆집의 벽은 어느 날 풀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동네 주민 몇이 항의했지만 옆집의 노인은 벽을 수리하지 않았다. 벽이 무너지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그가 무너지는 게 먼저일까. 그런 생각을 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기에 너무 늙었다. 옆집 벽이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려보려고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동네 꼬맹이었던 나는 동네 꼬맹이들과 가끔 벽을 밀어댔다. 동네에서 유행하던 장난 중 하나였다. 기울어진 벽은 꼬맹이 몇 명이 미는 힘에도 흔들거리고는 했다. 니들 그러다 벽에 깔리면 죽어, 라고 동네 어르신들이 말했던 것 같다. 벽을 밀고 있자면 벽에 몸을 기댄 장미의 빠알간 대가리가 너울거렸다. 언젠가 그 집에 들어간 나는 너무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뻔했다. 장미며 목련이 흐드러진 아래로 새파란 이파리들이 빼곡했고 빼곡한 이파리들은 햇빛을 거의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한낮의 마당은 황혼처럼 어두웠다. 나무가지 같은 얼굴색을 한 옆집의 노인은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장면들이 생생히 기억난다는 건 거짓말이다. 나는 그가 웃었는지 혹은 얼굴을 찡그렸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가 웃어도 무서웠을 것이며 그가 얼굴을 찡그려도 무서웠을 것이고 나는 그의 얼굴을 무섭고 기괴하다고 기억한다.

노인의 이름은 문학. 이었다. 김문학. 글 문자에 배울 학. 어린 나도 읽을 수 있던 한자로 된 명패가 그의 집 앞에 붙어있었다. 동네 노인들은 그가 글줄 깨나 배운 사람이었다고 말하고는 했다. 골목의 한쪽 끝은 글줄 좀 배웠다는 김문학 노인이 사는 집이었고 골목의 한쪽 끝은 거지같은 동네에서 그나마 돈 좀 쓰고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이 가던 보신탕집이었다. 세계의 한쪽 끝과 다른 한쪽 끝의 명확한 대비.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흥미로운 혹은 뻔한 대비인 것 같아 보인다. 골목이 우주를. 우주가 골목을.
노인들은 약간의 경멸과 안쓰러움을 담아서 그가 글줄 깨나 배운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모를 일이다. 그가 실패한 관료인지, 문인인지, 실패한 사업가인지, 실패한 혁명가인지. 그가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글줄 깨나 배운 사람, 이라는 표현은 실패한 사람을 칭할 때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닌가. 기괴한 집에서 기괴한 표정을 짓고 사는 사람이란 역시 어딘가 실패한 사람이라는 암시를 준다. 하지만 장미나 목련이 흐드러진 마당이 딸린 집에서 어딘가 실패한 것 같은 인생을 찬찬히 곰씹는 노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삶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어딘가에 실패했기에 그런 부러운 삶을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의 삶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죽음을 기억한다.

어느 날 그가 죽었다. 골목이 끝나고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는 자리에 추어탕집이 있었다. 김문학 씨는 아무렇게나 차를 댄 추어탕집의 어느 손님에게 분개했다. 하루에 서너 번 일어나는 지긋지긋한 드잡이가 또 벌어졌고 그러다가 그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So it goes. 어쩌면 별 일 아니었다. 무너질 벽은 무너지고 갈 사람은 간다. 정말 별 일 없이 그의 죽음이 정리되었다. 그의 집 명패가 바뀌었지만 내가 읽을 수 없는 복잡한 한자였기에 김문학 씨의 아들 이름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김문학 씨와 드잡이를 한 사람이 탄 차를 기억한다. 기다란 지프였다. 아니, 요즘 말로는 SUV겠구나. 그때는 지프차라고 불렀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무너졌다. 일종의 자연사였다. 신문에 나오지도 않고 경찰도 더는 오지 않았다. 자연사는 흔한 일이다. 반대편 옆집의 아저씨는 아줌마를 찔러 죽였는데 역시 그 시절의 그 동네에서는 일종의 자연사였던 것 같다.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오래지 않아 추어탕집은 망했고, 보신탕집은 그 전에 망했다.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람은 죽고 추어탕집은 망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장미와 목력이 흐드러진다. 담장 너머로 새빨간 성기를 까딱거리던 그 장미들은 올해에도 피어나겠지. 벽은 지금쯤 무너졌을까?

