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1/20 15:18:58
Name   은때까치
File #1   파사는페이커.jpg (12.3 KB), Download : 3
Subject   하버드에서 나누었던 인상적인 대화



오늘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업계.... 아니 학계에서 소셜이란 social activity의 준말로, 동료 연구자들과 인사하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인맥을 형성하는 행위 전반을 일컫습니다. 간단히 말해 친목질이죠. 다만 소셜이 일반적인 친목질과 다른 것은, 친목 도모가 반쯤은 강제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연을 만들어 놓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엄청나게 유리해지기 때문에, 어떻게든 대가들과 한마디라도 붙여 보려고 서성이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물론 저도 그들 중 하나였고요.

오늘도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미소를 지으면서 세로토닌과 알츠하이머와 억제성 뉴런에 대해서 듣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가 저를 툭툭 치더군요.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인도계(처럼 보이는) 형님이었습니다.

형님이 매력적인 저음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Excuse me, do you know Faker?'









.........................네????



- 어...저한테 하신 말씀이신가요?
- 당연하지! 나 skt 팬이야. 니가 지금 입고 있는거 skt 후드잖아!


아하, 그러고보니 제가 입고 있던 후드티가 바로 페이커가 파 살때 입던 바로 그 후드였더라고요.
팬심+디자인이 이뻐서 샀고, 보온성이 좋아서 자주 입는데, 이걸 그 인도 형이 알아보고 말을 건 것이었습니다!


- 와! 진짜 반가워요. 어떻게 알아보셨대. 저도 엄청난 skt 팬이에요. 2013년에 월챔 우승할때부터 팬이었어요!
-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갑네. 이번에 skt가 팀 새로 짠거 봤어? 완전 슈퍼팀이던데.
- 당연히 봤죠. 어떻게 이런 선수들을 모았는지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 칸, 마타, 테디.... 또 누가 있더라? 아 클리드. 나 걔는 몰랐는데 진짜 잘하더라.
- 맞아요 크크 오늘 아침에 한 경기 보셨어요? 아프리카랑 했는데 클리드가...
- 오ㅡ 잠깐만. 스포일러 하지 마. 나 그거 이따가 볼거야. 여기 오느라 다 챙겨보진 못했어.


인도 형님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skt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젠-지에서 정글러가 새로 왔는데 아직 한번도 못 나왔다는 것도 알고 있고, 페이커가 한 챔피언에 꽃히면 계속 그것만 픽한다는것도 알고 있더라고요. 그야말로 [심상정] 그 자체...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오늘 있었던 실화입니다. 저도 정말 신기했어요.


- 너 페이커 실제로 본적 있어?
- 당연하죠. 서울 e스포츠 스타디움에 직관가서 몇 번 봤어요. 싸인도 받았다구요.
- 부럽다..... 저번에 미국에 왔을때 봤었어야 하는데. 언제 꼭 한번 한국에 가고싶네.
- 꼭 한번 오세요. 제가 가이드해드릴게요 크크
- 대단해!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재미있었어. See you later!
- 형님도 살펴가십쇼!





기본적으로 소심하고, 낯을 많이 가리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무서워하는 햇병아리인 저에게, 소셜은 언제나 엄청난 압박이었고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도 형님과의 대화는 정말 외국에서 처음 경험해 본 순수하게 즐거운 대화였어요. 다음에 어떤 질문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부족한 영어 실력이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런 긴장도 압박감도 없이, 순수한 덕후의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재미있었어요.


이게 소셜이구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주제라면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이렇게 즐거운 대화가 가능하구나. 이래서 사람들이 소셜을 좋아하는구나. 내가 소셜을 어려워했던 이유는........ 아하, 내가 내 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덕후가 아니라서 그랬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살짝 좌절했습니다. 물론 소셜을 어려워하는 핑계를 대려면 댈 수야 있습니다. 아직 영어가 부족해서, 내 연구가 자신이 없어서, 성격이 내향적이라서........ 하지만 주제가 세로토닌에서 페이커로 바뀌었을 뿐인데, 신나서 얘기하는 자신의 모습을 경험해 보니 슬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과학 덕후가 아니었나 봐요.


