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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존 원주민 세계에서는 인간의 이기적 목적 때문에 비인간 존재를 살상하거나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 ...?
2. 인간 과학자 못지않게 비인간 사물도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내는 행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균, 실험동물, 현미경, 시험관, 컴퓨터 등의 비인간 사물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오늘날의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인식하게 되면서 자신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데, 지구 또한 인간의 개입에 따라 재차 작동 방식...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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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 과학자 못지않게 비인간 사물도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내는 행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균, 실험동물, 현미경, 시험관, 컴퓨터 등의 비인간 사물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오늘날의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인식하게 되면서 자신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데, 지구 또한 인간의 개입에 따라 재차 작동 방식... 더 보기
1. 아마존 원주민 세계에서는 인간의 이기적 목적 때문에 비인간 존재를 살상하거나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 ...?
2. 인간 과학자 못지않게 비인간 사물도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내는 행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균, 실험동물, 현미경, 시험관, 컴퓨터 등의 비인간 사물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오늘날의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인식하게 되면서 자신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데, 지구 또한 인간의 개입에 따라 재차 작동 방식을 바꾼다.
- '행위'의 개념정의를 달리한다는 것인데, 비인간 사물중 자연물은 과학지식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관찰'됨으로써 과학지식이 정립되는 것이고, 현미경/시험관/컴퓨터 등의 사물은 인간의 행위로 만들어진
도구로 '기능'하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소개된 21세기 사상이라는 것들이 대체로 철지난 '가이아'이론,
자연의 의인화 발상의 변형일뿐이며 개념정의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를 탐구하는데 순수한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환경을 별도로 고려한다는 정도의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이를 인간과 비인간이 결합한
'하이브리드'라 표현한다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 와닿지 않습니다. 본문에도 적혀있지만
말만들기에 가깝지 예시로 들어진 과속방지턱이건 와이파이통신망이건 그건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인간행위의 결과물이지 이걸 비인간사물이 행위한다고 보기는 어렵죠.
개인적으로는 이런 인간행위의 결과물들이 이미 촘촘히 자리잡고 있는 환경을
이미 주어진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능동적으로 변경하기 어렵다보니
그것들을 인간행위의 결과라 인식하기가 어려워 발생하는 오개념/퇴행에 가깝지 않나 합니다.
"사물의 의회란 어떤 하이브리드를 사회에 수용할 것인지, 수용할 경우 어떤 위치와 역할을 부여할 것인지를
인간과 비인간의 다양한 대변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고 결정하는 민주적 포럼을 말한다."
그 사물의 의회에서 비인간의 대변자들은, 비인간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인간이겠죠.
자신의 말의 근거를 자신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비인간을 끌어들여 댄다는 데서
신을 끌어들이는 종교 지도자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3. "사이보그 선언"에 대한 이해가 없어 더 파악하기가 힘든데,
"“사이보그는 사생아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에서도 드러난다. 사이보그는 지구의 절멸도 불사할 핵전쟁, 심지어는 문자 그대로의 우주 전쟁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지 않던 시대에 전쟁 기계의 일종으로 고안됐다. 하지만 사이보그가 꼭 그와 같은 참극에 동원되리라는 법은 없다. 자신의 근본으로 여겨지는 것을 배반한다는 뜻에서 사이보그는 사생아가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해러웨이는 이 단어를, 순수하다고 가정된 범주 사이의 경계, 이를테면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동물,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가 와해되며 출현하는 혼종적 존재를 일컫는 데 두루 사용한다. "
터미네이터와 유사한 공상과학의 '사이보그' 이미지를 가지고 무슨 비판을 하는 것 같은데
'전쟁기계의 일종으로 고안된' 사이보그에 대한 고찰은 원피스 악마의 열매 능력에 대한 고찰과
무엇이 다른 건지 잘 모르겠네요.
이게 해당 발제 자체의 문제인지, 해당 기사가 전달을 충분히 못한 탓인지,
제가 배경지식으로 '사이보그 선언'에 대한 이해가 없는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사태를 긍정과 부정 중 하나로 환원하지 않고 이 둘 모두에 충실할 수 있는 자세, 매 순간과 매 관계에 고유한 문제 속에서 책임 있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response-ability)을 배양하는 것이 오늘날 필요한 윤리적 태도이다."
라는 결론에는 동감하면서도, 도대체 앞의 사이보그 논의가 어떻게 해서 여기로 연결되는 지를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사이보그'라는 단어가 핫했고 지금은 '반려'라는 단어가 핫하구나..?
--
나머지는 이후 천천히 읽어보기로.. 재미는 있습니다만
'학술, 문화비평, 미디어, 출판도 20세기 사상을 끌어다 회고하는 데 머물고 있는'
이유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 ...?
2. 인간 과학자 못지않게 비인간 사물도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내는 행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균, 실험동물, 현미경, 시험관, 컴퓨터 등의 비인간 사물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오늘날의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인식하게 되면서 자신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데, 지구 또한 인간의 개입에 따라 재차 작동 방식을 바꾼다.
- '행위'의 개념정의를 달리한다는 것인데, 비인간 사물중 자연물은 과학지식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관찰'됨으로써 과학지식이 정립되는 것이고, 현미경/시험관/컴퓨터 등의 사물은 인간의 행위로 만들어진
도구로 '기능'하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소개된 21세기 사상이라는 것들이 대체로 철지난 '가이아'이론,
자연의 의인화 발상의 변형일뿐이며 개념정의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를 탐구하는데 순수한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환경을 별도로 고려한다는 정도의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이를 인간과 비인간이 결합한
'하이브리드'라 표현한다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 와닿지 않습니다. 본문에도 적혀있지만
말만들기에 가깝지 예시로 들어진 과속방지턱이건 와이파이통신망이건 그건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인간행위의 결과물이지 이걸 비인간사물이 행위한다고 보기는 어렵죠.
