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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06/19 01:04:27 |
Name | 알료사 |
Subject | 여사님을 소개합니다 (스압, 일기장류 징징글. 영양가X 뒤로가기 추천) |
이야기를 두괄식으로 해야할지 미괄식으로 해야할지 고민했어요 평소에 미괄식으로 많이 이야기하는데 결정적인 정보를 마지막에 얻고는 '낚였다'라는 느낌을 받는 분들이 적지 않더라구요 이번에 하는 이야기에서까지 그런 뉘앙스가 되면 이 이야기를 듣는 분들께도,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에게도 너무 죄송할거 같아서요 '그냥 시간의 흐름대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자' 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미괄식하고 똑같잖아.. 라는 생각도 들지만 최소한 의도적인건 아니니까요..) '눈먼 자들의 국가' 라는 책이 있는데요 세월호 참사 이후 계간지 문학동네에 국내 작가들이 게재한 글들을 묶어놓은 책이에요 저는 단행본이 나오기 전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일부를 읽어 보았는데 많이 슬프면서도 한편으로 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어요 '와.. 되게 글 잘쓰네.. 이런게 작가구나..' 하는 느낌 때문에 찝찝했는데요 글 잘쓴다는 느낌이 왜 찝찝한거지? 싶으실거에요 제가 많이 꼬인 놈이라 그런 생각이 드는거 같긴 한데 불행했던 일을 떡밥삼아 서로가 본인의 장기를 맘껏 펼쳐놓는 듯한 느낌 때문에요.. 슬픈 일은 가만히 혼자 가슴에 묻고 삭여야 하고 그 이외에 슬픔의 표현은 다 위선적이라는 사고방식일까요? 이쯤되면 저도 중증이죠.. 더 찝찝했던건 제가 그 글들을 읽으며 느끼는 슬픔이나 기타 여러 감정들을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그것처럼 소비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하려는 이 이야기도 그런 성격이 있는거 아닌가 걱정되는데 그래도 그냥 하고 싶어요 그냥 '내가 이런이런 사람을 알고 지냈는데 말이야 ...' 하고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듯 홍차넷 여러분들께 여사님을 소개하고 싶어요 지금의 저를 제가 다니는 직장에 있게 한 친구는 고등학교 때 만났어요 같은 반도 같은 학교도 아니었어요 친구의 친구였는데 오락실에서 철권을 할 때 옆에서 얼굴만 보고 게임하는 모습만 보는 사이었어요 대화도 없었어요 게임을 오래 해보고 게이머를 많이 만나본 분들은 아실거에요 게임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가가 대충 보여요 저는 친구의 플레이를 보고 그 친구가 좋아졌고 나중에 이야기한 거지만 친구도 제 플레이를 보고 제가 좋았대요 그렇게 서로 말도 안하고 오락실에서, 게임방에서 막연한 호감만을 가지고 보낸 세월이 한 2년 정도 되어요 본격적으로 친해진건 친구가 군대를 가서 휴가 나왔을때 가진 술자리에서였어요 저보다 더 친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마실 때가 많았지만 그때는 어쩐지 다른 친구들이 모두 바빠 단 둘이 마시게 되었어요 그 나이때에 흔히 그러듯이 되도 않는 개똥철학들을 서로 늘어놓으며 겉멋 잔뜩 들어간 대화를 나누면서 의기투합을 했는데 그런 대화들에 으례 인용되기 마련인 여러 명언들과 명대사들, 명 글귀들 중에 내가 저 아이와 오래 떨어지기 힘들것 같다는 예감을 갖게 한 구절이 있었어요 폐간된지 오래인 어떤 게임잡지 기자 정태룡이라는 사람의 말이었어요 "좁은 천당길 구태여 가느니 활개치며 지옥길을 가겠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에 대한 냉소적인 반항 같기도 했지만 꼭 성경과 예수의 말을 모르더라도 어린 시절의 우리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노력'을 강요당했고 우리 또래에서는 그것에 