추어탕이 먹고 싶은데, 라는 생각을 하다가 옛 동네가 떠올랐고 그러다 김문학씨가 떠올랐다. 목련도 장미도 아직 피지 않은 계절이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목련도 장미도 피어날 계절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시절이지만. 그래도 김문학씨가 떠올랐고, 쓴다.



-

저녁부터 이유없이 추어탕이 땡기는데 배는 고프고 가끔 시켜먹는 24시간 중국집은 업장 사정으로 배달을 안 하고 밥을 해먹기는 귀찮고 덕분에 막걸리로 배채우고 자려다가 잠이 안와서 손과 이미지가 떠오르는 대로 씁니다. 픽션입니다.



8
  • 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282 게임e스포츠 분석 전문 사이트 <eSports Pub>을 소개합니다. 12 그대지킴이 17/03/24 3846 1
5283 사회화장실을 엿본 그는 왜 무죄판결을 받았나 13 烏鳳 17/03/24 5658 27
5284 일상/생각딸기 케이크의 추억 54 열대어 17/03/24 4987 19
5285 과학/기술명왕성이 행성 지위를 상실한 이유와 복귀 가능성 15 곰곰이 17/03/24 7912 13
5286 스포츠170324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박병호 1타점 적시타) 김치찌개 17/03/25 2762 0
5287 기타오래 전 이니그마를 듣다가 9 왈츠 17/03/25 4650 2
5288 비밀글입니다 39 三公 17/03/25 1104 2
5289 사회페다고지와 안드라고지 사이 13 호라타래 17/03/25 11528 6
5290 일상/생각케이크를 즐기는 남자들. 17 숲과바위그리고선 17/03/25 3703 1
5291 일상/생각차 사자 마자 지옥의 (고속)도로연수 47 SCV 17/03/26 4699 3
5293 기타[오피셜] 스타크래프트1 리마스터.jpg 28 김치찌개 17/03/26 5067 7
5294 IT/컴퓨터앱등이의 G6 사용기 14 1일3똥 17/03/26 6157 0
5296 일상/생각고양이를 길렀다. (1) 5 도요 17/03/26 2859 2
5297 요리/음식애슐리 딸기 시즌 간단평 : 빛 좋은 개살구 7 고난 17/03/26 4585 1
5298 스포츠170326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황재균 9회 끝내기 안타) 2 김치찌개 17/03/26 3427 0
5299 창작옆집에는 목련이며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5 틸트 17/03/27 3585 8
5300 철학/종교지능과 AI, 그리고 동서양의 차이일 법한 것 35 은머리 17/03/27 6408 5
5301 일상/생각쪽지가 도착했습니다. 36 tannenbaum 17/03/27 4503 24
5302 IT/컴퓨터효율적인 일정관리 GTD(Getting Things Done)와 wunderlist 11 기쁨평안 17/03/27 7417 3
5303 경제대형온라인 커뮤니티와 긍정적 정보 19 난커피가더좋아 17/03/27 5622 10
5304 기타2017 핫식스 GSL 시즌1 코드S 결승전 우승 "김대엽" 1 김치찌개 17/03/27 3120 2
5305 영화미녀와 야수 약간 좀 아쉬운 (뒷북)(스포) 5 우주견공 17/03/27 3562 0
5306 스포츠170328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황재균 스프링캠프 5호 2점 홈런) 3 김치찌개 17/03/28 3337 1
5307 기타 1 The Last of Us 17/03/28 3441 1
5309 일상/생각부쉬 드 노엘 17 소라게 17/03/28 4457 2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