개인적으로는 이런 인간행위의 결과물들이 이미 촘촘히 자리잡고 있는 환경을
이미 주어진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능동적으로 변경하기 어렵다보니
그것들을 인간행위의 결과라 인식하기가 어려워 발생하는 오개념/퇴행에 가깝지 않나 합니다.
"사물의 의회란 어떤 하이브리드를 사회에 수용할 것인지, 수용할 경우 어떤 위치와 역할을 부여할 것인지를
인간과 비인간의 다양한 대변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고 결정하는 민주적 포럼을 말한다."
그 사물의 의회에서 비인간의 대변자들은, 비인간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인간이겠죠.
자신의 말의 근거를 자신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비인간을 끌어들여 댄다는 데서
신을 끌어들이는 종교 지도자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3. "사이보그 선언"에 대한 이해가 없어 더 파악하기가 힘든데,
"“사이보그는 사생아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에서도 드러난다. 사이보그는 지구의 절멸도 불사할 핵전쟁, 심지어는 문자 그대로의 우주 전쟁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지 않던 시대에 전쟁 기계의 일종으로 고안됐다. 하지만 사이보그가 꼭 그와 같은 참극에 동원되리라는 법은 없다. 자신의 근본으로 여겨지는 것을 배반한다는 뜻에서 사이보그는 사생아가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해러웨이는 이 단어를, 순수하다고 가정된 범주 사이의 경계, 이를테면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동물,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가 와해되며 출현하는 혼종적 존재를 일컫는 데 두루 사용한다. "
터미네이터와 유사한 공상과학의 '사이보그' 이미지를 가지고 무슨 비판을 하는 것 같은데
'전쟁기계의 일종으로 고안된' 사이보그에 대한 고찰은 원피스 악마의 열매 능력에 대한 고찰과
무엇이 다른 건지 잘 모르겠네요.
이게 해당 발제 자체의 문제인지, 해당 기사가 전달을 충분히 못한 탓인지,
제가 배경지식으로 '사이보그 선언'에 대한 이해가 없는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사태를 긍정과 부정 중 하나로 환원하지 않고 이 둘 모두에 충실할 수 있는 자세, 매 순간과 매 관계에 고유한 문제 속에서 책임 있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response-ability)을 배양하는 것이 오늘날 필요한 윤리적 태도이다."
라는 결론에는 동감하면서도, 도대체 앞의 사이보그 논의가 어떻게 해서 여기로 연결되는 지를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사이보그'라는 단어가 핫했고 지금은 '반려'라는 단어가 핫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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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이후 천천히 읽어보기로.. 재미는 있습니다만
'학술, 문화비평, 미디어, 출판도 20세기 사상을 끌어다 회고하는 데 머물고 있는'
이유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1. 저도 1은 그다지 ㅎㅎ... 가축화를 하지 않는 이유를 인류학적 논리로 설명하는 접근들은 어느 정도 타당한 듯한데, 지적하신 부분은 자칫하면 아마존 짱짱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요.
2. 요고는 저도 브뤼노 라투르를 자세하게 안 읽어봐서 세세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기가 힘드네요. 일단 비인간사물의 행위성이라는 관점은 저도 그 기사를 기고하신 김환석 교수님께 들었을 때도 아리송했어요.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이해한 포인트를 정리하자면 과학적 '관찰'이라고 하면 우리의 인식을 통해 세계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입장일... 더 보기
2. 요고는 저도 브뤼노 라투르를 자세하게 안 읽어봐서 세세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기가 힘드네요. 일단 비인간사물의 행위성이라는 관점은 저도 그 기사를 기고하신 김환석 교수님께 들었을 때도 아리송했어요.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이해한 포인트를 정리하자면 과학적 '관찰'이라고 하면 우리의 인식을 통해 세계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입장일... 더 보기
1. 저도 1은 그다지 ㅎㅎ... 가축화를 하지 않는 이유를 인류학적 논리로 설명하는 접근들은 어느 정도 타당한 듯한데, 지적하신 부분은 자칫하면 아마존 짱짱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요.
2. 요고는 저도 브뤼노 라투르를 자세하게 안 읽어봐서 세세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기가 힘드네요. 일단 비인간사물의 행위성이라는 관점은 저도 그 기사를 기고하신 김환석 교수님께 들었을 때도 아리송했어요.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이해한 포인트를 정리하자면 과학적 '관찰'이라고 하면 우리의 인식을 통해 세계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입장일 것이잖아요. 실증주의적 관점이 그것이고요. 그런데 과학사를 살펴보고, 실제 과학자들이 '과학하기'를 하는 모습들을 보니 패러다임이라는 게 존재하고 정상과학의 지위라는 것이 포퍼 식의 반증주의로 따박따박 굴러가지 않는구나라는 깨달음에서 '결국은 과학도 인간 인식에 좌지우지 되는 거 아냐?'라는 문화적 해석이 나왔고요. 근데 이러니 과학 또한 그 지위가 위태로워지니까, 이런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 '야 근데 세계가 우리 인식대로만 굴러가는 건 아니잖아? 어쨌거나 과학이라는 건 우리 인식으로[만] 되는 건 아니라, 어쨌거나 우리 인식과는 좀 다른 세계가 있는 거잖아'라는 관점에서 다시 '사물의 저항'에 주목했다고 기억해요. 여기까지는 저도 끄덕끄덕한 부분이고요.