반발하는 것이,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거의 젊음의 신성한 의무인 동시에 권리였어요 어려서 뭘 몰라서였을까요, 그때는 그랬어요 좁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우리를 몰아대는 어른들이 싫었어요 우리는 좁은 천당길을 보장해 준다 해도 그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지옥길로 향하고 싶었어요 지금 돌아보니 우스워요 헬조선이라는 유행어가 생긴 세상을 살게 될줄은 몰랐어요 20대 중반이 넘어섰을 때 이미 저는 정태룡의 인용구에 대해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있었어요 '지옥길을 활개치며 갈 수 있는 사람은 어차피 좁은 천당길도 갈 수 있어서 굳이 지옥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지옥길 가겠다며 땡깡부리는건 지옥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서보다는 천당길을 가기 위한 노력을 회피하기 위해서인 심리가 더 크다' 라고요. 그리고 제가 원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제가 걸어야 했던 길은 지옥길이었고 말은 안 했지만 그리고 마음속으로 인정도 하기 싫었지만 제가 살기 위해 취해왔던 행동들은 천당길을 구걸하는, 이젠 지옥길 너무 힘드니까 벗어나고 싶다는 발버둥이었어요 철없던 시절의 객기를 철회하고 열심히 갑들에게 헤헤거리며 굽신거리며 노오력을 하며 살아온 결과 나이 40을 몇년 앞두게 된 지금 아직은 지옥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옥쯤에는 가까워지지 않았나 싶은, 덜 고통스러운 지옥으로 피신하지 않았나 안도했어요 그래놓고는 그 객기의 철회를 두고 그것이 나의 성장이었다고 그렇게 어른이 된 거라고 스스로 대견해하곤 했어요 그런데 가끔씩 마음 한구석에서 그런 제 자신을 꾸짖고 비웃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고 한탄하는 눈초리가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술에 취했을 때나 새벽에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상한 감정에 빠져 이전의 패기를 되찾고 싶다고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놀라요 문제는 멀쩡한 정신일때 그런 객기가 샘솟는 경우에요 2015년 가을이었어요 저는 야간에 일하는데 주간에 일하는 동료 여직원이 "선물이에요" 라면서 약간 구겨진 쇼핑백을 내밀었어요 선물이라면서 죽은 벌레라든가 (-_-) 자질구레한 잔업을 건네는 장난을 몇번 당해보았던 저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쇼핑백과 여직원을 번갈아 쳐다보았어요 미소 띈 얼굴이 역시 수상했어요 "어서 받아요, 선물이라니까" 그렇게 재촉하다가 구겨진 쇼핑백 때문에 내가 마음에 안들어한다고 추측했던건지 약간 미안한 목소리로 덧붙였어요 "저... 포장을 못했어요... 쇼핑백은 가방에 넣어 오다보니 좀 구겨졌네요..." 그제서야 장난이 아닌거 같은 느낌에 쇼핑백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어요 스웨터였어요 "어... 음... " "며칠 후에 생일이잖아요. 나 내일하고 모래 쉬고 월요일부터는 바빠서 준비 못할거 같아서 미리 주는 거에요. 비싼건 못샀어요" 입사 1년 6개월차, 저보다 한살 연상, 당시 큰아이가 중1, 작은아이가 초등5학년이었던 기혼녀 중요한건 예뻤어요 (지금 시점에서는 그분의 장점 중 가장 하찮은 것이었다는걸 알았지만요..) 네.. 여사님이에요.. 