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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2/02/03 18:49:18
Name   구밀복검
Subject   2016년 촛불은 정말 혁명이었을까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45157#home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주제곡으로 유명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영화 ‘졸업’은 어떤가. 미국 캘리포니아 중산층 출신 모범생 벤저민은 이웃의 중년 부인 로빈슨 부인의 유혹에 넘어가 일탈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뒤이어 바로 그 로빈슨 부인의 딸 엘레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질투에 눈이 먼 로빈슨 부인은, 자기 딸에게 자신과 벤저민의 불륜을 폭로해버린다. 충격을 받은 엘레인은 벤저민을 떠나 사랑하지도 않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자 결혼식장에 들어간다. 이에 벤저민은 식장에 난입하여 엘레인의 손을 잡고 도망쳐 나와 버스에 오른다. 영화는 끝난다. 그 이후 벤저민과 엘레인은 과연 잘 살았을까. 버스 뒷좌석에서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벤저민과 엘레인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단한 모습이었다.



영화 졸업이라니 역시 영민쌤이야

"개인의 사랑이든 정치적 사랑이든, 낭만적 순간들은 전체의 극히 일부다. 인생과 역사의 대부분은 그렇고 그런 일상이 채운다. 재미없는 비(非)혁명적 시간과 마주해야 한다. 그 일상의 나날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드라마가 없으므로, 그 체험은 멋지게 작품화하기 어렵다. 대만의 전설적인 명감독 에드워드 양의 영화 ‘해탄적일천’은 바로 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한다.

‘해탄적일천’에는 열렬한 연애를 하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탄웨이칭과 가리. 탄웨이칭은 전도 유망한 의대생과 열애에 빠지지만, 그 의대생은 완고한 의사 아버지의 바람대로 탄웨이칭을 버리고 다른 의사 집안의 사위가 된다. 그 의대생의 여동생 가리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집에서 정해주는 배필을 마다하고, 사랑하는 남자 더웨이와 살기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가리와 더웨이는 ‘졸업’의 엘레인과 벤저민처럼 현실에 맞서 혁명과도 같은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해탄적일천’의 놀라운 점은 이 선택이 영화의 결말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다. ‘해탄적일천’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춘향전’이나 ‘졸업’이나 ‘1987’이 모두 피해갔던 그 이야기. 어쩌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야기. 사랑 이후의 삶에 대하여, 혁명 이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익숙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에 몰입하는 남편이 된 더웨이, 그 같은 남편의 관심을 갈구하는 전업주부가 된 가리. 채워줄 수 없고 채워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점점 위기로 치닫는다. 그래도 남편을 계속 의지하고 살아 보고자 마음먹은 어느 날, 남편 더웨이의 실종 신고가 접수된다. 이제 가리는 해변에서 실종된 사람이 과연 남편이 맞는지 확인하러 해변으로 간다. ‘해탄적일천(海灘的一天)’이란 낭만적인 영화 제목은 바로 그 해변에서의 하루라는 뜻이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반도주하여 결혼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주체적 개인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완고한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했다고 해서 가리가 꼭 주체적 개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야반도주라는 혁명적 사태를 치러냈지만, 알고 보면 의탁 대상을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사랑이란 말로 치장했을 뿐, 결혼은 결국 또 다른 타자에의 의존이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바로 그 의존성 때문에 결혼 생활도 위기에 처한다. 야반도주라는 큰 희생을 치르고 결혼했다고 생각하기에, 남편에게 그만큼 큰 보상과 관심을 요구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가정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완고한 군부 독재를 이겨내고 거리에서 민주화를 달성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체적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혈 사태를 겪었지만, 알고 보면 의탁 대상이 군부 정권에서 민간인 교주로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또 다른 타자에의 의존에 불과하다. 그 의존성 때문에 정치도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가두시위라는 큰 희생을 치르고 혁명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에, 정부에게 그만큼 큰 보상과 관심을 요구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정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혁명 이후의 일상을 살아 보면 선과 악은 그다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완고한 도덕주의자인 줄 알았던 아버지는 성추행범으로 판명된다. 아버지 편인 줄 알았던 어머니는 사실 딸의 야반도주를 알고도 묵인한 것이었다. 믿었던 남편은 술집 여자와 놀아나는 중이다. “당신은 팔자 좋은 환경에서 자랐나 보군요, 사랑을 믿다니.” 남편의 애인은 가리를 비웃는다. “사랑이라뇨. 이 세상엔 사랑은 없고 충동만 있어요.” 이 지점에 이르자, 억압에 저항하여 주체적인 참사랑을 성취했다는 가리의 낭만적 서사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서사가 무너지자, 해변에서 실종된 사람이 실제 남편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비로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아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가리는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해변을 떠난다. 야반도주할 때도 되지 못했던 주체적 개인이 이제야 되어 떠난다. 그다지 낭만적이지도 않고 매사가 복잡하고 흐릿하기만 한 현실을, 완전한 동지도 없고 완전한 적도 없는 뒤죽박죽인 세상을, 이제 주체적 개인이 되어 꾸역꾸역 살아갈 것이다. 사랑과 혁명의 의미마저 오롯이 재정의해가면서.

2016년 촛불 시위는 정말 ‘혁명’이었을까. 그것이 정말 혁명이었다면, 촛불혁명이 약속한 세상은 정녕 도래했을까. 혁명은 일어났으나 혁명이 약속한 세상이 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친다.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혁명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를 모르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외칠 뿐이라고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말한 적이 있다. 이제 3월이 되면, 해변에서 실종된 사람이 혁명아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주체적 개인이 되어 투표장을 떠나야 한다.



참고로 해탄적일천은 83년작이며 대만의 80년대는 한국의 80년대와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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