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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12/28 12:02:11수정됨
Name   구밀복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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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2018년의 사회진화론


소재 자체로 자극적일 수 있단 게 실소가 나오긴 하지만 잠깐 듀나 이야기를 예시로 꺼내볼까요. 온라인에선 듀나가 영알못 어그로 꼴페미로 낙인 찍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인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만, 막상 '스포일링 없이' '해당 영화가 놓여 있는 문화적 맥락과 장르코드를' '극장에 걸려 있는 거의 모든 영화를 대상으로' 가이드 해주는 네임드는 듀나가 거의 유일하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건 평론이라고 할 수는 없고 가이드입니다만, 어쨌든 해당 영화가 대중 영화산업이라는 세계지도에서 어느 경도 어느 위도에 있는 영화인지를 살펴보는 데 듀나만큼 가성비 좋은 리뷰어가 없단 거죠. 평론은 본명으로 저널에서 하고 있으니 제껴두고..

길게 살펴 보는 데에는 지면의 한계가 있으니까 문단 하나만 샘플로 보죠. 듀나는 최근 '서치'를 두고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http://www.djuna.kr/xe/index.php?mid=review&page=3&document_srl=13465017

[...아니쉬 차간티의 '서치'는 누군가가 어느 단계에서 만들 수밖에 없는 아이디어에 기반을 둔 영화입니다. 아니, 이미 몇 년 전에 그 아이디어를 다른 영화가 이미 썼어요. '서치'의 제작자 티무르 베크맘베토프가 몇 년 전에 제작한 '언프렌디드'요. 영화 전체가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의 화면 위에서 벌어지는 거죠. 단지 '언프렌디드'가 하나의 컴퓨터 화면에서 실시간으로 진행된다면 '서치'는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 있습니다. 많이들 '업'을 떠올리는 도입부는 데이빗 킴과 그의 가족이 겪는 15년의 세월을 커버하고 있고 (당연히 그 동안 컴퓨터도 몇 번 바뀌었겠죠?), 본격적인 액션이 진행되면 데이빗과 딸 마고의 컴퓨터를 오가다 종종 회사 컴퓨터와 휴대전화로 건너뜁니다. 화면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영화는 컴퓨터 화면의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중요한 부분이 있으면 확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언프렌디드'보다 더 영화적인 어휘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문단 두 개 정도에 불과한 단문인데 어마어마하게 정보량이 많습니다.
1. 언프렌디드 만든 놈들이 서치 만든 건데 아이디어가 똑같은 거다.
2. 근데 그렇다고 서치가 마냥 짭은 아닌데
3. 언프렌디드에 비해 서치는 실시간 상황을 그대로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고 이 정보 저 정보가 제약없이 다 모니터에 담긴다.
4. 그래서 언프렌디드보다 느슨하게 이거저거 다양하게 시도하기에 유리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5. 그래서 영화를 만든 창작자가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발상을 했으며 그걸 어떻게 실행했는지 살펴 보기 좋고, 따라서 좀 더 영화적인 영화다.

이 정도 정보량을 몇 안 되는 문장 안에, 전문 용어 없이 누구나 일상적으로 쓰는 어휘들만 골라서 꽉꽉 우겨담아 영화의 양상을 축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뭐 그야 제 생각이고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최소한 저는 저렇게 날렵하고 유연하게 쓸 자신은 없네요. 어떤 건 그렇게 쓸 수도 있겠지만 1년에 200개를 그렇게 써보라고 하면 못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도 듀나 뿐이고요.

듀나 이야기가 본질이 아니었는데 좀 길어졌네요. 요는 이겁니다. 인터넷에서는 듀나에 대한 판정이 이미 끝난 상태고 뒤집어 질 일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꼭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소비자의 입장에서 개별적 유용성이 없다고 단언할 순 없다는 거죠. 누군가에겐 트래픽 아까운 헛소리일 수 있어도 다른 이에게는 시간 절약에 도움되는 지침이 될 수 있어요. 여기서 엑기스만 뽑아내서 추상적인 원론으로 정리하자면 이런 문장이 될 겁니다. '다수의 판단이라고 해서 이견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입니다. 이렇게 글로 쓸 필요도 없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대 인터넷에서는 이런 다수론에 대한 맹목성이 이전보다 현격하게 높아졌습니다. 킹냐? 그건 다수가 쇼통할 수 있는 공론장이 이전보다 안정적이고 확실한 형태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글, 유튜브, SNS, 위키 백과들, 저널 검색 사이트들 등등등.. 예전에는 도서관 가고 발품 팔고 전문가 만나야만 얻을 수 있던 지식과 정보들이 인터넷에 무제한적으로 떠돌아다니고, 정보와 정보들끼리 키배를 벌이고 자웅을 거리면서 어떤 게 옳고 어떤 게 그른지를 판가름해요. 대 인터넷 시대 이전의, 미지의 영역에서 허우적대던 시절과 비교하면 신세경 정보석이죠. 과거에 부모님이나 부장님이나 젠 체 하는 친구가 어디서 주워들은 소리를 야부리 털 땐 믿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긴가민가 했는데, 나무위키에서 하는 이야기는 일단 그래도 그보단 나은 거죠. 왜냐하면 입장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논박해가며 나온 잠정적인 결론이니까. '완전 개소리였으면 누가 반박을 했겠지 요즘 같이 정보 다 공개 된 세상에서 뻔한 야바위질 어떻게 해'라고 안심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겁니다. 공론장에 노출되어 자연선택을 거쳐 살아남은 진화적 승자라는 것이죠.