우리 직장 사람들이 애칭으로 여사님, 여사님 하고 불렀어요 저는 세상의 모든 예쁜 여성을 좋아합니다 물론 속으로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여사님도 좋아했어요 여사님은 처음 본 순간은 매력적인 이성이었어요 1년 6개월 같이 일하다보니 성실하고 능력있고 든든한 동료로써 재평가하게 되었는데 스웨터를 받는 순간 그 재평가가 싸그리 리셋되고 <헐 나 여자사람한테 선물받음>이 됐어요 갑자기 표정관리가 안되서 일 바쁜척 모니터만 쳐다보면서 "아, 고맙습니다" 라고 건조하게 말했다가 상대방의 정성에 비해 너무 무성의한거 같기도 하고 이러는게 더 속마음 읽히는거 아닌가 싶어서 "앞으로 이 옷만 입고 다닐거에요 ㅋㅋㅋ"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어요 2015년 3월 (애고고...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버렸네요... ㅜㅠ 몇개월정도는 봐주세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정태룡의 말을 인용했던 친구와의 인연으로 지금의 직장에 들어온지 8년 정도, 무얼 하든 일의 성격은 비슷했지만 저는 항상 편한 곳에 있으려 했어요 어느 직장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어려운 일을 맡는다는건 짐이기도 하지만 기회이기도 하고 인정받음이기도 할거라고 생각해요 처음 2~3년 동안 제가 그런 기회들을 사양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마음 착한 저의 양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 대신 그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제게 고마워했고 여건이 되면 다시 그 기회를 저에게 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똑같은 양보가 몇년씩 계속되고 제가 그 이유를(제가 편해서일 뿐이라고) 노래부르듯 되풀이해 주장하자 드디어 사람들은 정말로 제가 편하고 싶어서 그 일을 피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다른 이유로 저에게 기회를 받아들이라 압박했어요 <그동안 편하게 일했잔아. 이젠 해줄 때가 됐어> <저 이번에 그 일 맡았다가 적응 못하면 그만둘 수밖에 없어요. 저 짜르실 생각이세요?> <너 그런 사람 아닌거 알아> (그런 사람 맞다구요... ㅜㅠ 왜 말을 하면 믿지를 않아... 사표 내면 그때 믿을거냐구...) 자신이 없었지만 몇년 동안 월급도둑질을 해왔던게 너무 찔렸던 터라 마지못해 수락했는데 그 수락의 이유에는 <여사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어요... 예뻤으니까요... 정말 저라는 짐승은 왜 이렇게밖에 생겨먹지 못한 걸까요... 억지로 수락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제시받은 일을 시작하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저를 분발시켰어요... (정말 알 수 없냐? -_-) 저는 항상 찌들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저보고 표정이 밝아졌다고 말했어요 몇달 지나니까 걱정했던 것보다 일도 할만했어요 월급도둑질 하던 세월들도 짬은 짬이었었나 봐요 그래서 사표는 안내도 되겠구나 생각하고 있던 참에... 한 두어 계단 정도 위에 있던 상사가 퇴사를 했고 그 빈자리를 밑에서 한칸씩 올려 메꾸다보니 (경력자를 새로 뽑기를 바랬지만 이놈의 짠돌이 회사가 쓰던놈 키워서 쓰자는 주의라서요...) 저까지 그 짐의 일부가 지워지게 되었어요 모두들 잘됐다고 했어요 사람 좋아 항상 양보만 하던 니가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하며 말했어요 지옥길을 가고 싶다는 예전의 패기가 반의 반의 반만 있었어도 저도 그것을 빛이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하필이면 그때 안좋은 일이 몇번 터지고 여러가지로 복잡한 사정이 있긴 했는데 근본적인 이유는 그거였어요 이제 지옥길 가는거 지쳤어... 사표를 냈고, 수리되지 않았어요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줄은 몰랐다, 원치 않은 일을 강요해서 미안했다, 그냥 원래 하던 일 계속 해줘> 라네요... 