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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3/05/12 18:26:50 |
Name | 구밀복검 |
Subject | 장훈 “내 조국이니 말할수 있다...日에 사과하라, 돈내라 언제까지 할건가” |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3/05/12/LUBK6MP7AFDCXEFSBQUKTZUQZU/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7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G7(7국) 정상회의(5월 19~21일)에 맞춰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하기로 했다. 피폭자이자 일본에서 스스로 한국인임을 밝히고 살아온 장씨가 양국 정상의 위령비 방문에 대해 느끼는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장훈은 1940년 6월 19일 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출신이다. 1939년에 어머니가 형·누나 3명을 데리고 히로시마로 왔다. 돈을 벌러 온 아버지를 따라온 것이다. 이후 아버지는 귀국했다가 병사했고 가족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정착했다. “무더운 여름 날씨였던 1945년 8월 6일, 당시 다섯 살이었던 저는 친구들과 밖에 놀러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번쩍, 쿵’ 했습니다. 정신을 되찾았을 땐 어머니가 저를 꽉 껴안고 있었습니다. 유리 파편에 찔린 어머니의 치마저고리는 피로 빨갛게 물들었습니다...그날 피란해서 마을의 밭에 갔는데 심한 화상에 살이 탄 사람들 천지였다. 심한 냄새를 기억한다..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피부가 하얗고 키가 큰 6학년 누나가 그날 죽었다.. 폭이 투하됐을 때 큰누이는 수십 명과 함께 학교에서 쓰러졌고 어머니는 열기에 녹아 얼굴도 못 알아보는 아이들 틈새에서 명찰로 딸을 찾았습니다. 누이는 언제나 하얀 얼굴이어서 같이 길을 걸으면 남들이 ‘예쁘다’고 했었는데…. 그 얼굴이 짓물러 알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어머니에게 ‘누난 언제 죽었나’라고 물었더니 아무 답을 안 했다... 새벽에 (어머니의) 통곡 소리가 났으니 아마 그때였겠지요. 지옥이라는 세계가 있다면, 그 순간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진짜 무서운 건 원폭 이후의 사회였다... 피폭자는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았습니다. 원폭으로 인해 팔·다리가 없어졌거나, 화상 입은 아이들하곤 친구들이 안 놀아줬어요. 부모들이 ‘피폭도 전염병처럼 옮는다’고 생각해서였죠.” 장훈은 프로야구 선수를 은퇴하고 60살 넘을 때까지도 피폭자라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사람 타는 냄새’를 떠올리는 게 무서워, 피폭 기억이 날 것 같으면 배트를 휘둘렀다고 한다... “60살까지만 해도 (원폭의) 참상을 전시한 히로시마 원폭기념관에 한 번도 못 갔다... 두 번 정도 기념관 입구까진 갔는데 손이 떨려서 못 들어가겠더라." 장훈은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다. 한 번도 한국인임을 숨긴 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는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들이 따돌림을 많이 당했지만 나는 야구를 해서 그랬는지 거의 차별받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인이란 감각이 오히려 없었다”고 했다. 그를 ‘한국인’이라고 자각하게 해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18살 장훈에게 프로야구 구단인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니혼햄)가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프로야구단에 외국인 선수를 두 명까지만 허용하는 게 규정인데 도에이 구단엔 이미 미국인 2명이 있었다. 도에이의 구단주가 양자 입양을 제안했다. 일본 국적으로 ‘세탁’을 하자는 얘기였다. “어머니에게 구단주의 말을 전했더니 단호히 답하시더군요. ‘이제 됐다. 야구 그만둬라. 조국을 팔면서까지 야구 선수가 될 필요는 없다.’” 도에이는 결국 일본 야구협회에 압력을 넣어 ‘1945년 이전 일본 출생자는 예외’라는 규정을 추가한 끝에 장훈을 영입했다. 장훈은 “그날 밤 어머니가 ‘일본이 무기와 인원이 많아서 우리가 졌을 뿐이지, 같은 무기였으면 안 졌다. 우리는 앞으로 지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어머니가 ‘조선 반도’의 강한 여성이란 걸 알았다”고 했다. 아들의 전부였던 야구보다, 지긋지긋한 가난 탈출보다, 어머니에겐 조국이 소중했던 것이다. ‘한국을 원망한 적 없냐’고 묻자... “말하면 큰일 나니까 아무도 말 안 하지만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재일 교포니까, (한국이) 내 조국이니까 말할게요. 언제까지 일본에 ‘사과하라’, ‘돈 내라’ 반복해야 하나요? 부끄럽습니다.... (반일 같은)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다”며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웃 나라(일본)를 적으로 돌렸을 때 우리 재일 교포는 너무 괴로웠다. 그만큼 지금 한일 관계의 눈을 녹여주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윤상(윤 대통령에 대한 일본식 존칭)은 역시 멋있는 구석이 있어요. 한반도의 진짜 사나이예요.” 장훈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또한 과거사에 대해 ‘가슴 아프다’고 말했는데, ‘사과한다’는 말은 안 썼지만 (재일 교포인) 나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다양한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어서 재미있는 기사네요. 그야 조선일보가 스피커를 빌려 편향적인 윤비어천가를 쓰려는 의도는 명백합니다만, 그와 별개로 위 기사에서 장훈의 개인사는 이미 이전에도 여러 번 언급이 된 겁니다. 즉 시의성 있게 조선일보가 다시 행간을 마사지한 건 맞지만 그 대부분은 현재의 외교적 맥락과 관계 없이 이전부터 (비정치적으로) 표명이 된 사항이란 거. 그만큼 재일교포/자이니치와 관련된 이런저런 맥락들을 한국이든 일본이든 적절히 캐치를 못하고 포섭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옳지요. 조선일보가 한 건 사각지대에서 표류하는 재일의 스토리에 일종의 내러티브 구조를 새로 붙여준 것뿐. 그리고 조선일보 오리지널이 아니고 기시다 주연/윤석열 엑스트라가 된 현재의 외교 구도가 내러티브 구조를 자연스레 만들어준 거죠. 쉽게 말해 재일 담론에 있어 종주권을 지금 일본이 쥐고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겁니다. 독도를 한국이 점유한 것처럼 재일 담론은 일본이 점유하게 된 거. 뒤집어 말하면 '피식민 서사', 독립운동의 역사가 온전히 한국 지분은 아니라는 뜻도 되지요. 물론 한국 사회에서 이걸 심각하게 받아들일 리는 없을 겁니다. 재일이니 뭐니 간혹 인터넷에서 위안부나 징용공과 엮어서 일본 샌드백 삼을 때에나 들고 오는 이슈이지 다들 실제 재일에 대해 아무 관심 없으니까.. 아마 00년대 조선족에 대한 동포적 인식이 10년대로 넘어오면서 멸시일변도로 극적으로 달라졌듯 재일 역시 일정 임계치를 넘기면 사람 취급도 안 해주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뭣보다 재일 1세대는 이제 수명이 다하고 있으니 조선과 일본, '내선' 사이의 문제가 뒤얽혀 국적 같은 것으로 구별하기 어려웠던 시절의 복합적인 맥락은 다들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죠. 장률의 '군산'이나 최양일의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의 디아스포라라는 맥락은 그냥 이대로 역사 속으로 흘러가게 된 것입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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