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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10/09 23:04:00수정됨 |
Name | quip |
Subject | 존재와 무국 |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라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무국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날씨는 추워지고 있었고, 조만간 양배추의 가격이 오르게 될 것이다. 가격이 오르지 않는다 해도 이제 양배추는 권태로운 식재료가 되었다. 나는 양배추를 너무 많이 먹었다. 생으로. 삶아서. 고기에 볶아서. 수프를 끓여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니 양배추를 대체할 만한 게 무엇이 있을까. 적당히 싸고, 대충 어느 요리에나 어울리며, 칼로리가 낮으면 된다.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적당히 무의미한 식재료가 필요한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영양학적으로나, 요리학적으로나. 그러한 고민 끝에 내가 내리게 된 결론은, 무였다. 무. 쌍떡잎식물 양귀비목 십자화과의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 무라면 역시 적당히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나는 무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그것은 이미 닫혀버린, 이미 존재해버린 현실이 아니니까. 동치미에서부터 무나물에 이르기까지, 무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요리를 그렇게 잘 하는 편이 아니며, 무에 익숙한 인간이 아니기에, 일단은 쉬운 것부터 해 보기로 했다. 소고기 무국. 그거라면 한국 요리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을 마르틴 하이데거라도 끓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몇 시간 전에 ‘내일은 무국을 만들어 먹어야지’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아, 별건 아니고. 내일은 무국을 만들어 먹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의 말에 그녀는 허무한 웃음을 터뜨렸다. 무국이요? 무국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치고는 너무 진지한 표정이었는데. “실제로 진지한 문제니까요.” 나는 진지한 얼굴을 연기하는 자를 연기하며 대답했다. 눈썹에 잔뜩 힘을 주고, 입술 양 끝에 힘을 주고 과장된 발음을 하면서. “무국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잖아요. 일단 지금 내 집에는 무가 없어요. 하여 무국을 먹자니 일단 무를 사야 하는데, 어디서 살까 하는 문제부터 쉬운 문제는 아니죠. 지금 당장은 두 군데 정도의 후보가 떠오르는데. 하나는 항상 가던 동네 마트입니다. 일단, 럭키마트라고 해 둘까요. 보통의 동네에 보통 그런 이름의 마트랄까, 슈퍼 같은 게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니 이번에는 내 쪽에서 허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생각해보니 실제로 동네 마트의 이름이 럭키마트로군요. 상상력이 모자라 아쉽네요. 아무튼, 럭키마트는 그럭저럭 싸고, 오천원 어치를 사면 쿠폰을 한 장씩 줘요. 오십 개를 모으면 고가의 사은품을 증정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다 모아보니 그저 오천 원 할인권에 불과하더라고요. 고가도 아니고 제대로 된 사은품이라 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그런 잔재미는 중요한 문제니까. 그러니까 사던 대로 거기서 살까, 하는 게 제 1안.” “그리고?”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아니면 최근에 새로 오픈한 동네 공판장에서 살까. 이게 제 2안.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마트에요. 이거저거 공격적으로 할인 행사를 하는 느낌인데, 정확히 얼마나 싼지는 모르겠네요. 전체적인 가격이나 분위기를 좀 확인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어제 처음 가 봤는데. 결국 가격 확인은 못 하고. 아. 그게 마트에서 좀 작은 사건이 있어서.” “작은 사건?” “예쁜 여자가 있었어요.” 그녀는 깔깔깔 웃어댔다. “생각보다 진지한 이야기였군요.” 예쁜 여자라는 건 역시 진지한 이야기일까. 나는 그 지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대신 어제 본 여자를 떠올려보려 노력했다. 아쉽게도 나의 기억력은 상상력만큼이나 빈한했다. 일본인이었고, 여행객이었고, 이름은 유우카였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기억나지만, 중요한 것, 그러니까 왜 어떻게 예뻤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겠지만, 아닐 지도 모른다. 아마도 키가 작았겠지만, 아닐 지도 모른다. 짧은 머리와 작은 키라는 논리적인 추론은 나름대로 합당하다. 사람에게는 취향이라는 게 있다. 누군가는 무를 양배추보다 좋아하는 것처럼, 나는 짧은 머리를 긴 머리보다, 작은 키를 큰 키보다 좋아할 뿐이다. 