그렇게 또 양보하고 말았어요 아니, 도망치고 말았어요 제가 도망친 그 일에 대해서는 두 명이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자연히 과부하가 걸렸어요 그 과부하는 <여사님>이 대부분 감당했어요 과연 <매력적인 이성> 에서 <든든한 동료>로 재평가받을만한 인물이었어요 <든든한 동료>일수록 날개를 달고 비상하는 직장도 있고, <든든한 동료>일수록 온갖 궂은 일을 떠맡게 되는 직장도 있는데 불행히도 저희 직장은 후자였어요 아랫사람이 해도 될 일까지 꼼꼼하게 자기가 챙기는 <여사님>의 성격까지 겹쳐 그 <든든한 동료>도 점차 지쳐 갔어요 제 자신의 도피도 여사님을 지치게 만드는 원인중 하나라는 생각에 회식자리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어요 "난 솔직히 여사님이 그만 두셨으면 좋겠어요. 이런 곳에서 고생하는거 지켜보기 힘드네요." 이런 뻔뻔스러움 보세요 남편이 잘 벌기도 하고, 그동안의 사적인 대화에서 어느정도 여유 있는 가정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이었어요 (지금은 아니었다는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다른 직원들이 화장실을 가고 담배를 피러 가고 어쨌든 둘만 앉아있게 되었을 때 여사님이 재빨리 말했어요 "혼자만 알고 계세요. 우리 신랑 백수됐어요 ㅋ 나 일 그만 못둬." 언젠가 찾아왔던 중학생 큰아들과 초등학교 고학년 딸이 떠올랐어요 아들이 일등을 했다며 좋아하던 여사님도 아들이 태권도 같은거 하고 싶어한다고 말할 때마다 다 돈드는 일이라 겁부터 난다고, 그래도 하고 싶은걸 못하게 할수도 없다고 푸념하던 여사님도 여사님이 <든든한 동료>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거에요 지쳐 가도 저처럼 도망치지 못하는 이유가 스웨터를 받고 제가 어버버 하고 있을때 여사님이 한마디 건넸어요 "고생했잖아 ㅎ" (저를 괴롭히고 싶은 거죠 그러도 저는 그대로에요 계속 도망다닐 거에요 스웨터는 정말로 보란듯이 입고 다닐거지만) 저는 여사님을 좋아했지만 절대 <그런 관계>는 아니었어요 <그런 관계>가 뭐냐고요? 글쎄... 아무튼 아니었어요 저는 여사님께 밥을 먹자거나 커피를 마시자거나 한적도 없고 심지어 전화번호도 저장되어 있지 않았어요 (물론 외우고는 있었지만 -_-) 당연히 카톡친구도 아니었구요 2015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브 송별회 비슷하게 회식을 했어요 1차 횟집 2차 맥주집 3차 노래방으로 참석인원이 12명 8명 5명으로 줄어드는 동안 계속 여사님하고는 떨어진 자리었어요 노래방 가서도 저는 처음에 분위기 안깨려고 두어곡 꽥꽥대고 나서는 자리에 앉아서 맥주만 홀짝이고 있었어요 시간 거의 다 됐을 때쯤 여사님이 왜 그러고 앉았냐면서 손을 잡아 끌었어요 <음주>는 대충 주는대로 받아 마셔도 <가무>는 꽤 피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지 않아서 취한척 힘든척 하면서 (실제로 많이 취하기도 했어요) 의자쪽으로 넘어져서 다시 앉았어요 여사님도 포기하고 옆에 앉아서 소음을 뚫어내려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뭐라뭐라 막 하는데 여사님이 횡설수설을 한건지 제가 취해서 잘 못알아들은건지 전혀 맥락을 모르겠고 '우리는 가족이다' '알료사씨 어머니는 내 어머니다' 대충 이 두가지를 열심히 강조했던거 같은데 가족이라는거는 흔히 '가족같이 일한다'는 표현 많이 하니까 그런가보다 싶은데 어머니 얘기는 뜬금없이 왜 하는지도 이해가 안갔고 제가 가정사를 말해준 적이 없는데 누군가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는지 의문이었어요 그런데 사람이 이상한게 그렇게 취한 상태에서 이해도 안되는 말을 들으면서 그냥 이 사람이 뭔가 나를 되게 위해주고 있다는 그런 느낌으로 고마워지고 또 그런 뭐냐.. 너무 고마워지면 괜히 비감에 젖고 이런 심리 있잖아요.. 귀로만 들으면서 눈은 노래방 화면 쳐다보고 있고 손은 힘주어 잡고 있고... 