실제로 그런 구석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온라인 월드에서 '정론'이라고 간주되는 입장들이 제약없이 범람하게 된다는 겁니다. 모두 그걸 의문의 여지 없는 부동의 사실로 믿게 되고, 다른 여지는 없는지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한 건 아닌지 혹은 구체적인 맥락을 무시한 채 체리피킹한 건 아닌지 고민하지 않게 되죠. 급기야는 이견을 제시하고 반박하는 이들에게 '아아니~~~ 정답 몰라 정답? 10년 전에 다 결론 나온 이야기를 아아아~~직도 혼자 모르고서 헛소리 하네~~'라고 으름장 놓기도 하지요. 이런 태도는 세상만사는 다 빤한 거고, 보편 원리로 설명 안 될 것은 없고, 정답은 다 정해져 있는 거고, '이것만은 다르게 봐야 한다' 이런 건 없다는 사고를 함축하지요. 그러니까 이종범 이야기만 나오면 '네 다음 인비저블 섬띵욬ㅋㅋㅋ' 하며 조롱하는 거고.

그러나 아무리 다수에 의한 교차검증과 상호견제가 이루어졌다 한들, 다수론은 결국 다수론일 뿐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는 아닙니다. 애시당초 보편 타당한 진리라는 것부터가 환상이겠죠. 설혹 정답이 나왔다 한들, 그게 모든 경우에 한해 정답이라곤 보장 못하니까요. '평균적'인, '보편적'인 상황에 대해서야 정답일 수 있어도, 특수한 상황과 개체와 대상에 적용될지 어떨지는 모를 겁니다. 가령 '한국의 치안은 세계 제일'이라는 건 참이고, 한국에서 범죄로 죽을 확률은 매우 낮다는 것 역시 정론이지만, 실존하는 범죄 피해자에 한해서는 그런 일반론이 무용지물이듯이.

예전에 집약되지 않던 공론이 압축되어 보급되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에요. 신문과 잡지에 떠돌던 소리, 부모님이 쓰던 억지, 노친네들이 주워섬기는 환빠 드립 등등에 비하면 객관적이고 가역적이고 교환적인 과학적 의견들이며 태환화폐죠. 하지만 그 혁신성에 눈이 멀면 어르신네들과는 다른 형태로 또다른 맹목이 되어 남이 이미 말한 진부한 표준과 객관과 정론을 필터링 없이 복붙하고서는 모든 경우에 강요하는 파쇼적 폭군이 되는 거죠. 사회진화론자들이 파시즘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요. 자명하기 짝이 없는 '의지의 승리'에 동참하지 않는 이는 기초적인 사실조차 모르는 비국민으로 치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이고 특수한 각각의 사정 같은 건 무시하고서는 '저것들은 객관적 과학이 뭔지 몰라'라며 상대를 억지 쓰는 떼법 종자라고 빈축 먹이는 거죠. 그런 패권주의에 빠질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여백을 남겨두고 여지를 남겨두는, 유보적이고 여유로운 태도가 필요할 겁니다. 진화는 우승열패가 아니라 자연선택일 뿐이며 시의적인 우연에 불과하다는 걸 기억하면서요. 일전에 다른 커뮤니티에서 인공지능을 주제로 쓴 글을 인용하면 괜찮을 것 같아 이걸로 마무리합니다.
  
https://pgr21.com/?b=8&n=57463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강한 객체가 부모가 되서 자식을 많이 낳기 마련이고. 도태되는 객체는 자식을 낳을 기회를 박탈되어 사라져가는 것이 이 유전자 알고리즘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렇지만 실제 생물들 중에 늘 강한 자만 살아남아 근친교배만 하게 되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치명적인 장애를 가진 자식을 낳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 때문에 실제 생태계에서는 최소한의 다양성을 강요하게 되는데. 이 부분 역시 유전자 알고리즘에서 채용하고 있는 부분입니다...즉 열등한 부모라도 행운만 있다면 본인의 유전자를 물려줄 자식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걸 공학적으로 설명하자면, 해를 찾기 위한 탐색과정에 Local minima 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입니다. 비슷한 해들이 좋은 점수를 냈다고 그 해들끼리만 계속 교배시켜 자식 해를 낳으면 필시 국소 최저점에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당장은 손해보는 것 같아도 어느정도의 일탈은 묵인하여 새로운 해를 찾아 나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죠. 국소 최저점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유전자 알고리즘은 채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변이입니다. 한쌍의 부모가 만나 새로운 자식해를 만들때 일정한 확률로 그 유전자에 random 값을 넣도록 하는데. 이는 실제 생태계로 비교해보자면 돌연변이라고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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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에 인터넷에서 느끼던 답답함을 차분하게 분석해주시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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