'비인간 사물의 행위성'은 저도 으응? 했던 부분이에요. 동물, 식물, 무생물에 따라 좀 층위를 달리 봐야할 것 같기는 한데, 일단 ANT 이론에서 존재론적으로 인간/비인간의 구분을 없애려다 보니 요청한 개념 같기도 합니다(잘 몰라서 요래요래 보수적으로)
가이아 이론의 철지난 변형이라는 비판을 받을만한 건 아마 ANT이론을 가이아 2.0까지 확장한 라투르의 최근 시도겠고, 다른 사상들은 궤가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사이언스에 실린 가이아 2.0 논문은 구하기는 했는데 아직 읽지 못해서ㅠㅠㅠ
전반적으로 이 지면에서 소개하는 사상들이 포스트주의나, 문화와 언어를 강조하면서 모든 것을 상대화 해버리는 입장에서 벗어나 다른 논의들을 찾아보자(그래서 개별 사상가들은 동의하지 않더라도 신유물론 사상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하는)는 입장에서 출발했다고 들었어요.
도구를 인간 활동의 결과로 보아서 노동 활동의 사회적 특징을 더욱 강조하는 건 초기 맑스 입장을 재발견하면서 조직 이론에서 강조했던 포인트라 배웠는데 오오... 저도 도구에는 설계자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관점에 동의해요. 그러니 비인간 사물의 행위성을 이야기하면서 도구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보고요.
3. 여기에서 짚어주신 여러 난점들은 확실히 해러웨이의 입장을 짧은 지면에 펼치려다보니 생긴 문제라 느껴져요. '사이보그 선언' 일부만 읽어봤는데 저도 뭔 소리인지는 잘 ㅋㅋㅋ... 여튼 그나마 제가 받아들인 지점은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이 지닌 함의는 페미니즘 전통이 고수하는 '여성' 관점을(남성도 포함하는 성별 정체성을) 폐쇄적으로 닫지 말자는 시도에서 나왔다는 점이라 생각해요. 사물, 동물,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혼종적 정체성에 초점을 두자는 입장으로 기억해요. 반대로 이러한 혼종성이 여성의 임파워먼트와 연결되기도 하고요.
사이보그 논의든, 반려 논의든 해러웨이의 주장들은 관계의 윤리와 정체성의 혼종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정체성의 혼종성이 인간 사이의 관계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포인트도 함께요.
관계의 윤리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사태를 긍정과 부정 중 하나로 환원하지 않고 이 둘 모두에 충실할 수 있는 자세, 매 순간과 매 관계에 고유한 문제 속에서 책임 있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response-ability)을 배양하는 것이 오늘날 필요한 윤리적 태도이다."라는 이야기가 연결되기도 하고요.
저도 처음 사이보그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였는데, 마지막에 해러웨이의 윤리관을 들었을 때는 살짝 감동했어요.
아 물론 페미니즘 내에서(그리고 한국 젠더연구자나 운동가들 사이에서) 해러웨이 사상에 대한 평가는 갈리더라고요.
이제 자러가야 해서 요로코롬만 피드백을 적습니다. 세세한 댓글 감사합니다아
2. 요고는 저도 브뤼노 라투르를 자세하게 안 읽어봐서 세세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기가 힘드네요. 일단 비인간사물의 행위성이라는 관점은 저도 그 기사를 기고하신 김환석 교수님께 들었을 때도 아리송했어요.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이해한 포인트를 정리하자면 과학적 '관찰'이라고 하면 우리의 인식을 통해 세계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입장일 것이잖아요. 실증주의적 관점이 그것이고요. 그런데 과학사를 살펴보고, 실제 과학자들이 '과학하기'를 하는 모습들을 보니 패러다임이라는 게 존재하고 정상과학의 지위라는 것이 포퍼 식의 반증주의로 따박따박 굴러가지 않는구나라는 깨달음에서 '결국은 과학도 인간 인식에 좌지우지 되는 거 아냐?'라는 문화적 해석이 나왔고요. 근데 이러니 과학 또한 그 지위가 위태로워지니까, 이런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 '야 근데 세계가 우리 인식대로만 굴러가는 건 아니잖아? 어쨌거나 과학이라는 건 우리 인식으로[만] 되는 건 아니라, 어쨌거나 우리 인식과는 좀 다른 세계가 있는 거잖아'라는 관점에서 다시 '사물의 저항'에 주목했다고 기억해요. 여기까지는 저도 끄덕끄덕한 부분이고요.
'비인간 사물의 행위성'은 저도 으응? 했던 부분이에요. 동물, 식물, 무생물에 따라 좀 층위를 달리 봐야할 것 같기는 한데, 일단 ANT 이론에서 존재론적으로 인간/비인간의 구분을 없애려다 보니 요청한 개념 같기도 합니다(잘 몰라서 요래요래 보수적으로)
가이아 이론의 철지난 변형이라는 비판을 받을만한 건 아마 ANT이론을 가이아 2.0까지 확장한 라투르의 최근 시도겠고, 다른 사상들은 궤가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사이언스에 실린 가이아 2.0 논문은 구하기는 했는데 아직 읽지 못해서ㅠㅠㅠ
전반적으로 이 지면에서 소개하는 사상들이 포스트주의나, 문화와 언어를 강조하면서 모든 것을 상대화 해버리는 입장에서 벗어나 다른 논의들을 찾아보자(그래서 개별 사상가들은 동의하지 않더라도 신유물론 사상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하는)는 입장에서 출발했다고 들었어요.