금방 시간이 쫑나서 밖으로 나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명랑하게 귀가한 것이 그날의 마무리었어요 그해 크리스마스, 그 다음해 크리스마스에 여사님은 정신병원에 입원중인 <울 엄마>한테 주는 선물이라며 목도리랑 가디건을 주었어요 <울 엄마>는 그사람이 누구냐, 여자친구냐, 물으면서 매번 안부를 물어요 그때마다 저는 응 여자친구아냐~ 아들이 중학생이야~ 꿈깨 나 결혼안해 ~ 하고 말죠 5일후 28일, 정식 회식은 아니고 그냥 일하는 사람들 중에 가까이 지내는 4명이 밥을 먹었는데 (당연히 술도...) 그 4명에 여사님도 있었고 그날도 좀 술이 됐어요 "처음에 입사했을때 알료사씨는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사나 싶었어요. 말도 잘 안하고 감정표현도 안하고..." 신부님 해야 되는거 아니냐는 농담이 나오고.. 저는 절이라면 생각해 본 적 있다고 받고... "구직사이트 보니까 강원도나 경상도 산골에 절 같은데서 청소나 좀 하면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잡비 일이십만원 주는곳 있는데 거기 가고 싶었다" 라니까, 여사님이 "나도 따라갈테야 ! ㅋㅋㅋㅋ" 그래서 나머지 두명이 "뭐야 ㅅㅂ 부러운새끼 ㅋㅋㅋㅋㅋ " 뭐 그런 분위기가 돼서 장난이래도 기분이 되게 좋았어요 (지금은 여사님이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들딸 대학 졸업시키고 나면 시골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는걸 알았어요) 작년 여사님 생일때 라이언인형을 선물했어요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고맙다고 눈물 글썽거리면서 꼭 껴안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고 다른 직원들도 부러워하고 그래서 저도 기뻤어요 시간이 흐르다 보니 여사님은 이달의 우수사원이 되고, 진급이 되고, 이런저런 모범 케이스로 특별수당도 받고 그랬습니다 날개를 달고 비상하진 못했지만 워낙에 계속해서 구멍이 생기는 직장에서 초인적인 자기희생으로 이리막고 저리때우는 시간이 누적되다보니 인정을 받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더라구요... 사표를 쓰려던 타 부서장에게 여사님이 편지를 써서 마음을 돌려먹게 하고 나중에 감사인사를 받는 일이 생기기도 했고 정말이지 무슨 이런 일까지 해? 그런 것까지 해야돼? 하는 정도로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여사님은 점점 슈퍼스타로 자리잡아갔어요 말을 다시 해야겠네요 비상하고 있었어요... 여사님은 날개 없이 비상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여사님과 조금씩 투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제가 여사님을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 괴롭힘이 제가 여사님을 위하는 마음이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여사님이 모든 짐을 떠안고 가는 상황에 화가 났고 그걸 개선하려고 열을 내는 과정에서 약간의 불똥을 여사님에게 튀겼을 뿐이라고...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저는 여사님을 시기했었고 제가 도망쳤던 위치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고 있는 여사님을 볼때마다 저 자신의 용기없음과 불성실함이 발가벗겨져 드러나는것 같아서 신경질이 났던 거에요 여사님은 자기가 맡은 일에 관련해서 끊임없이 공부했어요 무슨 유료 사이트 같은곳에 자비로 가입해서 정보도 얻고 관련 기관에 전화해서 자문도 얻고... 저는 근무시간에 열심히 홍차넷 하고 퇴근하면 열심히 스타했고요 점점 일하면서 차이가 보였어요 우연히 제가 무얼 잘못하는걸 여사님이 보게 되고, 옆에서 <어라 그건 그게 아니지 않아요?