예쁜 여자를 보았다. 그런데 기억날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제의 나는 실제로 굉장한 미인을 마주쳤을 확률 보다는, 그저 짧은 머리를 한 작은 여자를 마주쳤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번호라도 따셨나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예쁜 여자가 있었고. 와, 예쁘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괜히 라면이나 3분 카레 같은 걸 뒤적거리면서 힐끔 보고. 그 여자가 친구와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그러다가 이게 뭐 하는 민망한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라면과 3분 카레를 한 묶음씩 사서 집에 돌아갔죠. 그게 전부에요. 집에 와서야 깨달았죠. 며칠 전에 인터넷으로 3분 카레 한 박스를 시켰다는 거. 그리고 정육 코너에서 가격 확인을 하기는커녕, 정육 코너에 가지도 않았다는 거.” 그녀는 다시 한 번 깔깔깔 웃었다.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전 애인도 그런 식으로 과장되게 웃는 걸 즐겼다. ‘깔깔깔. 그거 참 빈곤한 취향이군.’ 불현듯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웃기지 않아? 파란 색을 좋아한다거나, 짧은 머리를 좋아한다거나, 작은 키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거 말이야. 취향이라는 건 좀 더 복잡한 문제일 텐데.’ 그녀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머리가 길고 키가 작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반 정도만 사랑했던 건 아니었는데, 지금에 와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아무튼 그녀는 언젠가 다른 남자에게 가 버렸는데, 그게 좀 더 복잡한 문제 때문이었는지 취향 때문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고 이제 와서는 다 무의미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 여자 생각하고 있어요?” 침묵이 길어지자 그녀가 말했다. “아, 뭐, 네.” “답이 나왔네. 럭키마트보다는 공판장.”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우리는 담배 한 대 분량의 침묵을 더 공유하고, 적당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내일 봐요.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렸다. 나는 야채 코너로 직행했다. 가을이었다. 무는 야채 코너의 가운데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한 통으로, 또는 반으로 잘린 채로. 한 통을 다 살까, 아니면 반으로 자른 걸 살까. 한 통을 다 사는 건 무리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르틴 하이데거 선생보다 한국 요리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며, 무라는 것은 의외로 빨리 지겨워지는 식재료일지도 모르고, 내가 모르는 새에 무 알러지 같은 것이 생겼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물론 한 통을 다 사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냉장고에서 음식이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걸 보는 것은 아무래도 그렇게 유쾌한 일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무는 어느 쪽이 맛있더라. 이파리가 달린 쪽인가, 뾰족한 쪽인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반쪽을 사는 이상, 나는 다음 반쪽을 사기 전까지 다른 반쪽의 맛을 알지 못할테니까. 물론 눈 앞에는 뾰족한 부분의 반쪽만 남아 있었고, 그렇다면 내 덜 빈곤한 논리력을 동원해 추론해볼 때, 잎사귀가 달린 쪽이 맛있을 것이다. 그래, 반 개만 사자. 나는 반으로 잘린 무를 집어들고 정육 코너로 걸어가다가, 보존식 코너에서 튀어나온 사람과 부딪혔다. “Oh, sorry," 나보다 키가 조금 큰 백인 여자였다. “That's ok. It's nothing." 나는 무를 집어들고 재빨리 정육 코너로 향했다. 그 편이 서로 덜 민망할 테니까. 정육 코너에서 적당한 고기를 사들고, 계산을 하고, 마트 밖으로 나왔다. 아까 나와 부딪힌 여자가 버드와이저를 마시고 있었다. 굉장한 미인이었다. 아마도 어제의 그 여자보다 미인인 것 같았다. 그녀는 쾌활한 표정으로 내게 인사를 건내고, 내 손에 들린 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는 뭐죠? 무입니다. 무인데, 무가 영어로 뭐더라. 무. 일본어로는 다이콘인가 그랬는데 영어로는 뭐지. 무가 뭐지. 무. 없을 무. nothing. "Ah, It's nothing." 이라고 어벙하게 대답하고 웃으며 나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영어 사전에서 무를 검색해보았다. 무, 그러니까 하얗고 커다랗고 아무 것도 아닌 그 야채는, 네이버 영어사전에 따르면, daikon이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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