도구를 인간 활동의 결과로 보아서 노동 활동의 사회적 특징을 더욱 강조하는 건 초기 맑스 입장을 재발견하면서 조직 이론에서 강조했던 포인트라 배웠는데 오오... 저도 도구에는 설계자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관점에 동의해요. 그러니 비인간 사물의 행위성을 이야기하면서 도구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보고요.
3. 여기에서 짚어주신 여러 난점들은 확실히 해러웨이의 입장을 짧은 지면에 펼치려다보니 생긴 문제라 느껴져요. '사이보그 선언' 일부만 읽어봤는데 저도 뭔 소리인지는 잘 ㅋㅋㅋ... 여튼 그나마 제가 받아들인 지점은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이 지닌 함의는 페미니즘 전통이 고수하는 '여성' 관점을(남성도 포함하는 성별 정체성을) 폐쇄적으로 닫지 말자는 시도에서 나왔다는 점이라 생각해요. 사물, 동물,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혼종적 정체성에 초점을 두자는 입장으로 기억해요. 반대로 이러한 혼종성이 여성의 임파워먼트와 연결되기도 하고요.
사이보그 논의든, 반려 논의든 해러웨이의 주장들은 관계의 윤리와 정체성의 혼종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정체성의 혼종성이 인간 사이의 관계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포인트도 함께요.
관계의 윤리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사태를 긍정과 부정 중 하나로 환원하지 않고 이 둘 모두에 충실할 수 있는 자세, 매 순간과 매 관계에 고유한 문제 속에서 책임 있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response-ability)을 배양하는 것이 오늘날 필요한 윤리적 태도이다."라는 이야기가 연결되기도 하고요.
저도 처음 사이보그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였는데, 마지막에 해러웨이의 윤리관을 들었을 때는 살짝 감동했어요.
아 물론 페미니즘 내에서(그리고 한국 젠더연구자나 운동가들 사이에서) 해러웨이 사상에 대한 평가는 갈리더라고요.
이제 자러가야 해서 요로코롬만 피드백을 적습니다. 세세한 댓글 감사합니다아
여기 있는 사상들은 21세기 복잡계를 설명하고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모더니즘 이전의 사고와 비교할 때 실용적인 개별적인 분야에서 힘이 강하다는게 특징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이 기획을 읽는 올바른 방법은 A가 '가나다'라고 말하다니 거 참, 이상하네 하고 넘어가는게 아니라
A가 '가나다'라고 말했는데, 이게 어떻게 세계적으로 학계에서 지지받게 되었을까?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겠죠.
등장하는 학자들은 인용횟수가 엄청납니다. 이들을 섣불리 판단하는건 학계 전반을 쉽게 재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 말도... 더 보기
모더니즘 이전의 사고와 비교할 때 실용적인 개별적인 분야에서 힘이 강하다는게 특징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이 기획을 읽는 올바른 방법은 A가 '가나다'라고 말하다니 거 참, 이상하네 하고 넘어가는게 아니라
A가 '가나다'라고 말했는데, 이게 어떻게 세계적으로 학계에서 지지받게 되었을까?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겠죠.
등장하는 학자들은 인용횟수가 엄청납니다. 이들을 섣불리 판단하는건 학계 전반을 쉽게 재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 말도... 더 보기
여기 있는 사상들은 21세기 복잡계를 설명하고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모더니즘 이전의 사고와 비교할 때 실용적인 개별적인 분야에서 힘이 강하다는게 특징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이 기획을 읽는 올바른 방법은 A가 '가나다'라고 말하다니 거 참, 이상하네 하고 넘어가는게 아니라
A가 '가나다'라고 말했는데, 이게 어떻게 세계적으로 학계에서 지지받게 되었을까?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겠죠.
등장하는 학자들은 인용횟수가 엄청납니다. 이들을 섣불리 판단하는건 학계 전반을 쉽게 재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 말도 많이 했고 어려운 개념들이 많기 때문에 단순화된 짧은 글로만 결론 짓지 않는게 좋습니다.
한 가지 문제점은 번역본이나 관련 한국어 논문 중엔 퀄리티가 좋은걸 찾기 어렵다는 겁니다.
읽기 어렵지만 제대로 쓴 영문 텍스트와 약간 잘못 쓰여지긴 했어도 읽기 쉬운 한글 텍스트 중에 잘 골라 읽으시면 됩니다.
모더니즘 이전의 사고와 비교할 때 실용적인 개별적인 분야에서 힘이 강하다는게 특징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이 기획을 읽는 올바른 방법은 A가 '가나다'라고 말하다니 거 참, 이상하네 하고 넘어가는게 아니라
A가 '가나다'라고 말했는데, 이게 어떻게 세계적으로 학계에서 지지받게 되었을까?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겠죠.
등장하는 학자들은 인용횟수가 엄청납니다. 이들을 섣불리 판단하는건 학계 전반을 쉽게 재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 말도 많이 했고 어려운 개념들이 많기 때문에 단순화된 짧은 글로만 결론 짓지 않는게 좋습니다.
한 가지 문제점은 번역본이나 관련 한국어 논문 중엔 퀄리티가 좋은걸 찾기 어렵다는 겁니다.