> 하면서 정정해 주는 상황이 잦아졌어요 그리고 제가 100% 잘못하는게 아니더라도,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저와 여사님이 의견이 갈리면 주변 동료들에게 확고한 신뢰를 얻고 있는 여사님의 의견대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럼 저는 또 불퉁댔죠 그러면서도 제가 생각해도 제가 한심해서 여사님께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점점 자신감이 없어진다, 여사님 보면서 자존심 상할 때도 많은데 다 내 잘못이다, 열심히 할테니까 버리지 말고 많이 가르쳐 달라, 그러니까 그때부터 여사님은 제가 아주 작은 일만 해결해도 와 ~ 멋있어~ 나는 못하는건데~ 와 ~ 이걸 이렇게 해요? 역시 알료사씨야 ! 이런 식으로 추켜세웠어요... 뭐지 이사람... 이건 뭐 내가 코딱지를 파도 멋있다고 할거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리고 제가 잘못하는거 보고 있으면서도 모두 모른척 넘어갔어요 저는 제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혼자 알거나 다른 사람 통해서 알게 된 이후에 여사님이 눈감아 줬다는걸 깨달았구요 이제는 반대로 화가 났어요 무슨 ㅅㅂ 사람 애 취급하는건가 하구요 ( 애 맞잖아... 개유치하잖아 너 지금...) 그래서 회식때 사람 바본줄 아냐고 잘못한거 있으면 지적하라고 여사님을 타박했어요 (적반하장 오지구요...) 저의 그 두가지 징징거림이 반복되었고 이 말도 안되는 진상짓을 계속 감싸 주던 여사님도 결국은 짜증을 내게 되었죠 (최소한의 정당한 항의였어요) 그렇게 여사님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데 어느날 한 신입사원을 제가 크게 갈궈서 그만두게 만드는 일이 생겼어요 사소한 실수였고 저의 오해도 겹쳤는데 제가 신입사원을 갈구는 과정에서 이미 오해라는걸 깨달았으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치달아서 결국 신입사원이 사표를 냈습니다 그날 다른 동료직원이 상을 당해 퇴근후 6인승 벤에 모두가 같이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어요 30분 정도 걸리는 차 안에서 무안한 정적을 제가 깨며 말했어요 신입사원아 아까 너가 잘못한거 아니야 내가 오해했어 감정적으로 사표 낸거면 다시 생각해 보고 그만둘 마음 변함 없으면 너가 잘못했다는 생각 가지지 말고 다른곳 가서 여기서처럼 잘 하면 돼... 뭐 이런 식으로 사과 반 격려 반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사님이 제 말을 자르고 들면서 신입사원을 꾸짖었어요 "일의 잘잘못을 떠나서 너 태도가 그게 뭐야 선배가 말하는데 어디서 대들어" 류의 전형적인 꼰대식 잔소리로 시작해서 그 신입사원의 과거 잘못을 모조리 끄집어내서 정말 꼰대 대마왕적인 면모를 보여줬는데 절대 여사님이 그런 스타일 아닌거 아는 저는 또 나 감싼다고 오버하는구나 싶어서 화가 (도대체 왜?) 났어요... 왜 그랬을까요 왜 자꾸 화가 났을까요 그렇게 저한테 잘해주는데 아무튼 그렇게 신입사원이 그만뒀는데 이 이야기의 종결로 접어드는 파격적인 인사가 단행되었어요 여사님보다 상사로 있는 분을 그 신입사원 자리로 보내고 여사님이 그 상사의 위치에 가게 되었습니다 ㄷㄷㄷ 이런걸 누가 받아들이겠냐 싶겠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여사님의 위상은 확고했어요 이번만큼은 여사님도 부담이 컸었던 모양이에요 저와의 투닥거림에서 <최소한의 항의>가 점점 커져 갔어요 (그래도 여전히 최소한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저는 그 최소한의 항의에 대해 그 몇 배의 앙칼짐과 모짊을 더해 받아쳤어요 어느날 또 히스테릭한 제가 다른 부서와 다투고 있는데 여사님이 무슨 일이냐며 끼어들었어요 저는 무시하고 계속 싸웠어요 여사님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더니 '아 그건 이러이러해서... ' 라면서 저에게 충고하려 했어요 제가 여사님은 가라고 했어요 여사님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옆에서 조언을 했고 제가 정신차리고 보니 다른 부서에 내야 할 화를 여사님에게 내고 있었어요 여사님도 드디어 폭발했어요 처음으로 저에게 목소리를 높여 대항했어요 아차 싶은 저는 수그러들며 말했어요 "여사님... 