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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5/23 14:12:15 |
Name | quip |
Subject | 커피에서는 견딜 만한 향이 났다. |
커피에서는 견딜 만한 향이 났다. 좋다, 고 하기에는 딱히 좋은 부분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부분도 없었다. 그는 조금의 아쉬움을 느꼈다. 여기 커피, 좋았던 기억인데. 그는 아주와 꽤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다. 아주 좋았나.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적당한 산미와 상쾌함. 무겁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진한 그런 느낌이었다, 는 표현을 그는 떠올렸다. 산미와 상쾌함,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그는 픽 웃었다. 사실 그는 커피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간만에 마시는 커피였다. 언젠가 그녀는 이 곳의 커피에서 산미와 상쾌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그 시절에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도 별로 다를 바는 없었다. 다만 오늘은 날씨가 더웠고, 대기는 둔중한 햇살로 포화 상태를 이루고 있었고, 차가운 커피에서는 찌르는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그뿐이었다. 간만의 외근이었다. 만나야 할 사람들과 만나 해야 할 일을 했다. 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나버렸고, 시간이 떠버렸다. 오랜만에 오는 익숙한 동네였다. 그는 오랜만에 커피를 마시기로 결심하고, 익숙한 길을 걸었다. 여기서 저쪽으로 모퉁이를 돌아 골목으로 두 블럭을 들어가 왼편으로 걸어가면 유치원이 하나 있고,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다. 카페의 다른 옆에는 꽃집이 있었고, 꽃집 옆의 알 수 없는 사무실 건물 주차장 안쪽에는 재떨이가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서 담배 두어 대를 피우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는 했었다.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거기까지는 적당히 익숙했다. 주차장에는 재떨이 대신 금연, 이라는 큼지막한 문구가 붙어 있었고, 그 앞에서 몇 명의 인부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옆에서-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담배를 피웠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마자 인부들은 유치원이었던 건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인부들은 손에 각양각색의 구겨진 시트지를 들고 나타났다. 노랗고 파랗고 빨갛고 녹색이며 구겨지고 빛바랜 시트지 덩어리들이 녹색이며 빨갛고 파랗고 노란 꽃과 풀이 찬란한 화단 앞에 쌓여갔다. 그는 두 대 째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에서는 견딜 만한 향이 났다. 그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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