읽기 어렵지만 제대로 쓴 영문 텍스트와 약간 잘못 쓰여지긴 했어도 읽기 쉬운 한글 텍스트 중에 잘 골라 읽으시면 됩니다.
4. 데리다에 따르면 유럽 형이상학의 중심에는 ‘로고스’라는 절대적 법칙이 있다. 데리다는 로고스가 서구와 남성을 중심에, 비서구와 여성을 주변에 위치시켜 왔다고 논했다. 유럽 형이상학은 세계를 전체로 구축하기 위해 초월적 중심을 상정했고, 음성이나 남근으로 이 중심을 상상적으로 구축함으로써 ‘객관성’을 표방했다. 이에 따라 세계를 중심과 주변으로 구조화하는 위계적 질서를 해체하려면 로고스를 탈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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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저는 로고스라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에서 갑자기 남녀라는 형이하학적인 구분이 나오고
음성이나 남근 중심의...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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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저는 로고스라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에서 갑자기 남녀라는 형이하학적인 구분이 나오고
음성이나 남근 중심의... 더 보기
4. 데리다에 따르면 유럽 형이상학의 중심에는 ‘로고스’라는 절대적 법칙이 있다. 데리다는 로고스가 서구와 남성을 중심에, 비서구와 여성을 주변에 위치시켜 왔다고 논했다. 유럽 형이상학은 세계를 전체로 구축하기 위해 초월적 중심을 상정했고, 음성이나 남근으로 이 중심을 상상적으로 구축함으로써 ‘객관성’을 표방했다. 이에 따라 세계를 중심과 주변으로 구조화하는 위계적 질서를 해체하려면 로고스를 탈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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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저는 로고스라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에서 갑자기 남녀라는 형이하학적인 구분이 나오고
음성이나 남근 중심의 상상적 구축과 '객관성'을 연결짓는 감성이 이해가 안갑니다.
본인이 싫어하고 비판하고 싶은 주제를 하나로 결부시키는 허수아비치기랄까,
세계를 전체로 구축하기 위해 초월적 중심을 상정한다는 것은 세계를 전체로 상상하기 위한
가상적 이미지에 불과할 뿐이지 그게 로고스가 아닐텐데 이해를 돕기 위해 연상하기 쉬우라고
그림-이미지를 떠올리고는 그 이미지에서 남근이 생각나니 여성을 주변에 위치시켜왔다는 주장은
이미 논리가 아니라 감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서구사회의 전체론 사고가 비서구를 주변으로 몰았다거나, 여성을 주변으로 몰았다는 말은 다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서구와 여성을 주변으로 몰게 된 연유를 이야기하면서
'전체론적 사고를 위해서는 중심의 설정이 필요하고 중심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주변이 생기게 된다'
같은 설명은 이해할 수 있어도 "초월적 중심을 상정하면서 음성이나 [남근]으로 이 중심을 상상적으로
구축함으로써 '객관성'을 표방했다"같은 서술은 그야말로 객관성을 아예 포기해버린 서술이에요.
이데아에 대한 동굴의 우화를 얘기하면서 왜 삽화에 그려진 동굴인간들이 다 남자냐 같은
불만을 이야기하는 셈이죠. 논의의 차원을 갑자기 건너뛰어버린 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클라인병의 삽화를 보고 어떻게 이걸 2차원 종이위에 그렸냐 같은 불만..
이어지는 서술을 보면 스트래선이란 사람은 여기서는 좀 벗어나려고 하는것 같긴 합니다.
"신체의 부분적 감각을 계속 주입함으로써 전체론적 사고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세계에 대한 앎을 완결적으로 닫아 놓는 것이 아니라 닫힌 전체를 절개해 앎을 무한히 생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전체일 수 없으며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로 대체된다."
그런데 이건 다원주의의 자가당착을 해소하려한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다원주의의 극단적인 형태 그 자체일 뿐인 것 같은데요? 결국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나 앎은 없다는 거죠.
'단 하나 절대적인 것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 뿐이다'라는 상대주의와 차이가 뭡니까?
이 사상이 부정하고자 하는 전체론은 보편론이기도 하죠. 결국 보편타당한 가치는 없고
각각 부분 관계속의 진실만 있으며 각 부분관계들은 각자가 모두 주체라는거죠.
저는 이 스트래선의 주장을 반박하려는게 아닙니다. 동감해요.
하지만 이게 새로운 발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런 태도는 문화 상대론자가 취하기 좋은 입장이 되고,
IS 등 이슬람이나 북한등 타국 인권탄압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면
인권등 전체적으로 절대적으로 옳은 보편적 가치는 있다는 카운터가 날아오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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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저는 로고스라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에서 갑자기 남녀라는 형이하학적인 구분이 나오고
음성이나 남근 중심의 상상적 구축과 '객관성'을 연결짓는 감성이 이해가 안갑니다.
본인이 싫어하고 비판하고 싶은 주제를 하나로 결부시키는 허수아비치기랄까,
세계를 전체로 구축하기 위해 초월적 중심을 상정한다는 것은 세계를 전체로 상상하기 위한
가상적 이미지에 불과할 뿐이지 그게 로고스가 아닐텐데 이해를 돕기 위해 연상하기 쉬우라고
그림-이미지를 떠올리고는 그 이미지에서 남근이 생각나니 여성을 주변에 위치시켜왔다는 주장은
이미 논리가 아니라 감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서구사회의 전체론 사고가 비서구를 주변으로 몰았다거나, 여성을 주변으로 몰았다는 말은 다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서구와 여성을 주변으로 몰게 된 연유를 이야기하면서
'전체론적 사고를 위해서는 중심의 설정이 필요하고 중심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주변이 생기게 된다'
같은 설명은 이해할 수 있어도 "초월적 중심을 상정하면서 음성이나 [남근]으로 이 중심을 상상적으로
구축함으로써 '객관성'을 표방했다"같은 서술은 그야말로 객관성을 아예 포기해버린 서술이에요.