제발 부탁이에요.. 여사님한테 화내고 싶지 않아요... 제발 가주세요..." "벌써 화 다 냈잖아 !! 왜 그래 너 정말 !! 나한테 왜 그러냐고 !!! " "그러니까 처음부터 제가 가라고 했잖아요" "가긴 뭘 가! 일은 제대로 해야지 ! " 그때 여사님한테 급한 전화가 왔고 여사님은 "그거 이러이러한 거니까 이리이리 해요"라고 마무리짓고 자리를 떴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 야간 일을 마치고 다른 볼일 때문에 직장 근처 역전 거리를 지나던 저는 여사님과 마주쳤어요 "여긴 어쩐일이에요.. 밥 안먹어요?" (점심시간이었어요)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나왔어요. 어디 가요?" "아... 그냥 좀... " "급하지 않으면 저랑 좀 걸어요" "네..." 거리가 언덕 경사로였어요 "나 요새 너무 힘들어... 인생이 이런 언덕길 올라가는것 같아..." "여사님도 아시다시피... 이 직장 떠나지 않으면 내리막은.. 아니 평지도 없어요... 다른 좋은 곳 가세요" "안그래도 저번에 다른곳 면접 봤는데... 안 됐어. 아마 나이 많아서 그랬나봐" "여사님 나 궁금한거 있는데... 여사님한테 뭐라 하는거 아니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거에요. 저번에 제가 가라고 했는데 왜 안갔어요" "몰라 나도 그날 뭐에 씌인것 같아... 동생이 교통사고 났는데.. 다리가.. 불구 될수도 있대.. 내 정신이 아니었어" (이런 개 신발.... 나는 무슨 짓을 한거야... ) "나 들어갈께" "여사님" "응?"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 잘할께요." "내가 챙겨주고 싶은데... 내 앞가림 하느라 정신이 없네.. 솔직히 힘들어.. 너도 좀만 내려놓자.. 도와 줘.. " "네" 제가 반성하고 바꼈을까요? 지 버릇 개 못줬어요 맨날맨날 여사님을 괴롭혔고 여사님의 최소한의 항의에 분노 (니가 왜 분노해...) 한 저는 급기야 여사님을 쌩까기 시작했어요 쳐다도 안보고 인사도 안하고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한거에요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여사님에게 화내지 않기 위해 내가 결단을 내린거야> 라는 어처구니없는 자기합리화를 시키고 있었어요 제가 출근해서 제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여사님 자리를 꼭 거치게 되어 있는데 쌩 하고 지나가는 저에게 여사님은 꼬박꼬박 인사를 했고 헤어질 때도 여사님은 수고하세요~ 저 가요~ 하고 꼭 인사했는데 저는 본척도 안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무슨 여자가 자존심도 없냐 이렇게 개무시 당하면서 왜 자꾸 인사하는거야> 미친 놈이죠 그러면서 화가 났어요 (그러니까 니가 왜 화를 내냐고...화내야 할 사람이 누구냐고...) 지금까지 뒤로가기 안누르고 읽어오신 할일없는 분들 계신가요 이제 끝이에요... 2017년 6월 14일 새벽 여사님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여사님이 교통사고를 당했대요 두개내 출혈이 있어서 수술 해야할 수도 있다고 2017년 6월 14일 오전 남편과 친분이 있는 지인으로부터 들었어요 수술할 정도는 아니래요 중환자실에 있는데 며칠 후 일반병실로 옮길거래요 한숨 돌렸어요 2017년 6월 15일 오후 머리쪽은 괜찮은데 소장 파열 때문에 수술 마쳤고 중환자실에 있대요 일반병실 옮기면 같이 면회 가쟤요 생명에는 지장 없대요 2017년 6월 16일 여친? 이라고 해야 하나.. 몇달 전에 홍차넷에 썸타다 쫑났다고 글썼었는데... 그 글쓴 날로부터 일주일 후부터 지금까지 다시 만나고 있어요 그냥 여친이라고 할께요 아무튼 여친이 간호조무사인데 이번에 간호대 편입해서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교통사고로 소장파열이라는 말을 듣더니 표정이 안좋아지면서 위험할거라고 하네요 생명에는 지장 없다는데? 