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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7/22 19:51:50
Name   어느 멋진 날
Subject   그냥
2011년 7월 20일 도장 쾅쾅, 이 날은 단골이자 아주 이쁜 정실장님이 있던 헤어샵에서 할인 쿠폰에 도장을 찍던 날.
그로부터 4년후.
난 왜 이 글을 쓰고 있나싶어 곰곰히 생각해보니, 무더위에 지쳐 샤워를 하다 벌써 허리춤을 지나 엉덩이까지 내려온  머리 길이를 확인하곤 흠찟 놀라 언제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건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쿠폰에 적힌 2011년 7월 20일으로부터 4년 후.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면 적극적으로 피드백(?)해주는건 가족들이다.
3달쯤 지나면 꼴 보기 싫다고 얼른 이발소 가서 깔끔하게 스포츠 머리로 밀고 오라는 어머니.
6달쯤 지나면 사회에 불만있냐? 집안에 불만있냐? 라고 진지하게 물어보시는 아버지.
1년쯤 되서야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징그럽다고 얼른 같이 머리 자르러 가자는 형.


그 다음으로 주변사람의 반응이다.
3달쯤 지나면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 저 놈은 머리를 자르는건지 아니면 기르는건지 주변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참 애매한 시기이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머리 자르라고 말하기도 뭣 하고 그렇다고 혹시 머리 기르는거에요? 라며  둘러 말하기도 애매하다. 모든게 애매한 시기다. 나 또한 머리가 긴것도 아니고 짧은것도 아니라 형태 잡기 또한 어려운 시기다.
6달쯤 지나면 이제서야 주변에서 머리 기르는걸 확실히 인지한다. 주변에서 여자들이 같이 머리하러 가자는 사람도 있고, 무슨 이유에서 머리를 기르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1년쯤 지나니 새벽1시쯤에 자주가는 슈퍼 아저씨가 참 멋지게 기르셨네요라고 말해준다.


1년을 지나 2년을 향해가고, 머리가 찰랑 찰랑 흔들리며, 묶지 않으면 바람에 얼굴이 가려 걷기도 힘든때가 오기 시작한다.
이 시기부터부터 참 재미있다.
뭐가 재미있냐면 주변 사람의 반응이다.
어느 날인가 지하철 타고 버스로 환승할 일이 생겨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그랬더니 주변에 있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한번 쓱 살펴보신다.그리곤 바로 오는 버스에 타고 목적지에 가면서 갑론을박을 펼쳤다.
할머니 왈" 저 사람은 색시여 색시. 팔도 가냘프고 머리도 길고 곱상하게 생긴게 색시 맞구만"
할아버지 왈" 저 목젖을 보라니깐. 저게 어찌 여자여. 남자구만" 이라며 싸우다 결국 뒤에 앉은 여대생들한테까지 물어본다. 그리고 그들은 고심끝에 남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자가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니 단골로 이용하는 농협 여직원이 알아보기 시작하고, 슈퍼 아저씨가 멋지게 기르셨네요라고 말 해주고, 예비군 동대장이 반갑다고 매번 악수를 해주시고, 어머니는 방바닥과 집안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을 보며, 너 때문에 청소기 다 고장나겠다.라며 구박을 하고, 아버지는 나를 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모나 외숙모들은 명절에 내 머리를 가지고 역시 젊은사람이 머리를 기르니 이렇게 곱고 예쁘네 하면서 머리를 땋아주고 영양제까지 듬북 발라주시곤 했다. 구박하던 사람들이 말이다.


머리를 기른지 4년 되어가니 문제가 생긴다.안경을 쓰다 최근에 렌즈를 착용하기 시작했는데 신분증은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쓴 남자가 있고, 현실은 안경도 없고 머리 긴 남자가 있다. 이 부분에서 신분증을 요하는 부분에서 꽤나 난감하다. 가끔은 상대방이 당황하며 날 빤히 처다보는게 재미있긴 하다. 뭐 가끔은 이런맛에 머리 기르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든다. 일상이 지루하진 않으니깐 말이다.


머리 기르면서 오는 관심이 처음엔 부담스럽기도 하고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게 싫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게 더 좋아졌다.익숙함이란게 참 무서운게 초행길은 참 멀게만 느껴지고, 처음 살아보는 대형평수의 집은 마냥 넓어보이기만 해도 일주일을 못가 멀기만 했던 초행길은  짧게 느껴지고, 궁궐같이 넓었던 집은 좁게만 느껴진다. 마찬가지 어느순간 거울을 바라보며 꽤 많이 자란 내 머리길이에 놀라기도 하지만 이내 익숙해지며 짧은 머리를 했던 나를 상상할 수 없다. 그래도 4년 내내 익숙하지 않은게 있다. 주변에 남자들은 덜 하지만 호기심 많은 여중생, 여고생 또는 여대생들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머리는 무슨 이유르 기르는거에요? 라고 항상 꼬치꼬치 캐묻곤 한다. 그럼 나는 항상 그냥요. 이유 없어요. 라고 답 해준다. 사실 이 답을 듣는 사람 입장에선 좀 성의 없어보이고 대답하기 싫은 말투로 보일태지만, 나는 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냥 머리를 기르는것 같다. 딱히 이유도 없고 말이다.


언젠가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2000년 중반쯤 한 권의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의사가 쓴 책인데 참 슬픈 사연들이 많이 있었다. 눈물 뚝뚝 흘리면서 읽던 기억이 있었는데 얼마전에  자유게시판의 어떤 글의 댓글에서 Toby님이 추천해준 웹툰을 봤다. 암투병하는 사람에 관한 웹툰이였다. 옛날에 책 읽으면서 느꼈던것도 있고 해서 기부를 위해 머리를 자르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 왜 머리 기르는지도 몰랐고 의미 없이 그냥 길렀던거니 그냥 자르는것보다 의미를 두고 자르자는 생각이였다. 마지막으로 2011년 7월 20일 도장이 쾅쾅 찍힌 쿠폰을 가지고 오렌만에 단골 헤어샵에 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기부를 위한것이니 잘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종종 머리 자르면서 기부하는분들이 있다고 했는데, 이렇게 다 큰 남자가 하는건 자기도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머리 자르는건 무료로 잘라주고 싶다고 돈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머리를 자른걸 고무줄에 묶여서 바로 우체국으로 향했다. 소포에 고이 감싸서 보내고 나니 참 후련하다. 우체국 직원이 날 알아보더니 머리를 자르셨네요. 인물이 훤해지셨네요 라는 말을 듣고나니 뭔가 묘한 감정이 흘렀다.


4년동안의 익숙함에서 다시 이제 또 다른 익숙함에 익숙해질 타이밍이다. 머리 기르는걸 반대하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어느정도 머리 길고나니 딸 같다며 좋아하시던 모습을 보며 약간 머리 기르는데 뿌듯함도 있었는데 이제 다시 징그러운 아들로 돌아왔다.어머니,아버지 순이 말고 아들 왔습니다.



그리고 2015년 7월 22일은 내 인생에 나름 기억 될만한 "어느 멋진 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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