이데아에 대한 동굴의 우화를 얘기하면서 왜 삽화에 그려진 동굴인간들이 다 남자냐 같은
불만을 이야기하는 셈이죠. 논의의 차원을 갑자기 건너뛰어버린 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클라인병의 삽화를 보고 어떻게 이걸 2차원 종이위에 그렸냐 같은 불만..
이어지는 서술을 보면 스트래선이란 사람은 여기서는 좀 벗어나려고 하는것 같긴 합니다.
"신체의 부분적 감각을 계속 주입함으로써 전체론적 사고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세계에 대한 앎을 완결적으로 닫아 놓는 것이 아니라 닫힌 전체를 절개해 앎을 무한히 생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전체일 수 없으며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로 대체된다."
그런데 이건 다원주의의 자가당착을 해소하려한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다원주의의 극단적인 형태 그 자체일 뿐인 것 같은데요? 결국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나 앎은 없다는 거죠.
'단 하나 절대적인 것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 뿐이다'라는 상대주의와 차이가 뭡니까?
이 사상이 부정하고자 하는 전체론은 보편론이기도 하죠. 결국 보편타당한 가치는 없고
각각 부분 관계속의 진실만 있으며 각 부분관계들은 각자가 모두 주체라는거죠.
저는 이 스트래선의 주장을 반박하려는게 아닙니다. 동감해요.
하지만 이게 새로운 발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런 태도는 문화 상대론자가 취하기 좋은 입장이 되고,
IS 등 이슬람이나 북한등 타국 인권탄압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면
인권등 전체적으로 절대적으로 옳은 보편적 가치는 있다는 카운터가 날아오곤 하죠.
이 이야기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사상가가 누구랑 싸우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고 주장만 개략적으로 써놓았기 때문이에요. 데리다가 로고스(언어)를 비판하는 것은 상대가 언어중심 구조주의자일 때고, 팔루스(남근)을 비판할 때는 상대가 라캉파 정신분석학파일 때에요. 남성을 비판하는 것은 이성애/남성우월론자를 상대할 때고요. 데리다가 보기에 이 집단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사고 구조는 똑같으니 같은 방식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거고요.
스트래선 같은 경우 ‘전체론에 흠집을 낸다’는 것은 라캉, 들뢰즈, 데리다 같이 포... 더 보기
스트래선 같은 경우 ‘전체론에 흠집을 낸다’는 것은 라캉, 들뢰즈, 데리다 같이 포... 더 보기
이 이야기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사상가가 누구랑 싸우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고 주장만 개략적으로 써놓았기 때문이에요. 데리다가 로고스(언어)를 비판하는 것은 상대가 언어중심 구조주의자일 때고, 팔루스(남근)을 비판할 때는 상대가 라캉파 정신분석학파일 때에요. 남성을 비판하는 것은 이성애/남성우월론자를 상대할 때고요. 데리다가 보기에 이 집단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사고 구조는 똑같으니 같은 방식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거고요.
스트래선 같은 경우 ‘전체론에 흠집을 낸다’는 것은 라캉, 들뢰즈, 데리다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분류되는 논자들이 구조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결여 또는 구조 속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제시하는데 이게 전체론/일원론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데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여기는 논의할게 많아서 댓글로 설명은 어렵네요. 제가 부족한 탓이겠지만요. 요약하면, 위 논의를 따라가려면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20세기 후반까지의 논의들이 현실과 괴리되었기에 어떻게든 다시 현실로 돌아오거나 현실을 설명해보려는 게 최근 경향이에요. 아직 십년 정도 밖에 안 되었으니 어떻게 발전할지 지켜봐주셔요.
스트래선 같은 경우 ‘전체론에 흠집을 낸다’는 것은 라캉, 들뢰즈, 데리다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분류되는 논자들이 구조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결여 또는 구조 속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제시하는데 이게 전체론/일원론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데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여기는 논의할게 많아서 댓글로 설명은 어렵네요. 제가 부족한 탓이겠지만요. 요약하면, 위 논의를 따라가려면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20세기 후반까지의 논의들이 현실과 괴리되었기에 어떻게든 다시 현실로 돌아오거나 현실을 설명해보려는 게 최근 경향이에요. 아직 십년 정도 밖에 안 되었으니 어떻게 발전할지 지켜봐주셔요.
제가 스트래선은 완전 몰라서 지적하신 부분에 더 보충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쉽네요ㅠㅠ 다만 마지막에 지적하신 부분부터 스트래선의 논의가 기존의 사상가들과 구별되는 다른 지점이 나타나지 않나 싶어요(한 쪽은 위에서 홍차의 오후님이 짚어주셨네요).
기회되면 논문 찾아서 말씀하신 포인트를 어떻게 스트래선이 극복하는지, 혹은 이미 스트래선의 전제 속에서 해결된 포인트인지 찾아볼게요. 티타임에 정리해서 올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 올리지 못한 주제가 산더미라 휴,,,
일단 몇 가지 아티클을 읽어봐야겠어요.