하고 물었더니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더라구요 이때부터 걱정이 됐어요 2017년 6월 17일 여친과의 카톡이에요 여친 : 그 병원 지인 있어서 알아봤는데 여사님 상태 안좋아 면회 가봐 나 : 중환자실 아직 면회 안됀대 여친 : 면회 안되는게 아니라 면회시간이 정해져 있고 짧아서 가족한테 우선권이 있을 뿐이야 안되는게 아니야 가봐 나 : ... 여친 : 늦기 전에 빨리 가봐 나 : ... 여친 : 너가 여사님 좋아하는거 알아 나 : 늦는다는게 무슨 말이야 여친 : 빨리 가보라고 나 : 죽는다는 얘기야? 여친 : 그런 얘기는 함부로 하는거 아냐... 나 : ... 여친 : 그럼 너가 알아서 해 내가 이런거까지 챙겨줘야되냐 저녁 8시쯤에 다른 직장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내일 여사님한테 갈꺼죠? 중환자실 아직 면회 안될텐데요 어? 아직 못들었어요? 뭘 못들어요 여사님 ㅇㅇ장례식장에 있어요 ... 아... 못들었구나... 나도 한동안 멍 하다가 전화한거에요 2017년 6월 18일 새벽 1시 역시 직장동료 A양과의 카톡.. 저랑 같이 보낸 시간이 더 많은데 여사님 좋다고 저한테 여사님 소개시켜달래서 언니동생하고 지내는 사이. A양 : 알료사씨... ㅜㅠ 나 : 들었구나 A양 : 생명에 지장 없다며.. ㅜㅠ 어떡해 ㅜㅠ 나 : 나도 설마 했는데 A양 : 아침에 퇴근하는대로 갈거지 나 : ㅇㅇ A양 : 9시까지 글루 갈께 그때까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어요 A양의 차 안에서 제가 몰랐던 여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직장내 친목의 흐름에 따라 으레 소외되는 직원들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여사님이 꼭 그런 직원들을 챙겨줬던 모양이에요 아무도 모르는 생일을 알아내서 카카오톡 선물 보내기를 한다거나 야근을 하면 치킨을 사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영정사진을 보니 제가 아는 얼굴이 아니었어요 평소 혈색 없고 야윈 얼굴이어서 그게 원래 여사님 얼굴인줄 알았는데 사진을 보고 여사님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났어요 보기 좋게 살집 있는 웃는 얼굴 3년 6개월밖에 안지났는데 A양은 엉엉 울었는데 저는 눈물이 하나도 안났어요 여사님 시어머니와 여동생이 저보고 어디에 앉아있는분 아니냐고 예전에 직장에 한번 찾아갔을때 봤다고 와줘서 고맙대요 제가 여사님을 어떻게 대했는지 모르셔서 그러시겠죠... 시어머니께서 사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셨어요 여사님 아들이 엄마가 야근 때문에 늦으니까 언제 오냐고 전화했는데 전화 받는 순간 끼이이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전화가 끊어졌대요 여사님과 함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어요 신경외과 의사가 자신이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죽음을 마주하고 써나간 수기인데 마지막에 저자의 아내가 쓴 후기? 의 마지막 문장에서 너무 눈물이 났다고 여사님이 말했었어요 나는 그의 아내이자 목격자였다. 라는 문장이에요. 저는 여사님의 인생 전체는 모르지만 2014년 1월 처음 직장동료로 보아왔을 시점부터는 저도 여사님의 목격자였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아 그거 있잖아요.. 무한도전인가 거기서 <나 봤어, 내가 봤어> 하는거... 제가 봤어요 여사님 어떤 사람인지 제가 철없던 시절 동경했던 개똥철학처럼 좁은 천당문 거부하고 지옥길 활개치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정말로 있었어요 여사님이 [굴복]하지 않았다는거 제가 봤어요 제가 목격자에요 여사님 내가 잘못했어요ㅜㅠ 내가 다 잘못했어요ㅜㅠ 내가 어떻게 하면 좋아요 ㅜㅠ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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