사실 뭐, 완전히 모르고 있던 건 아닙니다. 몇몇 교수님들은 잠도 줄여가면서 연구한다던데, 저는 여전히 논문읽는것보다 게임하는게 좋고 피지알 보는게 좋고. 시간 많이 빼앗겨서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는 핸드폰 게임은 3년째 하고 있고. 그래도 화장실 갈 때 논문 들고가고 샤워할 때 연구 생각하니까 나정도면 그래도 덕후라고 할 수 있는 축에 속하지 않나....... 스스로 그렇게 자기위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나 봐요. 교수님 죄송합니다. 전 페이커가 더 좋아요.




아! 인정해 버리니 마음이 편하네요. 난 과학 덕후가 아니었어! 페이커 짱짱맨!
덕후가 원한다고 맘대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생긴대로 살아야죠. 그게 참 슬픈거 같아요. 되고 싶다고 맘대로 못 되는 것.

그래도, 저도 언젠가는 찐하게 덕통사고가 나서, 그래서 덕후 코스프레가 아닌 진짜 덕후가 된다면....
그러면 참 좋겠네요.


.....페이커 화이팅!



29
  • 오오! 하버드의 공부벌레들!!
  • 두유노 페이커?
  • 데이 노 빼이커 투
  • 깨달음!
이 게시판에 등록된 은때까치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775 일상/생각백인으로 산다는 것 32 은머리 17/02/05 6540 7
4774 문화/예술몇몇 작품들 24 은머리 17/02/05 6243 1
4723 기타작자 미상의 인터넷 글 < 그 애 > 14 은머리 17/01/30 22130 3
4671 기타아마추어 할머니 화가의 성공적인 뻘짓 22 은머리 17/01/21 4714 1
4663 영화라스트 나잇 크리스마스 (1978) 8 은머리 17/01/20 4172 1
4640 정치SBS인터뷰이야기, 문재인 불호 주의 56 은머리 17/01/17 5481 0
4631 문화/예술중력 따위 거부하는 아트 17 은머리 17/01/16 4458 0
4606 역사컬트. 짐 존즈. 2 은머리 17/01/12 4242 2
4567 일상/생각눈 마주치기 31 은머리 17/01/08 4885 5
4523 일상/생각[증오주의] 연예계 뒷담화, 용감한 기자들? 8 은머리 17/01/03 4652 0
4516 음악가사가 우울한 노래 네 개 1 은머리 17/01/02 4064 1
4512 역사스트렐카와 벨카 12 은머리 17/01/02 8372 5
4500 일상/생각후방주의)일본애니주제가를 실컷 듣다가 : 성적 대상화란 것 47 은머리 17/01/01 9650 0
4496 음악러시아민요 - 나 홀로 길을 가네 8 은머리 16/12/31 3512 0
8782 일상/생각하버드에서 나누었던 인상적인 대화 8 은때까치 19/01/20 4208 29
209 기타한 잔의 완벽한 홍차를 만드는 방법 17 15/06/04 10211 0
361 기타여행업계와 메르스에 대한 잡담 및 안내 12 으르르컹컹 15/06/19 8733 0
166 기타저의 인터넷 커뮤니티 생활에 대한 잡설 10 으르르컹컹 15/06/01 9138 0
13006 오프모임[마감]7/31 우리가 개다! 왈왈 124 율아 22/07/19 4581 10
8 기타안녕하세요, 윤하입니다. 5 윤하 15/05/29 6974 1
12535 게임KT-KTF 프리미어리그 플레이오프 임요환vs홍진호 in Lost Temple 17 윤지호 22/02/22 3708 1
12432 기타군대 경계근무 관련 썰.. 12 윤지호 22/01/11 6279 0
12465 게임뱀파이어 서바이버즈(Vampire Survivors) 7 윤지호 22/01/25 4704 1
12338 게임[디아블로2 레저렉션] 낙인(구 인두) 아마존 6 윤지호 21/12/10 8160 2
12299 게임[디아블로2 레저렉션] 신념마 황금레지 세팅-키라의 가디언 19 윤지호 21/11/22 7744 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