... 더 보기
기회되면 논문 찾아서 말씀하신 포인트를 어떻게 스트래선이 극복하는지, 혹은 이미 스트래선의 전제 속에서 해결된 포인트인지 찾아볼게요. 티타임에 정리해서 올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 올리지 못한 주제가 산더미라 휴,,,
일단 몇 가지 아티클을 읽어봐야겠어요.
... 더 보기
제가 스트래선은 완전 몰라서 지적하신 부분에 더 보충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쉽네요ㅠㅠ 다만 마지막에 지적하신 부분부터 스트래선의 논의가 기존의 사상가들과 구별되는 다른 지점이 나타나지 않나 싶어요(한 쪽은 위에서 홍차의 오후님이 짚어주셨네요).
기회되면 논문 찾아서 말씀하신 포인트를 어떻게 스트래선이 극복하는지, 혹은 이미 스트래선의 전제 속에서 해결된 포인트인지 찾아볼게요. 티타임에 정리해서 올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 올리지 못한 주제가 산더미라 휴,,,
일단 몇 가지 아티클을 읽어봐야겠어요.
https://www.anthroencyclopedia.com/entry/relations
M. STRATHERN. (2019). A clash of ontologies? Time, law, and science in Papua New Guinea
R. Sansi. & M. Strathern. (2016) Art and anthropology after relations
읽지도 못할 논문만 쌓여가는 건 악덕인데 흠... 그래도 여유 생기면 티타임에 이해한 바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당
피드백 사랑합니다♡
기회되면 논문 찾아서 말씀하신 포인트를 어떻게 스트래선이 극복하는지, 혹은 이미 스트래선의 전제 속에서 해결된 포인트인지 찾아볼게요. 티타임에 정리해서 올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 올리지 못한 주제가 산더미라 휴,,,
일단 몇 가지 아티클을 읽어봐야겠어요.
https://www.anthroencyclopedia.com/entry/relations
M. STRATHERN. (2019). A clash of ontologies? Time, law, and science in Papua New Guinea
R. Sansi. & M. Strathern. (2016) Art and anthropology after relations
읽지도 못할 논문만 쌓여가는 건 악덕인데 흠... 그래도 여유 생기면 티타임에 이해한 바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당
피드백 사랑합니다♡
6.의 경우 너무 내용이 없는데.. 저는 인간 비인간의 엄격한 구별에 반대하는 편입니다. 사람도 동물이고 동물도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무시하는거죠. 어찌보면 돼지 1억마리의 생명과 사람하나의 생명을 저울에 올리면 돼지 1억마리가 소중할 수 있죠.
저는 제가 어설픈 채식주의자들보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샐러드에서 민달팽이가 기어나와도 자두에서 애벌레가 나와도 소리지르지 않고 관찰하거나 놔줄 수 있는 제가 생명친화적이고, 생명의 순환과 도축에 아무 생각이 없다가 처음으로 목격한 끔찍함에 ... 더 보기
저는 제가 어설픈 채식주의자들보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샐러드에서 민달팽이가 기어나와도 자두에서 애벌레가 나와도 소리지르지 않고 관찰하거나 놔줄 수 있는 제가 생명친화적이고, 생명의 순환과 도축에 아무 생각이 없다가 처음으로 목격한 끔찍함에 ... 더 보기
6.의 경우 너무 내용이 없는데.. 저는 인간 비인간의 엄격한 구별에 반대하는 편입니다. 사람도 동물이고 동물도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무시하는거죠. 어찌보면 돼지 1억마리의 생명과 사람하나의 생명을 저울에 올리면 돼지 1억마리가 소중할 수 있죠.
저는 제가 어설픈 채식주의자들보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샐러드에서 민달팽이가 기어나와도 자두에서 애벌레가 나와도 소리지르지 않고 관찰하거나 놔줄 수 있는 제가 생명친화적이고, 생명의 순환과 도축에 아무 생각이 없다가 처음으로 목격한 끔찍함에 엇나간 사람들 정도로 폄하하는게 솔직한 심경입니다. 아마존의 사냥꾼들이 사냥감에 대해 가지는 유대감과 인간적 권리를 동물에게 도입하려는 시도는 다른겁니다.
아마존의 원시부족은 기술과 동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축화가 '효율이 안 좋으니' 안한겁니다. 주위에 사냥감이 풍족하고 가축을 공격할 육식동물도 넘쳐나는데 가축을 왜 키워요.
저는 제가 어설픈 채식주의자들보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샐러드에서 민달팽이가 기어나와도 자두에서 애벌레가 나와도 소리지르지 않고 관찰하거나 놔줄 수 있는 제가 생명친화적이고, 생명의 순환과 도축에 아무 생각이 없다가 처음으로 목격한 끔찍함에 엇나간 사람들 정도로 폄하하는게 솔직한 심경입니다. 아마존의 사냥꾼들이 사냥감에 대해 가지는 유대감과 인간적 권리를 동물에게 도입하려는 시도는 다른겁니다.
아마존의 원시부족은 기술과 동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축화가 '효율이 안 좋으니' 안한겁니다. 주위에 사냥감이 풍족하고 가축을 공격할 육식동물도 넘쳐나는데 가축을 왜 키워요.
어휴 감기 때문에 헤롱대면서 과제하다가 이제야 댓글을 다네요. 저는 데스콜라의 의견은 무척 흥미롭게 봤어요. 작년에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 '숲은 생각한다'였는데, 그 내용과 겹치는 이야기들이 일부 있었거든요.
[아마존의 원시부족은 기술과 동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축화가 '효율이 안 좋으니' 안한겁니다] 이 부분은 제가 잘 몰라서 뭐라 코멘트를 못하겠어요ㅠ 단순히 논문 하나, 주장 하나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관련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읽었어야 풍부하게 말할 수 있을 것 ... 더 보기
[아마존의 원시부족은 기술과 동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축화가 '효율이 안 좋으니' 안한겁니다] 이 부분은 제가 잘 몰라서 뭐라 코멘트를 못하겠어요ㅠ 단순히 논문 하나, 주장 하나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관련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읽었어야 풍부하게 말할 수 있을 것 ... 더 보기
어휴 감기 때문에 헤롱대면서 과제하다가 이제야 댓글을 다네요. 저는 데스콜라의 의견은 무척 흥미롭게 봤어요. 작년에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 '숲은 생각한다'였는데, 그 내용과 겹치는 이야기들이 일부 있었거든요.
[아마존의 원시부족은 기술과 동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축화가 '효율이 안 좋으니' 안한겁니다] 이 부분은 제가 잘 몰라서 뭐라 코멘트를 못하겠어요ㅠ 단순히 논문 하나, 주장 하나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관련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읽었어야 풍부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말씀하신 부분도 고려할 만한 지점이겠지요.
한국 내에서 동물-인간관계를 탐구하시는 연구자께 최근에 들은 바로는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아요), 20~30대를 인터뷰 했을 때와 6~70대 이상을 인터뷰 했을 때 개에 대한 마음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20~30대에게 개가 가족에 가깝다면, 60~70대에게는 가축이라는 인식적인 위계가 있대요. 고양이야 최근에야 '반려동물'의 영역에 들어왔으니 차치하고서라도, 개를 키우는 행위는 계속 되었으니 비교가 되더라고요. 물론 아마존 부족의 동물 인식에 관한 루카포드님의 문제의식을 확장해 짐작해보자면, 개를 키우는 공간이 집 안이었는가(도시의 아파트 생활의 특징에서 비롯하는), 마당이었는가(시골 전원주택 조건에서 가능한)의 차이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지난 번 말씀드렸던 스트래선 글들은 짬짬히 읽고 있어요. 아직 이해가 부족하기는 한데, '다원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라는 지적 중 일부를 극복할 수 있는 포인트들은 보이더라고요. 다원주의 이야기를 할 때 문화 간 차이를 끌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스트래선은 문화라 불리는 총체(entity)를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는 듯해요. 관계(Relation)에 관한 스트래선의 글을 읽어보니, 이 Relation을 Entity들 사이의 그것(Betweenness)으로만 보지 않고, 우리가 entity로 구분하여 인지하는 단위들 내부에서도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Withinness) 변화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야 한다고 보네요.
이 경우 [IS 등 이슬람이나 북한등 타국 인권탄압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는 것은 극복 가능한 듯해요. 국가라는 entity 내부의 요소들을 무한히 접근하여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주목하자는 방식으로요. 지금 읽고 있는 글에서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을 일부 인용하던데, 막연하게 알고 있던 모나드론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네요. 일단은 더 읽어보는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기해주셨던 [그래서 새로운 게 뭐야?]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ㅎ_ㅎ 이것도 더 읽어보는 걸로...
[아마존의 원시부족은 기술과 동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축화가 '효율이 안 좋으니' 안한겁니다] 이 부분은 제가 잘 몰라서 뭐라 코멘트를 못하겠어요ㅠ 단순히 논문 하나, 주장 하나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관련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읽었어야 풍부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말씀하신 부분도 고려할 만한 지점이겠지요.
한국 내에서 동물-인간관계를 탐구하시는 연구자께 최근에 들은 바로는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아요), 20~30대를 인터뷰 했을 때와 6~70대 이상을 인터뷰 했을 때 개에 대한 마음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20~30대에게 개가 가족에 가깝다면, 60~70대에게는 가축이라는 인식적인 위계가 있대요. 고양이야 최근에야 '반려동물'의 영역에 들어왔으니 차치하고서라도, 개를 키우는 행위는 계속 되었으니 비교가 되더라고요. 물론 아마존 부족의 동물 인식에 관한 루카포드님의 문제의식을 확장해 짐작해보자면, 개를 키우는 공간이 집 안이었는가(도시의 아파트 생활의 특징에서 비롯하는), 마당이었는가(시골 전원주택 조건에서 가능한)의 차이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지난 번 말씀드렸던 스트래선 글들은 짬짬히 읽고 있어요. 아직 이해가 부족하기는 한데, '다원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라는 지적 중 일부를 극복할 수 있는 포인트들은 보이더라고요. 다원주의 이야기를 할 때 문화 간 차이를 끌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스트래선은 문화라 불리는 총체(entity)를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는 듯해요. 관계(Relation)에 관한 스트래선의 글을 읽어보니, 이 Relation을 Entity들 사이의 그것(Betweenness)으로만 보지 않고, 우리가 entity로 구분하여 인지하는 단위들 내부에서도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Withinness) 변화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야 한다고 보네요.
이 경우 [IS 등 이슬람이나 북한등 타국 인권탄압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는 것은 극복 가능한 듯해요. 국가라는 entity 내부의 요소들을 무한히 접근하여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주목하자는 방식으로요. 지금 읽고 있는 글에서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을 일부 인용하던데, 막연하게 알고 있던 모나드론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네요. 일단은 더 읽어보는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기해주셨던 [그래서 새로운 게 뭐야?]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ㅎ_ㅎ 이것도 더 읽어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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